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음유 시인 앙겔로풀로스의 회고록, <영원과 하루>
2006-04-20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EBS 4월22일(토) 밤 11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글로 풀어내는 일은 참으로 덧없게 느껴진다. 말이 덧붙여질수록 그의 영화적 세계는 점점 멀어진다.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옳은 태도는 입을 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그저 감상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열한 번째 영화가 궁금한 독자들께서는 이 글이 영화 감상에 하등 도움될 것이 없다는 점을 미리 인지하시기 바란다.

<영원과 하루>는 죽음을 앞둔 그리스의 늙은 시인, 알렉산더의 이야기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병원에서 보내는 대신 19세기의 시인, 솔로모스의 시어들을 찾아 나서는 데 보내기로 한다. 불멸의 시어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그는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고, 알바니아 난민 소년을 만나 시적인 경험을 나누기도 한다. 영원한 진리를 찾아 떠난 여행이지만, 결국 그는 진리란 그가 경험한 시간 속에 내재된 것임을 깨닫는다.

이 영화는 노년에 접어든 음유 시인 앙겔로풀로스의 회고록 혹은 자화상이다. <안개 속의 풍경>의 어린 소년부터 그의 많은 영화들 속에 등장했던 ‘알렉산더’라는 이름의 남자가 이 영화에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된다. 알렉산더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여 생의 상처를 온몸에 새기고 이제 그 생의 끝에서 영원성을 갈망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영원성이 알렉산더의 예술세계 혹은 누군가의 시적세계에 잠재된 것이 아니라, 아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 난민 소년의 입을 통해 나오는 시어, 버스에서 잠을 자는 혁명군 등에게서 빛처럼 퍼져나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앙겔로풀로스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외부의 관념적인 영원성으로 퇴각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시간 속에 더욱 침투하여 불멸의 순간들을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뒤늦은 후회나 회환이 아니라, 영원이란 ‘이미 그곳에’ 늘 존재해왔음을 깨달은 노년의 쓸쓸한 성숙함이다.

그의 다른 영화들처럼, <영원과 하루>에서도 익스트림 롱숏과 딥 포커스,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은 영화에 시간의 무게를 실어준다. 안개가 낀 회색빛 그리스의 풍경, 침묵으로 말하는 여백의 공간 역시 여전하다. 솔로모스의 시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들과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풍경들 속에서 과거와 현실과 미래는 만나고, 젊은 앙겔로풀로스와 노년의 앙겔로풀로스는 조우한다. 그의 영화세계 속에서 역사는 그렇게 교차하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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