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1세기 스파이들의 신세한탄 [1]
2006-04-26
글 : 김수경

냉전은 끝났다. 좌우를 넘나들며 신바람을 내던 스파이들의 넓은 놀이터는 부조리한 기업이나 내부 배신자의 응징 같은 심부름센터 수준으로 오그라들었다. 그들이 <순풍산부인과>의 가족들처럼 한 집에 살면 어떨까. <미션 임파서블>의 클래식한 첩보원 이던 헌트, <본 아이덴티티>의 기억상실증에 걸린 음울한 킬러 제이슨 본, <오스틴 파워>의 야누스 오스틴 파워, <미스터& 미세스 스미스>의 섹시하고 살벌한 스미스 부부가 한지붕 아래 모였다. 007를 ‘냉전의 화석’이라 비웃던 M이 그들을 초대한 호스트다. 총을 내려놓은 스파이들의 신세한탄. 바야흐로 개봉박두!

알프스 산기슭 외롭게 자리잡은 중세풍의 허름한 성. ‘M하우스-Top Secret’이라는 간판이 바람에 덜컹거린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거실 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다. 레이밴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이던 헌트(톰 크루즈). 그 옆에는 우울한 표정으로 코트를 걸친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앉아 있다. 제인 스미스(안젤리나 졸리)는 다트에 칼을 던지며 노는 중이다. 존 스미스(브래드 피트)는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면서 맛이 없다고 투덜거린다. 복도 끝에서 백발을 휘날리며 집주인 M(주디 덴치)이 오스틴 파워(마이크 마이어스)와 함께 등장한다.

한 지붕 여섯 스파이: 그들이 한집에 살게 된 사연

M: 자 다들 주목, 오늘은 새로 입주한 오스틴 파워의 입주 파티니까 다들 맘껏 즐겨. (김수미 버전으로) 옘병, 마시자고.

오스틴: 반가워, 동업자 여러분. (특유의 웃음소리) 어허허허허허허. 특히 도망자 제이슨. (어깨를 툭 친다)

제이슨: (등 돌리며 세계지도를 꺼내들고) 뻐드렁니, 네 방은 2층 왼쪽 제일 구석이야. 내 방이랑 제일 멀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널 보니 두통이 더 심해지는군. 게브랄티 아니 타이레놀이 필요해.

오스틴: 이던 덕분에 우리 세 번째 작전 <오스틴 파워: 골드멤버>는 대박났어. 스필버그 국장에게도 안부 전해주삼.

이던: 자네 때문에 브리트니 요원은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하더군. 오스틴, 영화제작으로 떼돈 벌었다면서 M 하우스에는 왜 왔어?

오스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타임머신 타고 왔다갔다하느라 사채를 썼거든. 타임머신 비용은 영수증 처리를 안 해줘. 자동차에 알록달록하게 색칠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닥터 이블은 미니미로 싸이월드에서 로열티를 받는 바람에 돈방석에 앉았지만. 어허허허허허.

M: 사실 영국 스파이들은 낭비벽이 너무 심해. M16(영국비밀정보국)이 안전가옥으로 쓰던 이곳을 게스트하우스로 내놓은 것도 다 제임스 본드의 명품 과소비 때문이라고. 1대부터 아무리 교체를 해도 모조리 쇼핑 중독자야.

제인: 그 정도는 약과야. 우린 결혼하는 바람에 퇴직금은커녕 회사에서 살던 집도 폭파했어. (존을 가리키며) 저 바보가 내 사무실도 박살냈지.

존: 난 그래도 허벅지에 대검을 던지진 않았어.

제인: 재혼인데 속였잖아!

존: 넌 결혼식에 가짜 부모님 데리고 왔잖아! 어쩐지 TV에서 본 얼굴들이라니.

이던: 괜찮아. 나는 특수분장하고 팀원들도 매번 속여.

M: 옘병, 환영 파티에서 왜 이렇게 싸워. 알프스산에 올라가 총질하면서 결판을 내든가 아님 방 빼기 전에 조용히 해.

21세기형 스파이, 투잡을 꿈꾼다

제이슨: (갑자기 일어나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지금 밖에서 불빛이 다섯 시간에 한번씩 깜박거리고, 늑대 울음소리가 일곱 시간에 한번 간격으로 들렸어.

오스틴: 반짝거리는 건 아랫마을 교회 불빛이야. 그리고 울음소리는 옆집에 사는 리트리버가 밥 달라고 배고파서 우는 거야. 그나저나 다들 다음 작전은 준비하고 있지? 이던은 중국에 갔다면서?

이던: 말도 하지마. 국장만 다섯번, 팀원만 열명을 교체했어. 핀처 국장, 캘라한 국장이 지휘하려다가 지금 에이브람스 국장이 왔지. 요즘은 스파이계도 평생 직장 개념은 없어진 지 오래야.

존: 내가 듣기로는 진주 귀걸이를 한 아리따운 소녀가 합류했는데, 이던이 사이언톨로지를 믿으라고 강요해서 그만뒀다던데.

이던: (얼굴이 벌게져서) 누가 그래? 걔는 FBI의 우디 앨런 국장이 꾀서 텍사스의 <매치포인트> 작전에 차출했단 말이야. 내가 케이티 요원한테 사이언톨로지 믿으라고 하는 거 본 사람 있어? 그러는 너는 부업으로 대니 오션 똘마니로 일한다면서? 오션스 조직은 20명까지 늘린다던데 금방 쫓겨나는 거 아냐?

존: 대니가 그럴 리가 없어. 제이슨, 그렇지?

제이슨: 나도 지원금 한푼 못 받고 유럽 전역을 싸돌아다니느라 출혈이 너무 컸어. 부업이 필요한 건 당연해.

오스틴: 그러니까 나처럼 영화제작을 해. 21세기는 콘텐츠 산업이 지배한다고. 이제까지 경험을 바탕으로 무술감독이나 로케이션 매니저라도 하면 되잖아. 난 스파이계에서 은퇴하면 비욘세 요원한테 부탁해서 매니지먼트 사업도 벌일 생각이야.

제이슨: (핸들을 잡는 시늉을 하며) 나는 운전이라면 자신있어. 그래서 총알택시나 관광버스를 몰아볼까 해.

M: 이러니까 요즘 어린 것들은 안 돼. 3천만달러나 들여서 특수요원으로 키웠더니 운전사를 하겠다고? 돌아가신 로버트 러들럼(<본…> 시리즈의 원작소설가) 원장에게 미안하지도 않니?

제이슨: 백분의 일이라도 차라리 현금으로 줬으면 내 인생도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잖아. 스위스 비밀은행에서 꼬불친 돈도 <본 아이덴티티>에서 복수하느라 다 써버렸어. 세 번째 작전 <본 얼터메이텀>만 끝나면 자유롭게 드라이브나 하면서 살 거야.

이던: 옛날이랑 많이 다르지. 내 친구 루서(빙 레임스)도 날리던 해커였지만, 요즘은 애니메이션에서 동물 울음 사운드나 만지작거리며 산다고. 세 번째 불가능한 임무 때문에 중국에 갔을 때도 틈날 때마다 닭 울음 소리 녹음하느라 정신이 없더라고.

제인: 부부 스파이는 더 힘들어. 일이 뚝 끊겨. 사내 커플처럼 업계에서 한명은 은퇴하라는 거지. 선배 커플 <트루 라이즈>의 태스커 부부만 해도 10년 넘게 작전에 못 참여했잖아. 딸 대너의 대학입학금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탱고바를 차렸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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