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도마뱀> 배우 이재용
2006-05-0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이재용은 강한 인상을 가진 배우다. 나직하고 무게있는 목소리를 지닌 그는 <지구를 지켜라!>의 그로테스크한 형사와 드라마 <야인시대>의 미와 경부, <친구>의 위협적인 깡패처럼 악역이나 주인공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그에겐 다른 모습도 있었다. 한때 구국을 외치던 엘리트 청년이었지만 지금은 택시기사 아내에게 얹혀사는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의 ‘이 선생’은 집착이나 폭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마르고 날이 선 듯한 외모를 비집고 떠올랐던, 허영도 있지만 따뜻하고 유머러스했던 중년 남자. 이재용은 영화 <도마뱀>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의 모습과는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주인공 아리(강혜정)의 삼촌인 서정 스님은 부모 잃은 어린 조카가 여인이 되기까지, 한 걸음 거리를 두었지만 넉넉한 애정으로 감싸안아, 운명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인물이다. 불혹을 넘긴 이재용은 아직도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더 많아 보인다.

-서정 스님은 아리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고 어느 정도는 조강(조승우)에게도 그렇다. 악역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역을 맡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달려라 울엄마>에서 코믹하지만 부정(父情)도 아는 인물을 연기한 적이 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내 역이었던 서승현씨가 막걸리를 퍼마시고 주정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똥 푸는 사람이어서 언제나 손을 막걸리로 씻었기 때문에 막걸리를 마시며 아버지를 생각했던 거다. 나는 그걸 모르고 아내를 타박하다가 그녀를 업고 골목을 걸어내려온다. 그런 연기도 했는데 왜 깡패로만 기억되는지 모르겠다. (웃음)

-서정은 당신이 지금까지 연기해왔던 인물들과 다르게 평온하고 맑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인상이 워낙 두드러져 어떻게 그런 분위기를 끌어내는지 궁금하다.
=나처럼 착하게 생긴 사람도 없는데. (웃음) 깡패 연기를 하면 자주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워야 한다. 그러면 피곤한 인상이 배어나와 나쁜 기운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스님 역인데 소주 마시고 고기 먹고 그럴 수 있겠나. 선방에서 스님들이 공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바뀌게 된다.

-서정과 아리는 살갑게 애정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데도 애틋한 감정이 드러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선방 생활을 몇년 하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게 달라진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서정이 아리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 짓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처음엔 그 장면을 다르게 생각했다. 죽음이란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낙엽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스님이 눈물을 흘리겠느냐고. 하지만 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게 자비심인 것 같았다. 달라이 라마도 설법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죽어가는 존재를 보며 연민을 느끼는 것 말이다. 처음엔 서정의 암자에 수좌가 한두명 있는 것으로 설정됐었는데 없어진 것도 그가 수련만 하며 차츰 생사에 초연해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아리와 조강을 볼 때 애틋함은 배어나왔다. 어린 아리를 연기한 아역배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아이였고, 강혜정은 워낙 애틋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조연이기 때문에 감정이 너무 드러나지 않도록 자제하고 한 그루 소나무처럼 서 있으려고 했는데도 아리와 조강을 보면 애틋한 마음이 생겼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악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그저 악독하다기보다 그늘이나 광기처럼 무언가 다른 파장을 더한 듯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깡패 김기호도 그랬다. 어떻게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왔는가.
=사람들은 자기 눈에 한 꺼풀 입혀지면 그것만 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첫사랑 순정이 있는데 언제 한번 멜로를 찍어보나 했었다. (웃음) 내가 제일 심심하게 생각하는 건 후경(後景)이 없는 인물이다. 먹고살아야 하니 후경이 없는 인물도 해왔지만 <폭풍 속으로> PD에게는 그런 인물만 계속 연기해왔으니 후경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과감하게도 멜로 라인을 집어넣었더라고. (웃음) 그렇지 않았다면 김기호는 단순한 스토커가 될 수도 있었을 거다. 깡패들이 사랑하는 방법이 사실 그렇다. 예전에 부산 깡패들은 우연히 미스코리아 같은 아가씨를 만났다 하면 그냥 업어와서 같이 살았다. 손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하고. <야인시대>의 미와 경부도 다른 걸 집어넣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 절충된 경우다. 그는 김두한과 맞붙는 인물인데 그저 고문기술자 수준이면 안 될 것 같았고 죽자 사자 나라를 위하는 경찰이 아니었을까 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대부분 선악 구도가 단순한데다가 일본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도 있었다. 우리 때는 시절이 하 수상하지 않았나. 현대사의 왜곡을 파헤치다 보면 반드시 청산하지 못한 일제시대 역사와 맞물리곤 했다.

-부산대 철학과 82학번이었으니 대학 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다들 짱돌 던지고, 열혈남아들이었다. 부산대학교 후문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옥상에 올라갔다가 형은 진압경찰이고 동생은 시위대 선봉으로 만나는 광경을 봤다. 형은 집에 가라고 하고, 동생은 제발 우리 나가게 해달라고 하고. 그걸 보고 마음을 접었다. 학생들도 정치집단화가 되어 누구를 위한 이념인가 의문을 가지게 됐고. 도망갈 데가 연극이구나 하면서 연극만 했다. 그때 세상이 싫은 젊은이들에게 연극하는 사람은 별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악몽 같아서 드럼통을 두드려 펴서 요트를 만들어 대학민국을 떠나겠다며 요트 그림 그리고 노는 게 일이었다. 윤리 교과서는 절대선 운운하는데 그걸 가르치는 선생은 백정처럼 애들을 잡으니 세상이 X같지 않았겠는가. <아일랜드>라는 연극을 본 것도 중학교 때였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가 소재인 연극이었는데 배우 두명이 나와서 땀을 비오듯 흘리며 연기를 하고 그 뒤로는 파란 조명이 비치는 게 너무 멋있었다. 꼭 대학에 가서 저걸 해야지 했다.

-대학생들은 제대해서 복학하거나 졸업할 무렵 진로를 고민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연극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나는 신의 아들이어서 군대는…. (웃음) 대학 3학년 때 일인데 연극을 하면 굶어죽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사진도 하고 싶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하고도 알고 지낸데다가 유도사범이었던 하숙집 아들이 양장점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종의 몰(mall) 개념을 생각했다. 사진 스튜디오도 있고 옷가게도 있어서 여자들이 한번 들어오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고, 건물 위에는 극장과 카페가 있는. 실패해서 남포동 뒷골목을 전전하며 동가식서가숙했지. 종이패턴 만드는 법까지는 배웠는데 가위질을 잘 못한다고 사부, 그러니까 그 유도사범이 천을 누르는 쇳덩이로 머리를 찍더라. (웃음)

-졸업 뒤에도 부산에서 연극을 했다. 대학이나 지방에서 정식 연기 훈련을 받기는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연기를 배웠는가.
=우리 때는 트레이닝이 다 주먹구구였다. 서울에서 이호재 선배 같은 이가 공연을 하면 입장료만 들고 상경을 했다. 앞자리에 앉아 몇번이고 공연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저렇게 말을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배웠다. 그래도 할 짓이 그거밖에 없어 연극을 그만두지 못했다. 연극은 마약 같아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가 마르게 하지만 재미가 있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탄식을 하고 감동을 받는 재미. 세상에 나가면 부딪치는 게 많은데 조명이 비추는 무대 안에서만은 사랑은 완벽한 사랑일 수 있다. 온갖 평지풍파를 겪을 수도 있고.

-세상이 X같았다고 말했는데 연극을 하니 그런 기분이 조금은 풀리던가.
=연극은 X같은 세상을 해부해야 해서 더 고통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에너지를 연극에 쏟아부으니까 좋아지는 게 있었다. 무대에선 내가 옷을 벗고 지랄을 하든 나라님을 욕하든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니까. 건드렸나? 하긴 예전엔 극장에 프락치가 있고 사복이랑 술먹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학교나 학원을 다닌 적이 없는데도 연기를 잘 가르치는 배우로 소문이 났다. 얼마 전에는 <슈퍼스타 서바이벌>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87년에 친구가 연기학원을 차린다면서 가르쳐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월급 조금 줄 거냐고 물었더니 학생이 많으면 많이 준다고 하더라. (웃음) 억울한 마음이 있었다. 극단마다 연기론 같은 게 없어서 스타니슬라프스키 번역본을 들고 공부하고, 무용가들에게 지도받고 그랬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들은 무용가랑 결혼도 했지. (웃음) 서울에서 선배들이 순회공연하러 내려와도 술만 마시고 가지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일종의 실험대상으로 삼으려는 마음도 있었던 거다. 무언가 던져주고 이건 왜 이럴까, 어떻게 반응하나, 관찰해보는. 그렇게 감정과 연기를 훈련시키다보니 연기훈련법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제대로 가르쳤구나 싶었다. 학생뿐만 아니라 배우도 재훈련이 필요하다. 재능의 문제라기보다는 소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깊은 무의식까지 탐구해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저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법만 배운 배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르치는 일은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 막힌 부분을 풀어주려면 내가 먼저 해보고 풀어야 하니까. 연기를 가르치면서 70%는 내가 가져가는 것 같다.

-전수일 감독의 <내 안에 우는 바람>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연극과는 다른 영화만의 재미는 무엇이었나.
=산 좋고 물 좋은 데 돌아다니는 거. 연극을 하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하고만 부대끼다보니 답답한 게 있었다. <도마뱀>은 경북 영천에서 찍었는데 절에 들어가는 길이 어찌나 좋던지 머리 깎고 거기 그냥 주저앉을 것 같았다. 산세가 좋으면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느낌이 나는데 그곳이 그랬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 낯설게 친해지는 재미도 있다. 영화 만드는 젊은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게으른가 반성도 하고. <베를린 천사의 시>의 브루노 간츠를 좋아해서 독일에 있는 선배에게 필모그래피며 자료를 부탁해 받은 적이 있다. 그 사람도 그렇게 말하더라. 영화를 하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어서 계속하게 됐다고.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한번 익숙해진 이미지 그대로 배우를 소모하는 면이 있지 않나.
=내가 부산에서 활동하던 연극배우들 중에선 허우대가 큰 편이어서 무대에서도 아기자기한 역보다는 거칠고 굵은 배역을 많이 맡기는 했다. 코미디도 했지만. 그래도 처음엔 초조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사람들 인생살이라는 게 소소한 면이 많고 차츰 그걸 보여줄 수 있지 않겠나. 이제는 괜찮아졌다.

-지방에서 영화를 찍는 경우가 많아졌다고는 해도 주로 서울에 머무르게 될 것 같다. 그런데도 서울로 이사하지 않는 이유가 무언가.
=나는 부산이 좋다. 해수욕장이 일곱개가 있고 산도 있고 들판도 있는 도시는 아마 부산밖에 없을 거다. 회와 너무 잘 어울리는 C*소주도 있고. (웃음) 연극을 하다보면 화낼 일이 많지 않겠는가. 그럴 때 우리는 바닷가 백사장에 나가 소주 한병 꽂아놓고 수평선을 보면서 마음을 씻어내곤 했다. 아이들에게도 부산은 좋은 고장이다. 태풍이 불 때 부산에 와본 적이 있나. 집채만한 파도가 눈앞에 보인다. 내 아이들에게서 그런 경험을 빼앗고 싶지 않다.

-예술가들은 전성기에 걸작을 쏟아내고 그 뒤 퇴보하는 경우가 많다. 배우는 어떤가.
=연기도 그런 게 있다. 허물 벗듯이 한번 올라가서 그대로 쭉 가다가 딜레마에 빠지고, 몸부림치다가 한번 더 허물을 벗고.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연기를 못하지는 않는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일흔이 넘으니 이제야 화술이 무언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BBC>가 제작한 셰익스피어 시리즈에 나오는 나이 먹은 배우들도 놀랍다. 4분이 넘게 대사를 쏘아대는데, 언제 숨을 쉬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배우는 그렇게 가는 길이 다르다. 피아니스트는 뼈가 굳으면 연주를 못한다고들 한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늙은 시인을 연기한 쿠르트 보이스는 그때 나이가 여든다섯살이었는데도 마치 그림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드라마 <주몽>에 출연한다고 들었다. 배역 이름이 부득불이던데 인물의 성격도 드러나는 이름인가.
=그렇다. 자기 고집을 숨기고 왕을 움직이는, 지략이 있고 애국심도 있는 인물이다. 전국을 다 돌아다니면서 찍으니까 이번에도 좋은 데 많이 가겠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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