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 <면로>를 비롯해서 국내에서 개봉한 <내 곁에 있어줘>까지, 에릭 쿠의 영화는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사는 작은 나라 싱가포르의 불안과 우울을 포착해왔다. ‘디지털 삼인삼색2006: 여인들’에서 그가 연출한 <휴일없는 삶>은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15만명의 외국인 가정부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고발한다. <내 곁에 있어줘>의 눈먼 귀머거리 테레사 챙의 극진한 일상을 담담하게 바라본 그의 카메라가, 이번에는 소박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하는 여인의 생생한 표정을 포착한다. 그 화법은 전에 없이 직설적이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를 향한 근심은 변함없이 신랄하다.
-실제 기사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들었다. 신문에 난 여타의 사회문제 중 하필이면 그 문제를 소재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단편이다보니 짧은 시간 안에 설명할 수 있는 소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통해 점점 물질주의에 경도되는 싱가포르인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티가 옮겨다니는 세 가정은 싱가포르의 다양한 계급과 민족을 보여준다. 그들의 말투나 집안 모습을 통해 싱가포르인들은 그런 배경을 감지할 수 있다. 시티가 마지막에 도착하는 집은 가장 가난한 집이지만 그곳에서 그는 비로소 인간으로 대접받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례들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들인가.
=가정부와 관계자를 인터뷰를 통해 알아낸 것들이다. 실제로는 가정부의 젖꼭지를 가위로 자른다든가, 다리미로 어깨를 지지는 것처럼 훨씬 가혹한 사례가 많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가정부를 인간이 아닌 아닌 일하는 기계로 취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시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인물은 목소리를 통해서만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관객들이 시티를 향한 그 목소리들이 자신의 것처럼 느끼기를 바랬다. 이 영화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싱가포르의 문제를 알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싱가포르 안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휴일없는 삶>을 TV에서 방영하는 것을 추진 중이다.
-당신은 여태까지 항상 비전문 배우들과 작업해왔다. 시티를 연기한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실제 인도네시아에서 전통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는 이 영화를 찍고 나서는, 자기는 절대로 가정부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하더라.(웃음) 영화 속에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모두 내 친구들이다. 그들은 촬영하는 동안 실제로 카메라 뒤에서 연기를 해줬다. 주인공의 생생한 반응을 담기 위해서는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깨닫게 된 디지털 매체의 장점이 있다면.
=<휴일없는 삶>은 나의 두번째 HD 영화다. 파나소닉에서 나온 소형 카메라인데 최신형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직전에 HD로 찍은 <내곁에 있어줘>는 필름 카메라의 렌즈를 장착할 수 있는 기종의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했다. 필름의 느낌을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몸집이 컸다. 이 영화에서 사용한 카메라는 필름 느낌을 흉내낼 수는 없지만 이 영화에선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디지털의 장점은 모든 것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고, 즉흥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비전문배우와 함께 작업할 때는 그것이 더욱 편리하게 느껴진다. 더이상은 필름으로 영화를 찍고 싶지 않다.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돈 걱정을 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당신의 영화가 싱가포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싱가포르는 인구 4백만의 작은 나라고, 일년에 만들어지는 싱가포르 영화의 수는 평균 4편 정도다. 나는 싱가포르 영화가 맞이하는 새로운 전성기를 개척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중들도 내 영화를 비교적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내곁에 있어줘>는 무성영화 같은 이상한 형식 때문에 낯설어하기는 했지만.
-차기작은 어떤 것인가. <활>에 나오는 한여름과 함께 찍는다는 뉴스를 봤다.
=한여름과는 아직 구체적인 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싱가포르에 사는 인디언에 대한 영화를 만들 것이다. <휴일없는 삶>에서 시티가 임종을 지키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연기한 사람이 주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