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정사정 볼 것 많다, <사생결단>의 황정민 & 류승범
2006-04-21
글 : 박혜명
글 : 최하나
사진 : 이혜정

영화 <사생결단>에서 황정민이 형사이고 류승범이 마약상이라기에, 역할을 뒤집어봤다. 두 배우 모두 1분의 시간도 어기지 않고 스튜디오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중고 철제책상과 타이프라이터를 준비해놓고 어설프게 써내려간 짧은 쪽대본을 쑥스럽게 내밀었다. 용의자 황씨는 체리주빌레 맛 브라보콘을 훔치지 않았다고 우기고, 황씨를 잡아온 류 형사는 “내가 형사만 안 했으면 전과 20범 되고도 살아남았을 놈이야”라고 윽박지른다는 내용이었다. 막판 반전을 포함해 기자가 준비한 시나리오는, 오직 두 배우 덕분에 너무나 그럴싸한 누아르로 만들어지고야 말았다. 취조가 다 뭐냐는 듯 라면을 후루룩 먹더니 짜증난다고 인상쓰면서 다리나 떨고 앉아 있는 뺀질이 용의자 황씨. 목소리 깔고 바르게 앉아서 “조사하면 다 나와~” 하다가 “저놈 어떻게 잡지” 하는 수십 가지 표정을 짓고 나서 결국 신발을 냅다 벗어버리는 류 형사. 두 배우는 쪽대본의 미완성된 캐릭터를 완성시키고 주어진 상황을 애드리브 주고받기로 발전시켰다. 단독 컷을 찍을 때에도 두 사람은 상대가 있을 가상 위치를 체크하고 나서 ‘앞장면과 시선을 연결’했다. 황정민과 류승범은 누가 뭐래도 배우였다.

스튜디오에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고, 류승범은 제 차에 있는 CD를 가져다줄 것을 누군가에게 부탁했다. 잠시 뒤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ely>가 흐르기 시작했다. 두 배우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춤을 추었다. 외모상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은 형제를 뛰어넘어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이 둘과 함께 무언가를 작업한다는 것은 짜릿한 희열이거나 흐뭇한 즐거움이었다.

사건의 발단 _<사생결단> 캐스팅 스토리

황정민: “도 경장 역을 맡으면 어떻겠냐 제안이 왔어요. 대본을 봤는데 너무 괜찮은 거예요. 상도 역으로는 누굴 생각하냐고 제가 물어봤죠. 아무래도 도 경장하고 함께 가야 하는 캐릭터니까. 류승범이 할 거 같다 그러더라고요. 좋다 싶었어요. 그렇게 두말없이 하게 됐어요.” 류승범: “저한테는 거꾸로 도 경장에 어울릴 만한 배우가 누가 있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시나리오 읽으면서 저는 계속 정민 형이 떠올랐어요. 잔머리로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우직함 같은 걸로 밀어붙이는 캐릭터거든요. 그래서 ‘황정민씨 어떠냐’ 했는데 알고 보니 심재명 대표님(제작사 MK픽처스)과 감독님이 저를 한번 떠본 거였더라고요.” 황정민: “상도와 도 경장의 관계가 참 재밌었어요. 서로 뒤통수 맞지 않을까 항상 경계하면서 관계를 유지하거든요. 그 미묘한 긴장감이 정말 좋았어요.” 류승범: “진실성도 있고 무게감도 있고 영화적으로도 풍부한 것이 맘에 들었어요. 마약이라는 소재도 좋았고, 인물도 매력적이었고.” 황정민: “마약범을 잡는다 안 잡는다는 중요하지 않아요. 막상 잡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인생을 살면서 내가 상대를 이용하고 상처를 주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내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그런 쳇바퀴 도는 느낌이 있는 이야기예요.”

단독범행인가, 공모인가 _현장의 재구성

류승범: “현장에서는 술을 많이 안 마셨어요. 정민이 형만 반주 정도로 만날 마셨죠.” 황정민: “반주 마니아. 반주를 안 하면 잠이 안 오니까. 현장에서 그만큼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류승범: “저도 원래는 잘 먹는데, 이번에는 괜히 먹기 싫었어요.” 황정민: “내가 억지로 먹으라고 해도 안 먹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상도는 마약을 안 해요. 마약상들끼리는 마약상이면서 마약 안 하는 놈을 최고 독종으로 치더라고요.” 류승범: “그렇게까지 계산하고 안 먹은 건 아닌데. (웃음) 맑은 정신으로 있고 싶었어요. 영화 보면 아시겠지만 인물들이 다들 눈빛부터 심장까지 퀭∼해가지고(순간 굉장히 퀭한 표정) 눈에는 핏빛 돌고 얼굴엔 황달 돌고 그래요. 상도는 그 더러운 뒷골목에서도 시크한 놈이거든요. 부산이라는 공간과도 섞이지 못하는 놈. 내가 술을 마시면 그 인물에 대한 느낌이 그렇게 깨끗하게 설 것 같지 않더라고요.” 황정민: “마지막 감천항 시퀀스 촬영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요. 그 감천항으로 오려고 다들 그렇게 고생했으니까.” 류승범: “우리 작업의 클라이맥스였어요. 지금까지 매달려왔던 것들이 여기서 다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상도와 도 경장, 두 사람의 감정이 앞부분과 반복될까봐 걱정했어요.” 황정민: “막상 가니까 그전까지 겪었던 것들이 감정적으로 정확히 서더라고요. 완전히 연기의 끝을 달렸죠. 탁 치면 탁 오고 하면서 주고받으면서. 미치죠. 그 희열은 말로 설명 못해요.” 류승범: “감천항 시퀀스 중에는 우리가 창작한 장면도 많아요. 대사도 시나리오랑 많이 달라졌고. 쪽대본이 나올 정도였어요. 시나리오상에서는 마약범 장철을 때리는 게 도 경장인데 상도가 때리는 걸로 바뀌었어요. 도 경장은 상도를 말리고. 그때까지 끌고 온 감정의 맥락상 그게 맞았어요.” 황정민: “결과적으로 더 좋아졌죠. 훨씬 풍부해졌고.” 류승범: “내가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거. 창작자로서의 뿌듯함. 배우로서의 자부심. 그런 걸 느꼈어요.”

범행수법 _나의 연기원정기

류승범: “저는 연기하는 게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달라요. 오늘 1신을 찍고 내일 2신을 찍는다고 하면, 오늘의 캐릭터 해석과 내일의 캐릭터 해석이 달라지는 거예요. 어떤 부분은 더 풍성하게 만들고 어떤 부분은 더 빼고. 이런 식으로 플러스, 마이너스를 해나가는 거죠. 처음부터 인물을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잖아요. 오늘은 눈을 붙이고 내일은 코를 붙이면서 그 안에 몰입돼 있다가 어느 순간 밖으로 나와보면 인물 하나가 만들어져 있는 거예요.” 황정민: “나는 어떻게 하지? 아∼ 정말 모르겠어요. 다 까먹어버린다니까.”(나는 정말 바본가봐, 하는 울상) 류승범: “형이야말로 캐릭터 구축 심하게 하잖아. 정민 형은 심지어 <와이키키 브라더스> 때 ‘강수의 일기’를 썼어요. 자기가 강수라는 인물의 역사를 상상해서 다 만든 거야. 영화 끝나면 캐릭터를 탁 버린다는 말이 이해가 돼요. 형처럼 집요하게 하면 나라도 그 인물이 징글징글하겠다.” 황정민: “현장에서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피가 부글부글 끓고, 제가 가진 모든 촉감은 그 인물의 것이 돼서 딱 서 있어요. 순간순간 내뱉는 호흡 같은 것들이 전부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들이에요.” 류승범: “저는 어떤 구석에서건 루저가 좋아요.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문학이나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우리가 루저들에게 받는 감동이란 게 있잖아요. 거기에서 위로를 받을 때도 있고. 내가 잘 먹고 잘살고 멋있으면서 누구에게 위로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나 같은 사람도 삽니다, 나도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요, 하는 것이 생산자 입장에서 봐도 판매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싶죠.” 황정민: “덧붙이면 저는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역할이란 게 결국 이야기 안에 있으니까. 저한테는 제가 좋아하는 유의 사람보다 좋아하는 유의 이야기가 먼저인 것 같아요.” 류승범: “사실 저보고 하나만 선택하라면 저는 진짜 죽을 때까지 코미디를 하다가 죽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살 순 없잖아요. 그렇다면 현실에 맞추는 배우가 돼야죠.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해서 배울 수 있는, 내가 나를 깨고 넘어설 수 있는.”

전과기록 _<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5년

황정민: “인터뷰 때마다 얘기가 나오니, 그 영화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류승범: “<와이키키…> 때부터 과다하게 쿵짝댔어요. 어찌나 죽이 잘 맞았던지 임순례 감독님이 미워할 정도였어요. 둘이 만날 설정하고 신도 새로 만들고 하니까.” 황정민: “첫 촬영 전날이었는데, 우리 둘은 다음날 촬영 분량이 없었어요. 그냥 와서 분위기 봐라, 해서 간 거였는데 그런 게 어딨어. (장난기 넘쳐나는 얼굴로) 술 먹고 시끄럽게 굴어서 스탭들 못 자게 하고. 우리 옆방에 촬영감독님, 그 옆방에 조명감독님 두분이 뿔따구가 나셔가지고. 엄청 혼났죠. 개념없다고.” 류승범: “그때는 프로 배우가 아니었죠. (웃음) 그냥 감수성이 앞서는 배우.” 황정민: “제일 처음 술마신 게 언제인지 기억이 정확하질 않은데… 연포해수욕장 아닌가?” 류승범: “그전에도 마셨던 거 같은데. 왜, 그때 술 많이 마시고나서 우리 전부 다 형네 집 앞에 있는 슈퍼 가서 우유 사먹고 그랬잖아.” 황정민: “둘 다 심한 술버릇은 없어요. 술 마시면 둘 다 ‘업’돼요. 그리고 한번 취하면 주접의 끝을 몰라.” 류승범: “질질 짜거나 신파로 빠지는 건 딱 질색이에요.” 황정민: “5년 전에도 속내를 확 드러낼 수 있는 친구였으니 이제는 만나면 바로 본론 시작이죠.” 류승범: “정민 형은 격식이 없어요. <사생결단> 할 때도 저보다 어린애들하고 숙소에서 K1하고 놀고 그랬다니까요. 밖에서는 인간적으로 잘해주고 편한 사람인데 현장에 들어가면 날이 탁 서 있고 나한테 긴장감을 주는 사람이에요. 그게 선배의 도리인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선배가 되고 싶고.” 황정민: “나이 차이 느끼냐고요? 우리 때문에 콘서트도 하잖아요. 칠공팔공이라고.”(황정민은 1970년생, 류승범은 1980년생이다)

황정민

“개인적으로는 좋은 배우였음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고, 후배들이 나를 볼 때, 저 배우는 배우이기 이전에 예술가다, 그런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고(예술가라는 말에 모두 숙연해진다). 강을 건너려는데 돌다리가 있어요.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나는 그걸 딛고 서서 내 앞에 또 하나의 돌다리를 만드는 거예요. 나중에 후배들이 내가 만든 돌다리를 딛어야 할 때 ‘아, 이거 되게 불안할 거 같아’ 이런 생각 안 하고, 아무 생각없이 안심하면서 딛고 뛰어넘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그 후배가 또 하나의 돌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고 만들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강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면 충분해요.”

류승범

“류승범, 정말 좋은 배우였는데, 라는 말보다 아, 걔가 누구지? 내가 걔 작품 보고 정말 감동받았잖아∼. 내가 걔 나온 영화 보고서 지금 이렇게 됐잖아. 내 꿈을 키웠잖아, 이런 이야기 듣고 싶어요. 내 이름 석자는 지워지더라도 가슴에 남는 사람. (옆에서 황정민, “근데 그 정도로 감동받으면 이름도 기억나.” 좌중 폭소. 류승범,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면 저는 정말 영광스럽고 정말 행복하게 배우생활 마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슴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름은 기억 안 나도 감동만은 기억이 나게 하는 사람. (황정민을 설득하려고) 사람이 일단 아무개 이름을 말하면 그 사람의 모든 걸 잘 기억 안 한다고요. 황정민, 하고 말하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해 깊게 생각 안 한단 말야. 이름은 한번 말하면 끝이에요. 하지만 이름이 기억 안 나면 그 사람에 대해 자꾸 되뇌게 되고 추적하게 돼요. 마음속으로 다가간 게 더 강했으니까.”

황정민 의상협찬 리키엘 옴므, 마크 제이콥스, 소다 닐 바렛·스타일리스트 임영순·헤어 이범호(제니하우스)·메이크업 임미현(제니하우스) 류승범 의상협찬 론 커스텀, 디올 옴므, 제너럴 아이디어 by 범석, 본(BON)·스타일리스트 김봉법·헤어 및 메이크업 임철우(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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