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결단〉은 배우 류승범(26)의 성인 신고식처럼 보이는 영화다. 교복 연기는 한번도 한 적이 없고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서는 어엿한 경찰이었지만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에는 성장의 통증을 앓는 소년성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허망한 야심일지언정 스스로 완결한 세계 안에서 살며 바깥세계와 거래하고 때로 협잡하며 싸우는 〈사생결단〉의 상도는 어른이다. 20일 삼청동에서 만난 류승범은 “과연 배우라는 게 직업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제 직업인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이 직업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재미와 모험의 세계에서 자유자재로 ‘놀던’ 소년이 이제 치열한 생존경쟁과 승부의 세계로 들어선 것, 즉 성인배우 류승범이 된 것이다.
본능은 계산을 동반한다
지금까지 류승범의 연기평에는 정규적인 연기수업을 받지 않았다는 경력에 “본능적인 순발력” “놀라운 자연스러움” 같은 찬사가 덧붙여지곤 했다. 그저 칭찬이라고 여겨졌던 이 말들이 이제 무섭다고 그는 고백한다. “초기에는 정말 그냥 본능적으로 연기한다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자기 확신이 없으면 자연스러움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전이 돼 있어야 카메라 앞에서도 놀 수 있거든요.”
〈사생결단〉은 그가 해온 연기 가운데 가장 많은 계산을 요구한 영화다. 어떤 영화보다 감독과 길게 논의를 했고, 옷차림이 많은 걸 보여주는 상도의 스타일은 그의 연구에서 나왔다. “시나리오에는 롤렉스 시계에, 금목걸이 하고 돈 자랑을 주체 못하는 스타일로 그려졌어요. 근데 나 건달이다 그런 식으로 직설적인 설정은 너무 뻔하잖아요. 그래서 감독님께 이야기를 해서 상도 말마따나 ‘벤처사업가’ 스타일을 만든 거죠.”
편안함은 이질감과 공명한다
편안함, 자연스러움이 류승범 연기의 특장이라면 그가 연기해온 주요 캐릭터들은 자기가 속한 세계와 행복하게 화해하지 못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뽕쟁이’들을 상대하면서 “기쁨 주고 돈 받는” 사업가라고 자기암시 하며 스스로는 뽕을 하지 않는 상도도 마찬가지다. “본인은 정신 바짝 차리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신의 계산보다 더 큰 힘에 무너지는 비극적인 느낌이 좋았어요.” 그가 종종 꺼내는 “루저가 좋다”라는 말에는 이곳이 아닌 곳을 꿈꾸지만 저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오갈 데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게 느껴진다. 자신도 이용해 먹던 여자가 약으로 망가진 모습을 보며 상도의 눈빛에서 복잡한 심경이 툭 떨궈져 나올 때, 자신의 인생을 갈아먹은 삼촌을 향해 막다른 골목에서 증오도 걱정도 아닌 넋두리를 할 때 류승범식 연기의 편안함과 캐릭터의 이질감은 절묘하게 공명한다.
배우가 옷 잘 입으면 안돼?
네이버 검색창에 ‘류승범’이라는 이름을 치면 류승범스타일, 류승범안경 등의 인기 검색어들이 밑에 뜬다. 들어가 보면 류승범식 옷입기, 류승범 스타일 안경 코디법 등이 줄줄이 쓰여 있다. 류승범은 단순하게 ‘연기파’와 ‘외모파’로 나뉘는 연기자들 사이에 있다. 혹은 둘을 다 아우른다. “예쁜 거 좋아하는 게 제 본능이라면 멋 부리는 건 계산이라는 점에서는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죠.” 옷 잘 입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좋지만 연기와 스타일을 나눠 어느 것이 우월하다는 판단은 못마땅하다고 한다. “외모에 신경 안 쓰고 연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있고 또 저처럼 멋내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거고, 정답은 없다고 생각해요. 배우들 각자의 연기방식이 다르듯 사는 방법도 다른 거죠. 배우라는 직업인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충실하게 가고 싶어요.”
<사생결단>은 이런 영화
‘구악 경찰’과 마약상 비정한 공생
다시 부산이다. 항구 한구석에 늘어선 컨테이너들, 시커먼 바닷물 빛이 어울려 빚어내는 풍경의 차갑고 육중함. 드센 사투리와 몇몇 우스개를 통해 굳어진 ‘과묵한 경상도 사나이’의 이미지. 〈친구〉의 성공이 입증하듯 부산은 범죄영화를 찍기 좋은 배경을 제공한다.〈사생결단〉은 여기에 마약 수사 경찰과 마약 중간상 사이의 독특한 인간관계를 하나 더 보태 냉정한 범죄영화의 공간을 구축한다. 영화 속에서 경찰은 마약상의 범죄의 일부 또는 전부를 덜어준다는 조건 아래 그를 첩자로 활용한다. 서로를 철저히 불신하고 상대방이 불신하는 걸 알면서 서로 엮이는 이들의 관계는 시작부터 비열하고 비정하다.
경찰인 도진경 경장(황정민)은 마약 제조·운반 총책인 장철(이도경)을 검거하다가 선배 경찰이 죽고, 장철은 도망갔다. 경찰직을 이용해 돈 뜯기를 주저하지 않는 일종의 ‘구악 경찰’이지만, 승진에 대한 욕심으로 마약 조직을 잡기 위해 중간상 상도(류승범)와 앞서 말한 이율배반적인 공생 관계를 맺는다. 도 경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상도는, 부산지역의 기존 마약 조직이 해체되고 새로운 보스가 등장하자 이 새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 경장을 활용한다.
범죄영화의 배경이 되기 좋은 부산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화면은 역동성이 넘치며, 대사도 맛깔스럽다. 한물간 ‘뽕쟁이’인 상도 삼촌 역의 김희라, 마약 중독에서 막 깨어나려고 애쓰는 지영 역의 추자현 등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에 찰기를 보탠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마약 상인들 사이에, 그들과 경찰 사이에, 그 윗선인 검찰까지 이해관계가 얽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개연성 있는 디테일들이다. 최호 감독이 2년 동안 부산에서 취재해 구성했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영화 자체의 목적이 사회 구조의 사실적 해부나 비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누아르’라는 장르 영화를 표방하는 이 영화는 마약계 거물 장철의 재등장과 함께 절정을 준비한다. 도 경장은 죽은 선배에 대한 죄책감과 복수심을 벼르면서 장철 검거에 혈안이 되고, 상도 역시 ‘사생결단’의 각오로 앞으로 갈 방향을 정해야 할 상황을 맡는다. 여기서 큰 악한을 맞이해 도 경장과 상도가 손잡는 ‘짝패영화’(버디 무비)적인 구조가 병행되는데, 플롯의 혼선이 생긴다. 전선을 도 경장과 상도 사이에 두느냐, 아니면 둘과 장철 사이에 두느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영화는 누아르의 ‘비정함’을 견지하려 하지만, 그 비정함엔 과잉의 느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