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치포인트>를 보았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영국식 악센트보다 더 낯선 건 슬픔의 감정이었다. 내내 흘러나오던 (질리와) 카루소의 아리아처럼 구슬픈 앨런의 영화를 보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곧, 앨런과 그의 영화가 구속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런의 영화엔 자기반영성이란 딱지가 곧잘 붙는다. 극중에 감독 역할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화 속 신경질적인 앨런의 모습을 근거없이 진짜 앨런으로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전 앨런의 영화에서 ‘비극의 시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앨런이 만든 영화는 대부분 잉마르 베리만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우울하고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그 시기의 대표작 <부부일기>를 이야기할 때 베리만의 <결혼의 풍경>이 같이 언급되는 건 우연이 아닌 게다. 다시 자기반영성으로 돌아가, <부부일기>는 감독이 아닌 진짜 앨런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영화다. 1992년이란 시기는,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92년, 앨런은 당시 동거 중이던 미아 패로가 입양한 순이 프레빈과 은밀한 관계를 가지다 패로에게 들켰고, 스타 부부의 이름에 윤리적 심판이 겹쳐 그 해 가장 유명한 스캔들이 탄생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법정 다툼을 벌일 미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부부일기>는 콜 포터가 만든 노래로 시작한다. ‘사랑은 왜 날 웃음거리로 만드는지.’ 앨런도 요즘엔 그 스캔들을 행운이라 부를 정도에 이르렀다지만, 짐작건대 패로와의 관계가 끔찍할 즈음 제작된 <부부일기>에는 앨런의 자기분열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면모(사진)가 다분하다. ‘미친 짓, 헛소리, 예민, 불행, 불안, 분노, 냉소, 비난, 비극, 고통’ 같은 말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건 앨런의 트레이드 마크이니 그렇다 쳐도, 심하게 흔들리고 360도 회전하다 갑작스럽게 줌인되며 심지어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는 앨런의 영화에서 좀체 보기 힘든 상황을 연출한다. 영화의 주내용은 물론 아슬아슬한 부부관계이거니와, 앨런은 극중 20대 초반의 학생과 사랑에 빠진 교수로 분하기도 했다. 그런데 앨런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부부일기>는 ‘순탄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다’라고 외치는 평범한 부부 다이어리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부부일기>가 정녕 뛰어난 작품인 이유는 ‘슬픔에 빠진 코미디언’ 즉 코미디언의 비극적 아이러니가 가장 잘 드러난 영화이기 때문이다. 위기상황에서 스스로를 폭풍의 중심에 위치시킨 앨런은 진정 코미디의 대가다. 그가 좋아한다는 막스 브러더스도 못한 일이었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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