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공동의 노래, 공동의 언어, <린다 린다 린다>
2006-05-03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무기력한 소녀들이 찾아낸 가냘픈 한·일 트랜스내셔널 <린다 린다 린다>

4월18일 밤, 독도 해역을 탐사할 일본 측량선이 도쿄를 출발했다는 속보가 굵은 글씨로 모든 인터넷 뉴스의 첫머리에 올랐다. 측량과 탐사라는 담담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의 한 과정이며, 어쩌면 무력 대립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조용한 외교’를 중단해야 할 시점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소식도 함께 떴다. 그 소식을 들으며 한국 배우 배두나가 주연을 맡고 야마시타 노부히로가 연출한 일본영화 <린다 린다 린다>에 대해 쓰고 있다. 편치 않은 일이다.

영토 다툼은 인류사에서 멈춘 적이 없다. 갈등의 이유가 국가의 신체인 영토일 때, 그 싸움의 양상이 본능적이고 원시적으로 흐르지 않기란 불가능하며 대화와 연대는 정신 나간 소리가 된다. 이 싸움은 수컷의 싸움이며 그것이 시작되면 모든 것을 삼킨다. 어떤 진보적 대통령도 영토 싸움에서 진보적일 수는 없다.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를 표방하며 25개국 45개 조직이 결집해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제2인터내셔널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민족주의와 애국의 원심력에 의해 소멸해버렸다.

일본 탐사선은 불길한 예감을 싣고 다가오고, 영화 속의 배두나와 일본 소녀들은 “끝나지 않은 노래를 부르자, 똥 같은 세계를 위해… 쓰레기 같은 놈들을 위해”라며 함께 노래한다. 꼬리를 무는 나쁜 상상. 소리없이 다가오는 일본의 탐사선은 일본 괴수 포르노애니메이션의 단골 캐릭터인 확장된 남근 형상의 촉수로 바뀐다. 촉수들은 끈적끈적한 액체를 분비하며 소녀의 신체에 틈입한다. 소녀의 신체는 유린되고 파열된다. 일본이라는 남근이 한국이라는 소녀를 파괴한 것이 아니다. 양국의 남근이 함께 노래 부르던 자신의 소녀들을 파괴한다. 귀엽고 소박한 한편의 영화일 뿐인 <린다 린다 린다>를 2006년 4월에 한국인 관객으로서 보는 일은(아마 일본인 관객으로서 보는 일도) 즐거운 소일거리에 그치지 못한다.

천진난만보다는 무기력한 소녀들

<린다 린다 린다> 직전에 도착한 영화 <스윙걸즈>의 소녀들은 천진난만했다. 그들은 성장에의 욕망도 저항도 없다. 입시의 중압도 질투도 심지어 성적 호기심도 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스윙걸즈>는 정성일의 지적대로 거의 초현실적인 ‘청춘명랑물어(物語)’, 어른이 창안한 이상향의 소묘다. 시간은 계절 혹은 학기를 순환할 뿐이며 아무도 늙지 않고 어른이 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소녀들은 단지 몇달의 노력으로 무언가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린다 린다 린다>는 <스윙걸즈>의 흥미로운 짝패다. 문제가 생긴 한 고등학교 소녀밴드가 신입 부원을 보충해 마침내 성공적인 공연에 이른다는 이야기 줄기는 비슷하다. <스윙걸즈>에서와는 달리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일이다. 학교 축제가 시작한 날에 결원이 생겼고 새 보컬 송(배두나)은 노래를 잘 못한다. 한국인 교환학생이라서 일본어도 서투르다. 그를 연습시켜 축제 마지막 날에 공연을 해야 한다. 갈 길이 급한데 <린다 린다 린다>는 기대와는 다른 길을 간다. 소녀들은 종종 멍하게 앉아 있거나 연습 시간에 자주 늦는다. 이쪽 소녀들은 천진난만하다기보다 무기력하다.

실은 이 영화의 등장인물 전체가 무기력하며, 영화는 이들의 무기력을 묵묵히 묘사한다. 학교 축제라지만 음식 판매대 외엔 어떤 곳도 축제의 활기가 없다. 조악하게 설치된 클럽 비너스에는 동네 아이들이 따분한 놀이를 하고 있고, 록페스티벌에는 서너명의 소녀가 풍선을 들고 환호한다. 유급당한 선배가 벌이는 옥상의 만화가게는 아예 손님을 맞을 생각이 없다. 송이 준비한 ‘일·한교류문화전시장’에는 송의 유일한 친구인 일본인 꼬마가 와서 놀고 있다. 린코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어서…”라며 밴드에서 발을 뺀다. 교사도 마찬가지여서 학생에게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3분을 더듬거린다.

소녀들의 무기력은 불안의 다른 표현이다. 3학년인 그들은 과거와 불화하고(밴드 동료인 케이와 린코는 오랜 친구지만 싸웠고 누구도 싸운 이유를 알지 못한다) 미래는 불투명하다. 학교 건물에는 “세계의 무대에서 자기를 외쳐라”라는 구호가 씌어 있지만 그들은 외칠 자기가 없다. 그들은 무언가 되어가지 않는다. 혹은 무언가 되려는 욕망을 말하지 못한다. 음악에 집착하지도 않고, 따라서 숙련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다. 연습실에 모여서도 그들은 문자를 보내고 귀를 파며 시간을 보낸다.

카메라는 그들이 연습하는 모습보다는 잠자는 모습을 더 많이 비춘다. 그들의 잠은 깊고 잦다. 노조미는 머리를 쥐어박아도 깨지 않으며, 송은 자기가 꾸민 전시장에 엎드려 잔다. 공연 당일 아침에도 그들은 잠든 채로 발견된다. 3시 반 공연을 앞두고도 그들은 자느라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 그들은 공연이라는 결말에 이르기를 두려워하며, 현재를 자꾸만 지연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결말이 텅 비어 있음을 소녀들은 린코처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잠은 시간의 계율로부터 이탈하고픈 욕망의 표현이다. 숙련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거나 그 과정이 종종 생략되며, 서사는 진전되지 않고 이야기는 같은 자리를 맴돈다. 이 이야기에는 갈등과 위기, 그것의 해소과정이 이상할 만큼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우연과 오인이 빚어낸 희열

출구는 모두 우연과 오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들이 공연 곡목으로 택한 전설적인 펑크밴드 ‘블루하트’의 노래는 다른 밴드 이름이 씌어진 테이프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송은 밴드에 보컬이 필요했을 때 그가 멤버들 앞을 지나갔고, 그나마 송이 일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입을 승낙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시점인 공연 당일 그들이 잠들지 않고 제시간에 도착했다면 그 공연은 앞선 밴드의 공연처럼 서너명의 박수를 받는 초라한 공연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늦었고, 친구들이 대신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 동안 사흘 내내 맑던 하늘이 불현듯 소나기를 내린다.

무기력에 지치고 비에 젖어 체육관에 몰려든 친구들 앞에서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몰골로 등장한 소녀들이 “시궁창 쥐처럼 아름답고 싶어, 사진에는 찍히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라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청중은 열광한다. 카메라는 비에 젖은 운동장과 낡은 교사를 비추고 소녀들의 노래는 교정을 적신다.

이 순간의 희열과 감동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소녀들이 어떤 성취에 이르러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의 공연은 기껏 동료 학생 100여명이 환호해줬을 뿐 송이 노래를 좀 잘하게 됐다는 것 말고 그들이 이룬 것은 없다. 펑크는 스윙재즈와는 달리 장인적 숙련에 무관심한 장르이며 그나마 그들은 서투른 카피밴드일 뿐이다.

그 희열의 정체를 집단주의적 열광에의 향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침내 그들이 어떤 언어를 공유하는 순간의 희열이다. 그 언어는 무기력과 불안에 젖은 당신에게 시궁창 쥐의 꼴이지만 그래도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자기 연민의 언어, 가냘픈 위안의 언어다. <린다 린다 린다>의 결말이 마음을 적시는 것은 그 희열 뒤에 배음처럼 울려퍼지는 연민과 비애 때문이다. 그 가냘픈 위안의 순간에조차 필연과 의지가 아니라 온갖 오인과 우연을 경유해서야 비로소 도착한 자들의 서글픔.

그 언어의 중심에 낯설고 서투른 한국 소녀 송 혹은 배두나가 있다는 사실은 기묘하다. 송에게 처음 블루하트의 노래를 들려줬을 때 송은 울고 있다. 이 언어는 경계를 넘는다. 송은 일본영화 특유의 과장된 표정과 동작과 대비되는, 그리고 세상에서 오직 배두나만이 가능할 듯한 어설프고 다정한 표정과 동작으로 무기력에 빠진 동료들에게 그리고 낡아빠진 교정과 어두운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공연장에서의 배두나는 우아하진 않지만 그저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몸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소녀들만의 은밀한 트랜스내셔널

소녀들은 경계를 넘어 한목소리로 공연을 마쳤다. ‘블루하트’의 <린다 린다 린다>를 부르는 배두나의 목소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귀를 맴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 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든다. <린다 린다 린다>의 소녀들은 은밀하게 자기들만의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여기서 그들의 연대는 인터내셔널이 아니라 트랜스내셔널이다(송이 꾸민 의례적인 인터내셔널의 장 ‘일·한교류문화전시장’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의 노래를 듣고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노래를 부른다.

공연장에 헐떡이며 달려와 청중 앞에 선 송은 얼떨결에 ‘파란마음데스’라고 소개한다. 이 번역은 묘하다. 영어의 ‘블루’는 우울하다는 느낌을 담고 있지만 한국어의 ‘파란’에 담긴 뉘앙스는 거의 정반대다. 이 이상한 번역은 케이의 옛 남자친구가 생일 축가로 난데없이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장면, 그리고 앞선 공연 밴드의 보컬이 성조기 무늬의 스카프를 매고 있는 모습과 은밀하게 대립한다. 더듬어보면 송과 일본 소녀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의사소통에서 막힐 때 흔히 끄집어내는 서투른 영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소녀들은 서양의 중재없이 만나고 싶어한다. 공연날 아침, 화장실에 나란히 선 송은 케이에게 한국어로 “고마워, 밴드하자고 해줘서”라고 말한다. 케이는 “고마워 송, 멤버가 돼줘서”라고 일본말로 대답한다. 송은 다시 한국어로 “고마워, 동지”라고 말한다. 케이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이 대화는 거의 판타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 소녀가 한국인 소녀에 의해 ‘동지’라고 불리는 순간 두 사람의 언어의 차이는 불현듯 사라진다. 이제 ‘부루하토데스’가 ‘파란마음데스’라고 말해져도 좋은, 혹은 말해지고 싶은 것이다.

<린다 린다 린다>의 소녀들에겐 역사의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막 공동의 언어를 발견하고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가냘프고 왜소한 연대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거대 남근의 쟁투를 견뎌낼 수 있을까. <린다 린다 린다>는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안쓰러운 영화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