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사람은 부지런하다고, 신은경이 스튜디오를 찾은 건 아침 9시였다. 맨얼굴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 뒤 그녀는 확연히 ‘헤어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이 보이는 펑키스타일의 머리에 음영이 강한 화장을 하고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러 모니터를 켜듯 블라우스 단추 서너개를 간단하게 풀어버렸다. V자로 드러난, 탄탄한 그녀의 살갗에 어색함 따윈 없었다. 사실 누가 ‘형님’에게 응큼한 생각을 품겠는가. 그렇다 해도 어떻게 티를 내겠는가. 조직의 넘버2 보스인 여자조폭 역을 맡아 <조폭마누라>에 출연한 신은경은, 극중 인물 은진의 ‘권위’를 이양받은 듯 그렇게 시종일관 당당하고 씩씩했다.
“시나리오는 지도예요. 배우가 영화를 찍는다는 건 지도를 가지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거죠. 열심히 하는 거요?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중요한 건 누가 얼마나 정확한 지도를 손에 넣느냐 하는 거죠. <조폭마누라>는, 제게 100점 만점의 정확한 지도였어요.” 촬영을 막 끝낸 배우와의 인터뷰마다 너무나 익숙히 들었던 “아쉬움이 남아요” 대신, 신은경은 “완전히 만족스러운 상태”라는 낯선 단어의 조합을, 인터뷰 시작 5분도 안 돼 과감히 발음했다. 훨씬 가식없이 들리는 답변. 바른생활 사나이 동사무소 직원과 결혼한 ‘조폭마누라’라니, 또 조폭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기자에게, 이 자신만만한 배우 신은경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몹시 흥미진진할 것이리라는 예감을 마구 불어넣어주었다. 그게 진짜일까 아닐까보다, 중요한 건 그런 신은경의 매력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역할 중 가장 완벽한 사람이에요. 지금까진 모난 구석이 있는 인물을 많이 했죠. 은진은 그런 거 없으면서도 강해요. 거칠 거라 생각하는데 오히려 여성스러움이 많이 내재돼 있어요. 문제는 조직이 아니라 가족이거든요. 완벽하게 부하 50명을 거느리는 은진은, 일종의 가장이에요.” 신은경은 <조폭마누라>를, 단순히 여자깡패가 나오는 코믹액션이 아닌 ‘가족이야기’라고 이야기했다. 홍콩 무술감독에게서 받은 호된 훈련, 깨진 유리 파편에 다치는 “가벼운 부상”을 넘어, 강하고 거친 것을 넘어, 그녀가 표현하려한 건 부드러움 그리고 ‘진중함’. 그러나 너무 웃겨 웃느라 NG도 많이 냈다는 이 영화는, 모처럼 신은경이 출연하는 코믹물임에 틀림없다. “전 원래 코믹쪽이 전공이에요. <파일럿>에서 푼수끼 있는 스튜어디스를 연기했을 때부터, 사람들이 나 때문에 웃고 행복해하는 게 정말 좋았거든요. 이번에도 그렇게 되겠죠.”
열세살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신은경이 연기를 한 지 이제 16년이다. 그 시기를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그녀가 ‘7년주기 변신론’을 내놓는다. ‘여자는 7년 단위로 한 단계씩 성숙한다’는 그녀의 ‘7년주기 변신론’에 의하면, 신은경은 톰보이 이미지를 고수하다가 지난해 한 단계를 돌파해 부쩍 예뻐졌다는 말을 많이 듣기 시작했고, 다음 7년인 35살쯤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아닌게아니라 <젊은 남자>의 그녀가 아스라한 뒤에 <종합병원>의 그녀가 흰 가운 차림으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나가고 <창>이, <링>이, <좋은 세상 만들기>가 지나가고, 이젠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 뮤직비디오가 홀연히 떠오른다. 이런 식이라면 다음 7년 계단턱에서 그녀가 다시 한번 화장을 멋지게 고치지 못할 게 뭔가. 인터뷰 전날 밤 마침 공중파 TV에서 방영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얘기에 이르자, 그걸 봤다는 그녀가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를 한다. “새롭더라고요!” 정말, 신은경이 자꾸만 새로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