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밤>은 신체 변형과 질병과 정신 분열의 밤이라 불러도 좋을 법하다. 이 섹션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은 크로넨버그의 습작인 <스테레오>(1969), <미래의 범죄>(1970)와 초기의 걸작인 <브루드>(1979) <스캐너스>(1981), 모두 4편의 기괴한 모험들이다. 사실 지금의 크로넨버그는 초기와는 전혀 다른 경지에 올라있는 작가다. 88년작 <데드 링거>로부터 <크래시>(1996)를 거쳐 최근의 걸작 <폭력의 역사>(2005)에 이르기까지, 그는 섹슈얼리티와 신체에 대한 불안감을 장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서 발전해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후기작들로부터 크로넨버그에 매료된 관객들에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밤>은 꽤나 낯선 경험일 수 도 있다.
그의 데뷔작 <스테레오>와 <미래의 범죄>는 언더그라운드 학생영화다. <스테레오>는 캐나다의 성 연구소에서 텔레파시 능력을 갖게 되는 수술을 받은 일곱명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 사이비 과학에 대한 냉혹한 풍자라고 할 수도 있을 이 작품은 사실 ‘이야기’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곤란할 정도로 불친절한 실험영화에 가깝다. <스테레오>의 쌍생아인 <미래의 범죄>는 여성들이 유해 화장품으로 얻은 병때문에 죽어없어진 미래를 배경으로, 화장품의 창조자를 찾아헤메는 제자의 카프카적인 모험을 그린다. 기계적인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두 (일종의)무성영화들을 숨겨진 컬트영화로 평가하는 것도 섣부른 예찬이 될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두 작품은 디스토피아 SF소설 작가를 꿈꾸던 생화학과 대학생이 돈없이 만들어낸 습작에 가깝다. 다만 각각의 작품이 차후 크로넨버그가 즐겨 다루게 될 두가지 주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스테레오>가 정신의 변형에 의한 진화를 그리는 영화들(<스캐너스> <초인지대>)의 시작이라면, <미래의 범죄>는 신체적 변형을 통해 진화를 다루는 영화들(<라비드> <비디오드롬> <플라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크로넨버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브루드>와 <스캐너스>는 아마도 팬들에게는 익숙한 작품일 것이다. 바로 이 영화들로부터 신체의 변형과 정신적 전이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변주곡이 본격적인 음계조율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캐나다 시절의 초기 걸작인 <브루드>는 그야말로 악몽같은 영화다. 혁신적인 정신치료의 대가인 래글런 박사(올리버 리드가 무시무시하게 연기한다)는 카베사의 아내 노라를 격리 치료중이다. 카베사는 아내 노라가 딸을 학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라의 부모가 짐승처럼 생긴 아이들에게 살해당하고, 노라는 점점 이상한 진화 과정을 겪는다. 당시 크로넨버그는 고통스러운 이혼을 겪은 직후였는데, 유아살해와 신체변형의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그의 혼란스러운 심리상태가 극도로 파괴적인 창조력으로 재생한 듯 한 인상을 준다. 국내 TV에서도 방영된 <스캐너스>는 크로넨버그를 언더그라운드 호러작가에서 제도권으로 탈출시킨 크로넨버그의 상업적 성공작중 하나다. 스캐너는 텔레파시를 나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보안 업체들은 이들의 능력을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의약기업의 흉측한 음모 사이로 스캐너들의 사회를 꿈꾸는 스캐너와 그를 막으려는 스캐너의 대결이 벌어진다. 비교적 관습적인 구조로 흘러가는 이 작품은 80년대 초반 서구사회를 휩쓸던 ‘사이버 펑크’담론에 속해 있으며, 특히 인식의 힘을 이용해서 전화선을 통과해 컴퓨터에 침투하는 설정은 <뉴로맨서>같은 SF 소설들을 연상시킨다.
크로넨버그와 함께 하는 불면의 밤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스테레오>와 <미래의 범죄>는 몽환적인 최면의 밤에 가깝고 <브루드>와 <스캐너스>는 무시무시한 기면의 밤에 가깝다. 75년작인 <파편들>과 77년작인 <열외인간>이 함께 상영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이미 크로넨버그의 장기(長技와 臟器)가 모두 드러난 지금, 그의 과거를 거슬러오르는 불면의 여행이란 꽤나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