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케이블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진행자가 깊은 인상을 주었던 영화 한편을 꼽아달라는 주문을 했는데 함께 출연했던 분은 펠리니 감독의 〈길〉을 이야기했다. 속으로 ‘탁월한 답변이군’ 하며 감탄했다. 영화사적 걸작이자 누구라도 감탄할 만한, 나무랄 데 없는 답변 아닌가. 한편, 난 얼결에 이명세 감독이 만든 〈첫사랑〉을 이야기했다. 한국 영화에서 이런 위트 있는 상상력이 등장했다는 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견해를 밝히면서 말이다. 실은 그저 개인적 취향이 묻어 있는 답변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스크린 속 나의 연인’에 관한 청탁을 받고서 엇비슷한 고민을 했다. 영화사적으로 위대한 배우, 혹은 영화제에서 상 하나쯤 거머쥔 배우를 거론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쥘리에트 비노슈와 장만위, 그리고 심은하 등 배우의 이름을 대략 떠올린 뒤, 난 (또다시 취향이 거침없이 명령하는 대로) 전화를 건 기자에게 어느 여배우 이름을 말했다. “마츠 다카코로 쓸게요” “네? 마츠다 카코요?” (그만큼 마츠 다카코는 국내에서 지명도 있는 배우가 아닙니다. 그저 양해를…) “흠, 〈4월 이야기〉의 마츠 다.카.코.로 하죠.”
〈4월 이야기〉는 봄이 되면 다시 찾는 영화 중 한편이다. 도쿄 시내에 눈 내리듯 벚꽃이 화사하게 날리는 장면은 언제봐도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영화는 작은 소품이다. 상영시간도 한시간 남짓이며 감독은 〈러브레터〉로 잘 알려진 이와이 ??지 감독. ‘순정만화적’ 상상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주 소개되는 감독인데 나름의 까닭도 없지 않겠지만 감독 자신으로선 억울한 순간도 있겠다. 그러면 청춘의 비극적 자화상 〈릴리 슈슈의 모든 것〉도 순정만화인가?! 라는 식으로.
여하튼, 〈4월 이야기〉에서 마츠 다카코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우쓰키’라는 대학 초년생. 그녀는 지방에서 도쿄로 대학을 진학해 혼자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닌다. 강의실과 서점, 집을 오가며 조용히 생활하는 우쓰키에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으니…. 그녀의 첫사랑이 영화 속 키워드. 미스터리 영화처럼 〈4월 이야기〉는 우쓰키라는 여학생이 왜 도쿄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지, 특정 대학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등의 행동을 살며시 설명해준다. 요컨대, 누군가를 향한 주체못할 짝사랑이 원인이었던 것.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4월 이야기〉를 틈틈이 다시 챙겨보는 것, 그리고 도쿄 시내를 자전거를 탄 채 배회하는 우쓰키 역의 마츠 다카코를 어느새 ‘나의 연인’으로 삼게 되었는지 말이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것을 “사랑의 기적”이라 당차게 말하는 우쓰키의 모습과 흩날리는 벚꽃을 보면서, 그리고 봄비 맞으며 거리를 콩콩 뛰어다니는 그녀를 보면서 삶의 설레는 봄날을 느껴보고픈 심정인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