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80년대 극심한 침체에 빠진 일본영화의 혈맥을 지킨 것은 비주류영화들이었다. 70년대 자주영화 운동을 통해 나가사키 슌이치, 오오모리 카즈키, 야마모토 마사시, 데즈카 마코토 등이 등장했다. 당시 시작된 일본의 피아 필름 페스티벌은, 8밀리 영화광들의 근거지였다. 그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8밀리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었고, 영화제에서 입상하여 자시의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속속 감독데뷔를 했다. 그러나 일본영화계의 침체 덕분에, 그들이 택한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구로사와 기요시나 제제 다카히사처럼 로망 포르노나 핑크 영화로 데뷔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힘겹게 제작비를 모아, 진짜 자주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나가사키 슌이치처럼.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하나는 예술영화를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싸구려 장르영화에 투신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니카츠의 에로영화들을 뜻하는 로망 포르노는 이미 가치를 인정받고, 재평가와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수오 마사유키나 모리타 요시미츠처럼 로망 포르노로 출발하여 주류영화계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원만하게 성공한 경우도 많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더 이상 핑크 영화를 만들지는 않지만, 공포와 스릴러 등 장르영화 안에서 탁월한 걸작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V시네마가 배출한 최고의 감독 미이케 다카시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싸구려 장르영화가 차지한 역할이 대단하다. 영화산업이 극단적인 침체에 빠진 왜곡된 상황 때문이긴 하지만, 그 열악함이 오히려 창조적인 활동을 부추겼을 가능성 또한 높다. 반면 자주영화를 지향하는 감독들의 영화도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나가사키 슌이치도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고, 해외 영하제의 단골 초대손님인 아오야마 신지와 스와 노부히로도 신작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많은 관객이 보지는 않지만, 열광적인 팬들이 꾸준히 찾아주는 작은 영화. 그런 영화들이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고, 최근 일본 영화의 부흥을 이끈 원동력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츠카모토 신야, 나가사키 슌이치, 제제 다카히사, 스와 노부히로의 영화에서, 작은 영화들의 매력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그 중 나가사키 슌이치와 제제 다카히사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1956년생의 나가사키 슌이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8밀리 영화를 찍었고, 78년 첫 16밀리 장편 <유키가 록을 버린 여름>을 만들었다. 88년작인 <록이여, 조용히 흘러라>로 주목을 받은 나가사키 슌이치의 영화는 ‘생의 실감’을 느끼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라는 닫힌 허구의 시간 안에서, 확실하게 리얼리티의 순간을 잡아낸다는 것이다. 록밴드가 자주 등장하는 나가사키 슌이치의 영화에는 축제의 공간이 많이 등장한다. <유키가 록을 버린 여름>에서는 아무리 암울한 순간이라도 일종의 유희로 그려지지만, 이후의 작품에서는 유희의 계절에서 나와 삶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더욱 강조된다. <록이여, 조용히 흘러라>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록콘서트를 진행하려는 고교생과 친구들의 이야기다. 나가사키 슌이치는 그 순간을,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친다. 현재와 비교를 한다던가, 어떤 평가를 내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 삶의 어떤 순간만을 충일하게 잡아낸다. 그것을 혹자는 ‘생의 실감을 영화 속에서 태워버리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유혹자> <너스콜> 밤의 스트레인저> <최기의 드라이브>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면서도 나가사키 슌이치는 오로지 일상에서 건져 올리는 삶의 순간을 찾아가고 있다. <어둠 속의 심장박동>은 82년에 만들었던 8밀리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나가사키의 영화세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1960년생인 제제 다카히사 역시 나가사키 슌이치처럼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데뷔작은 나가사키보다 한참 늦은 89년의 핑크영화 <과외수업.폭행>이다. 제제 다카히사는 저속하다고 천시받는 핑크영화를 만들면서, 주류영화가 다루기 어려워하는 주제인 걸프전, 자위대, 재일한국인, 공업지대 등을 치열하게 다루었다. 주류영화가 흥미위주로 다루었던 여고생의 자살이나 절도, 원조교제 등도 제제 다카히사의 영화 속에서는 과격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기성 체제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육체의 노골적인 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제제 다카히사의 영화지만 묘하게도 그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은 지극한 순수함이다. 순수하기 때문에, 그 모순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제제 다카히사는 이 세계를 관조하지 않고, 그 안에 직접 들어가 요동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제제 다카히사는 사토 히사야스, 사토우 토시키, 사노 카즈히로와 함께 핑크영화의 4천왕으로 불리며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회고전을 갖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97년 <고쿠리>로 첫 일반영화를 만든 제제 다카히사는 액션과 스릴러인 <러쉬>와 <차가운 함정>과 애절한 사랑이 그려지는 범죄영화 <히스테릭>, 인간이 된 개와 주인이었던 여인의 사랑을 그린 판타지 <독스타> 등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번에 상영되는 <미세스> 또한 그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맛보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