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해변의 여인> 제작하는 영화사 봄 오정완 대표
2006-05-01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장화, 홍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쓰리 몬스터>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 영화사 봄(대표 오정완)이 최근 3년 동안 제작한 작품 목록이다. 줄곧 화제작을 뿌리며 충무로의 고급 부티크로 불리던 봄에 ‘의아스런’ 변화들이 잇따르고 있다. 순수 작가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봄에서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을 만든다거나 송일곤 감독이 로맨스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첫 번째다. 영화사 봄과 감독 둘 중에 어느 쪽이 심경 변화를 일으켰거나 애초부터 우리가 몰랐던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이 영화 한다더라, 아니다 엎어졌다’ 등 소문만 무성하던 고현정의 첫 번째 영화가 <해변의 여인>이란 소식이 그 뒤를 이었다. 그 사이 ‘충무로 법률고문’이던 조광희 변호사가 영화사 봄의 (사실상의) 부사장으로 가기로 했고, 이유진 대표 프로듀서가 독립해 ‘영화사 집’을 차렸으며, 안수현 프로듀서는 프리랜서로 나섰다. 내부적으로 변화무쌍한데, 우회상장이라는 충무로 밖의 폭풍에는 또 초연하다. 외부의 무성한 소문 때문인지 인터뷰를 극도로 꺼리는 제작자, 오정완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노선변화는 아니지만 영화사 봄의 2기가 시작됐다고 한다.

-홍상수 감독과 오랜 친구라고 해도 일로 만났을 때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게 있을 텐데.
=농담처럼 늘 ‘돈 버는 영화 아니면 안 한다’고 하는데 경계선에 있는 영화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 지금처럼 버려지는 느낌은 곤란해 보였다.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에 힘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칸이나 베니스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홍 감독 영화 한다고 갑자기 근사한 영화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영화사 봄의 2기 첫 영화가 홍상수라는 점이 고민이 됐던 건 사실이다. 내부적으로 변화 중이어서 한두 작품 뒤라면 좀더 쉽게 결정했을 거다. 나로선 배워보자는 입장이다. 이런 영화가 가진 힘이 뭔지, 다른 산업적 활로가 뭔지 알고 싶다. 물론 상업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은 있지만 한국영화를 위해 홍상수 감독은 살아남아야 하고, 예술영화 혹은 독립영화라 불리는 영화가 살아남을 시장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감독은 나를 통해 단순 개봉이 아니라 사후 관리를 기대하는 것 같다. 영화는 관객에게 잘 보여줘야 하고 그 이후 관리도 잘되어야 한다.

-고현정의 영화 데뷔를 이끌어낸 배경은.
=고현정을 염두에 두고 <해변의 여인>을 한 건 아니다. 제작을 결정한 뒤 어떻게 하면 잘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정보를 다 뒤져보니까 스타가, 배우의 힘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고현정이 천사처럼 탁 나타날 줄은 몰랐지. 타이밍과 운이 좋았다. 많은 감독들의 제안을 받았고, 어떤 이유로 영화 출연이 무산됐고, 계획했던 드라마가 차질을 빚었다. 언감생심, 밑져야 본전으로 제안했다가 덜컥 됐다. 물론 그 이전부터 개인적 만남이 있어왔고, 봄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고현정이 홍상수의 영화에서 해내길 바라는 것은.
=영화 내적인 건 전적으로 감독에게 맡기고 있다. 홍상수 감독이 생각보다 고현정의 옛 작품들을 많이 봐왔고 관심이 많아 깜짝 놀랐다. 감독과 그녀가 만난 첫 자리에서, 홍 감독이 ‘내 영화에 출연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영화는 팬으로서 많이 봤지만 직접 영화를 찍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말한 적이 있다. 공식 제안은 그 이후에 이뤄졌다. ‘홍 감독님 영화 하는 게 좀 무섭기는 한데 사람들이 나한테 이 나이 되도록 청순하게 울고 그러는 거 좋아하겠냐’고 하더라.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연기 잘하는 여배우는 참 똘똘하다. 감정 다발이 많아서 그렇지.

-특별한 조건을 내민 건 없나.
=‘(봄에서) 좋은 영화 하면 또 써줄 거죠?’라고 묻던데 싫어할 수가 없다. 바깥에서 공주인 줄 아는데 만나보니 겉만 공주더라. 얼마나 귀염둥이인지, 또 며느리처럼 잔일 직접 손걷고 나서길 잘해서 무수리 공주라고 부르고 있다.

-제작규모는.
=밝힐 수 없다. 저예산은 아니다. 배우와 스탭이 희생한 금액을 합치면 30억원짜리다. 관객 수로 따지면, 100만명 들어야 손익 맞출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이 두 달 안에 촬영을 마치는 건 처음 아닌가
=봄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했고, 배우들 스케줄이 빠듯했다. 다행히 서해안의 한 장소에서 대부분의 촬영이 이뤄져 가능했다.

-네명의 배우가 맡은 캐릭터를 보면 <생활의 발견>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합친 듯한 인상이다
=갑자기 확 다른 영화가 될 리 있나. 난 다만 관객이 이 영화를 볼 준비를 돕는 거지. 제대로 볼 수 있게. 더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해보겠다고 한 감독의 말을 기대하고 있다.

-제작발표회에서 고현정이 한 말을 보면 노출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
=홍 감독의 어떤 작품은 7번을 봤던데 그걸 모르겠나. 물론 본인이 러브신을 두려워하는데 감독과 현장에서 풀어갈 문제다. 감독이 ‘정말 보석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보석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해변의 여인>에 대한 투자자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일단 봄이 직접 하고 있다. 제작발표회까지 너무 바빠서 여력이 없었는데 몇 군데서 제안이 들어왔고 곧 결정할 생각이다.

-<너는 내 운명>을 끝으로 CJ와 ‘퍼스트 룩’ 관계가 끝났다. 지금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다. CJ와는 좋았던 관계니까 앞으로도 계속 갈 수 있을 텐데 그 첫 번째가 홍상수니까 좀…. 어쨌든 투자뿐 아니라 배급까지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영화사 봄의 변화가 크다. 2기의 시작이 홍상수이고 송일곤 감독의 작품도 곧 들어갈 예정이다. 송 감독도 작가성이 짙은 감독이어서 봄의 이런 선택이 좀 의아스럽다
=홍상수 감독을 빼면 1∼2년 전부터 준비해온 기획들이다. 좋은 감독과 좋은 영화 만들어 많은 관객과 만난다는 건 오랜 노선이고 변함이 없다. 홍 감독 작품이 갑자기 들어왔고 시나리오도 없으니까 빨리 진행됐을 뿐이다.

-그래도 송일곤 감독은 흥행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아니다. 흥행이나 상업이란 단어를 쓸 때 신중해야 한다. 모든 창작자들은 좀더 많은 관객과 만나고 싶어한다. 다만 그 방식이 다를 뿐인데, 나는 그걸 훈련받은 사람이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다. <너는 내 운명>에 대해 누가 상업적이라고 생각했나? 홍상수 영화는 영화 내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거지만, 송일곤 영화는 간섭하기로 하고 들어가는 거다. 홍상수는 특별 케이스다. 네거티브든 뭐든 어떤 경험치의 수확을 기대한다.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을 좋아하는데 송 감독도 그 솜씨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관객에게 접근하는 코드가 다를 뿐이다. 나는 영화를 잘 만들었다면 실패는 개의치 않는다. 자만심이 아니라 길게 보면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무엇을 보겠는가. 이전의 (흥행) 기록을 보고 할 수는 없다. 관객과 만나는 점을 서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나랑 얘기가 안 되면 안 된다. 감독과 프로듀서는 마치 연애하는 듯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정사>와 <스캔들…>을 봄에서 만든 이재용 감독, 역시 여기서 <반칙왕>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을 만든 김지운 감독이 봄 밖에서 영화를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노선 변화는 아니다. 홍상수 감독은 특별 케이스다. 여전히 시나리오는 내가 오케이해야 촬영에 들어간다. 한국영화 역사에 남을 분들에 대해 존경을 표할 필요가 있다. 강제규, 박찬욱, 홍상수 같은 경우다. 우리가 스타를 아껴야 하고 갈고닦아서 계속 스타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고, 그 때문에 욕도 먹지만 배우만 스타가 아니다. 예컨대, 박찬욱 감독이 지닌 효과는 엄청난 건데 그걸 깎아내리지 말자는 거다. 근데 강제규나 박찬욱은 내가 필요없고, 이재용, 김지운도 마찬가지다. 내가 비즈니스적으로 안정된 노선을 택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성격상 모험을 좋아하고 그렇게 해왔다. 돌파하는 재미가 있다. 앞으로도 그렇다.

- 그 밖의 라인업은.
=신인감독 김정환의 로맨틱코미디 <사랑밖에 난 몰라>를 준비 중이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원작이다. 처음에 판권을 알아보니 할리우드에 팔렸더라. 영화화가 안 되고 있는 상태여서 1년을 기다렸다가 올해 초 판권을 확보했다. 감독과 계약이 이뤄진 건 여기까지다. 그리고 2008년이 <정사> 10주년이어서 이재용 감독과 함께 기획에 들어갔다. 이재용 감독이 직접 연출하진 않을 것 같은데 <정사>처럼 숨겨진 욕망, 억압된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이다. 충무로의 어떤 감독도 만나서 물어보면, 영화를 준비 중이거나 촬영 중이거나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떤 감독도 어떤 영화사의 감독이라고 볼 수 없다.

-<쓰리> 시리즈도 그렇고 해외쪽에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왔는데.
=휴지기다. 지난해까지 힘들었고, 무엇보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 천천히 일하고 싶다. 죽어서 루이 뷔통을 관에 붙여놓으면 뭐하냐는 농담이 있지 않나. 아프니까 많은 생각을 정리하게 되더라. 맞닥뜨린 걸 성공시키기 위해 열심히는 하는데 몇년 전부터 아주 즐겁게 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앓아누워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영화를 좋아하고 지금까지의 성공이 고마운데 10년 뒤에도 즐겁게 영화하는 모습을 갖고 싶더라. 그러려면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조광희 변호사가 오는 것이기도 하고.

-충무로의 법률고문이나 다름없던 조광희 변호사가 큰 결심을 했다. 강금실 선거 캠프의 대변인이 끝나는 대로 영화사 봄에서 제작관리 본부장을 맡는다고.
=2003년인가 조광희 변호사가 다른 영화사에선 법률고문으로 있었는데 봄에선 경영고문을 했다. 일은 똑같아도 개념을 만들어가는 차원에서 그렇게 꼬셨다. 내가 경영쪽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 잘 모르는 분야이고 무섭기도 해서 늘 누군가가 도와줬으면 한다. 조 변호사의 영화 애정이 각별해서 영화에 대해 실무적인 일을 더 해보면 어떻겠냐고 꼬셔서 일주일에 두어번 오후에 와서 일했다. 그런데 그게 효율적이지 않고 서로 깊숙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 털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타이밍이 됐다. 사실 영화계가 나눠야 할 사람인데 독점하게 됐다.

-작품 결정에도 관여하나.
=궁극적으로 CEO를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리 식구라면 누구나 권한을 갖는다. 다만 내가 최종 결정할 뿐이다.

-프로듀서로 큰 역할을 해온 이유진 이사가 영화사 집을 차려 박진표 감독과 창립작품을 만들고, 안수현 프로듀서는 프리랜서로 나섰다
=어쩔 수 없다. 밉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다. 나는 같이 하고 싶으나 영화라는 게 어느 정도 되면 자기 힘으로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요즘처럼 돈의 비즈니스가 판세를 좌지우지하는 경우에는 안 그러면 더 이상하다. 자고 일어나면 내 조수가 감독 되고 사장 되고, 누구는 몇 백억을 벌었더라 하면 20년 된 내 영화인생 자체가 회의되기도 하는데. (웃음)

-MK픽처스의 심재명 대표를 위시해 동급 강자들 중에 유일하게 상장하지 않았다.
=돈과 관련해 무지하기도 하고 보기보다 성격이 단순하다. 모르는 것에 섣불리 달려들고 싶지 않다. 상장은 잘 모르겠고,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규모로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갑자기 커다란 야심을 품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함께 우회상장하자는 유의 제안이 숱하게 들어왔을 것 같은데.
=왔는데 모르겠더라. 여러 명분이 있고 그게 근사하긴 한데 맘에 와닿지 않았다. 봄이 그나마 높은 타율을 유지하는 건 일종의 맞춤 서비스, 오트쿠튀르(고급 주문복을 위한 의상 제작)를 하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대량생산을 하려면 그 간극을 내가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누가 돈 준다고 갑자기 바꿀 수는 없다.

-이 사안과 관련해 조광희 변호사와 협의한 건 없나.
=슈퍼마켓 체인들이 막 생겨나고 있어 구멍가게로 도태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있다. 세븐 일레븐에 대항하려면 어찌해야 할지 감이 와야 움직일 수 있다. 일단 소극적 대안은 하던 방식으로 찬찬히 만들면서 지금의 타율을 유지하는 것이다. 좀더 다각도로 내부를 들여다보고 준비하는 건 조 변호사 오고 나서 할 일이다. 내가 바라보지 못하는 걸 그가 볼 수 있을 테니. 그가 나보고 그냥 영화나 잘 만드는 장인으로 남으라고 할 수도 있다. (웃음)

-금융시장과 맞물려 굴러가는 한국 영화산업의 경향에 대해 부정적인 것 같다.
=양적 발전이 질적 발전으로 전환되는 초기 단계이고 무기가 될 수 있으니 긍정적인 면은 있을 거다. 그렇지만 엔터테인먼트에서 양질 전환이 가능한지 모르겠고 최근 움직임이 의심스럽게 한다. 엔터테인먼트는 결국 사람이, 개개인이 중요하게 기능한다. <쉬리>나 <올드보이> 한편이 여건을 확 바꿔놓듯이. 사람과 돈 다 필요하지만 난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홍콩이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지 않나. 난 이성보다 감성으로 움직이고 비즈니스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홍상수 영화를 하는 이유도 실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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