[이창]
[이창] 브로크백 드리밍
2006-04-14
글 :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브로크백 마운틴>

쳇, 그렇다고 비웃을 것까지야. 그놈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문제라니까.

얼마 전 내가 일하는 잡지를 위해 게이들의 수다회를 열었다. 고매하신 게이 게스트 세분을 모시고 ‘한·미·일·불, 호모 4부작’에 대해 수다를 떨어달라고 부탁했다. <왕의 남자> <브로크백 마운틴> <메종 드 히미코> <타임 투 리브>, 별로 상관없는 작품들이 단지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개봉한 게이가 나오는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호모 4부작으로 ‘작명질’당했다. 수다회가 끝나갈 무렵, 쪽팔릴까봐 저어했으나 결국은 뱉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여러분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어디에요?” 나름대로 우회해서 ‘여러분의 이상향이 어디냐고’ 진지하게 물었으나, 세분께서는 흠칫 놀라시더니 허걱하는 비웃음으로 즐해버리셨다. 사태 수습을 위해 서둘러 다음 질문, “그러면 오다기리 조 하고 히스 레저 중에 누가 더 예뻐요?” 다행히 고매하신 여러분들의 불꽃같은 논쟁은 썰렁한 분위기를 훈훈하게 녹였다.

텍사스에서 와이오밍까지 16시간. 잭이 에니스를 만나러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잭과 에니스, 너네들한텐 그래도 로맨스라도 있잖아, 내 인생엔 비극적인 로맨스조차 없다고. 남들이 눈시울을 적실 때 남몰래 질투하다가 “열여섯 시간”이라는 대사를 보는(‘듣는’이 아니라) 순간 ‘메∼롱’했다. 잭, 너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16시간이나 걸리지만 나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6시간이면 족하단다. 땀 뻘뻘 흘리면서 운전하지 않아도 조종사 아저씨가 사뿐히 모셔다준단다. 마침 영화사가 ‘브로크백’에 ‘회귀, 귀향’의 뜻이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니, 나의 브로크백 드리밍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외로운 30대의 마음의 고향, 브로크백은 방콕이다. “방콕하다” 할 때의 ‘방콕’이면 좋겠으나, 비행기로 6시간 걸리는 타이 ‘방콕’이다.

남동철 편집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곳은 내게 돈 내고 들어가는 ‘에덴동산’이다. 원화의 위력에 기대 단돈(?) 100만원이면 일주일 동안 에덴동산에서 신나게 꼭짓점 댄스, 댄스, 댄스! 잭과 에니스처럼 일년에 두어번 브로크백에 간다. 나의 브로크백 아니 방콕은 호텔, 사우나, 클럽의 꼭짓점으로 구성된다. 언제나 같은 호텔에서 자고, 같은 사우나에 가고, 같은 클럽에서 논다. 세개의 꼭짓점을 이은 세변의 거리는 택시로 10분을 넘지 않는다. 쾌락의 삼각주에서는 동족의 상봉이 이루어진다. 도쿄, 타이베이, 싱가포르 등 아시아 경향 각지에서 날아온 급만남을 갈구하는 에니스들이 기다린다. 클럽에서 일본인 에니스를 만나면? 네 단어로 급만남이 완성된다. 일단 마음에 드는 니혼진을 만나면, 잭과 에니스의 첫 만남처럼 서로를 힐끔거리다가 쭈뼛거리며 다가가 “곤니치와”. 그분도 급만남을 원하는지 궁금하면 눈에 ‘시네루’ 잔뜩 주면서 “스미마생”. 다행히 눈이 맞아 급만남이 성사되면 텐트 안의 그들처럼 침묵이 금이다. 다만 만남이 끝나면 반드시 “아리가토” 감사를 표시해 동방예의지국의 위상을 드높인다. 마지막으로 그분이 문을 열고 나가면 “사요나라”. 중국 손님을 모시면 “니 하오”로 시작해서 “짜이 지엔”으로 마무리한다. 혹시나 잊을세라 호텔 화장실에는 “당신의 일상은 잊으라”는 준엄한 경구가 붙어 있다. 그리하여 나는 발목을 잡는 일상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곳에서 나 자신이 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며 눈물의 이별가도 부른다. 돈무앙 공항을 떠나올 때마다 비행기 창문에 박치기하며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하필이면 이북에서 만든 이별가를 떠올린다. 살짝 눈물 나올 뻔한다. 돌아와서는 야심만만 프로젝트, ‘For ME’. 에니스를 제대로 영접하기 위해 근육(Muscle)을 기르고, 영어(English)를 공부한다. 난생처음 헬스기구에 매달려 분투하고, 지하철에서 영어회화를 듣는다. 서울에 있어도 방콕을 느낀다. <시티즌 독>에 방콕 실롬 거리가 나오자 더위가 훅 끼치며 어찌나 살갑던지. 실롬은 방콕 꼭짓점의 중심이다. 현영 누나의 “누나누나예∼”가 나오면 오존(O-zone)의 “노마노마예∼”로 착각하면서 2003년의 클럽을 느끼고, 휴대폰 광고에서 “돈 차∼” 하면 2005년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때 그 노래를 리믹스하던 방콕 클럽 신(Scene)이 선하다.

살면서 품을 희망이 기껏 이 정도냐는 비애를 가까스로 외면하면서, 이 풍진 세상에 나만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안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없었다면 잭과 에니스의 인생은 더욱 불행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어쩌면 이것도 인생을 견디는 101가지 방법 중 하나라고 위안한다. 그리고 맹세한다. 4월엔 꼭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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