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많이 있으니 유의해서 읽으십시오.
<도마뱀>을 기자 시사가 아닌 일반 시사로 보았다. 일반 시사에서 느껴지는 날것의 반응들이 더 흥미로울 때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아했다. 영화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저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후반에 이를수록 그 훌쩍이는 소리는 아예 영화 속 사운드의 일부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슬프게 만들었을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저렇게 뻔한 멜로는 비현실적이고 진부하지만, 여전히 ‘영원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호소력을 발휘하는군. 실제로 이 영화에 대한 대다수의 평들은 영화 속 사랑의 비현실성, 구태의연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그것도 영원한 사랑, 첫사랑 따위를 환상적이고 유아적인 틀 안에서 그리는 영화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영화들이 지루하고 유치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영화들의 존재를, 그리고 거기에 동화되는 관객의 감정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도마뱀>이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도마뱀>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것의 진부함이 아니다. 내게 놀라운 것은, 영화 속에서 비교적 노골적으로 반복 제시되고 있는 어떤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평자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영화의 결정적 반전을 공개해야 하는 부담이 따르기 때문일까. 그렇게 이해를 하더라도, 그들의 비판이 유치한 멜로를 유치하다고 지적하는 데 그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지금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어떤 문제를 그 유치함으로, 즉 모두가 가짜인 걸 다 알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감추거나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도마뱀>의 반전을 폭로하는 글이 될 것이다. 그 반전을 중심에 두지 않고 이 영화에 대해 쓰는 건 속임수이거나 영화의 교묘한 전략을 그대로 따라가는 길이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독자들께서는 이 점을 잊지 마시길!!
우선은 익히 알려져 있는 표면의 이야기. 조강과 아리는 18년에 걸쳐 몇 차례 만나고 헤어진다. 그들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딱 세번을 만나는데, 그때마다 아리는 사라진다. 조강은 그녀가 왜 사라져야만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떠난 아리를 잊지 못한다. 아리와 재회할 때마다 그는 이유를 묻지만, 아리는 거짓말을 할 뿐이다. 그 역시 더 묻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마지막 만남. 아리는 어김없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거짓말을 하고 조강을 떠나지만 조강은 여전히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우연한 기회에 아리가 한국을 떠난 것이 아니라 병에 걸려 요양하고 있음을 알게 된 조강. 그들은 눈물겹게 재회하고 아리는 죽고 조강은 그 죽음을 지키고 기억한다.
스스로 물러나는 타자, 죄의식을 덜어낸 사회
이 구구절절한 비극적 사랑에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은 아리가 병에 걸렸다는 전제다. 그러니까 아리는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려서 조강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병에 걸려 있다. 그녀의 병은 곧 이 영화의 전제지만, 그것은 뒤늦게 반전의 형식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누군가의 죽음으로 사랑을 호소하고, 슬픔을 자극하는 멜로영화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아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많은 병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에이즈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아리가 영화의 시작부터 에이즈에 걸린 상태였음을 알려주는 순간, 무엇보다 아리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병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순간, 우리는 다시 영화의 초반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녀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수혈을 잘못 받아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갑작스럽게 드러날 때, 우리는 이전까지 아리가 보여준 이상한 행동과 알 수 없는 말들부터 말없는 사라짐과 끊임없는 거짓말까지, 그녀의 모든 것과 그녀의 주변 상황들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어린 아리가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전제하며 다시 한번 돌이켜보는 이야기. 어린 아리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노란 우비를 입는 이유는 소녀의 입을 통해 이런 식으로 전해진다. “나는 외계에서 왔어. 내 속에는 저주가 퍼져 있어. 그래서 나를 만지는 사람들은 내 저주에 전염돼. 그걸 막으려고 우비를 입는 거야.” 실제로 우비를 뚫고 아리와 육체적으로 접촉했던 조강을 포함한 몇몇은 어김없이 다치거나 아팠다. 어린 조강이 아리를 데려다줄 때도, 아리는 문 앞에 서서 말한다. “이 선을 넘어오면 안 돼.” 아리는 이 말을 이후, 공항에서 조강과 헤어질 때 반복한다. 그리고 조강은 아리가 병원 중환자실에 실려갔을 때, 병원 외부의 바닥에 그어진 어떤 선 밖에서(혹은 안에서) 비를 맞은 채 하염없이 서 있다. 그는 병원 안에 들어가 깨어나지 못하는 아리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반드시 눈여겨볼 것은, 아리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점 외에, 그녀가 ‘스스로’ 우비를 입고 경계선을 긋고 누군가의 접근을 막으며 내세우는 이유들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녀에게 우비를 입힌 것도, 그녀 앞에 경계선을 그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 에이즈 환자의 사랑을 다루었던 <너는 내 운명>을 떠올려본다면, 여기서 사회는 이 타자를 가족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끝내 법의 심판을 통해 감옥에 가두었다. 영화는 그 과정을 보여주면서 사회에서 배제당한 타자의 고통에 중심을 두고 사회의 이중적이고도 억압적인 모습을 부각시켰다. 이는 기존의 영화들이 에이즈를 다루었던 가장 전형적인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도마뱀>에서는 이처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과 태도로 타자를 배제하는 사회가 없다. 환자와 사회 사이에는 대립이나 충돌이 부재한다. 대신, 여기에는 ‘정상적인’ 사회 속으로 섞이려 하지 않고 사회로부터 스스로 물러나는 타자가 있다. 누군가 그녀의 병에 놀라, 그녀를 배제시키기 전에, 그녀는 자신을 노란 우비 속에, 경계 선 안에(혹은 밖에) 가두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걱정 마, 당신들에게 전염시키지 않을게.’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주체의, 영화의, 혹은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자들의 최소한의 죄의식마저도 덜어준다. 그들은 ‘우리’가 온갖 이중적인 방식을 도모하여 내쫓기 전에, 스스로 현실로부터 멀어진다.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어진다.
거짓말, 실재를 회피하기 위한 환상
아리의 끊임없는 거짓말, 상상력, 환상, 나아가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아리가 꾸며낸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 달콤한 거짓말들은 타자가 당면한 고통의 실재를 은폐하고 ‘우리’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너는 내 운명>식의 타자와 ‘정상성’을 앞세운 사회의 일방적인 만남(비록 이러한 방식 역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은하가 감옥에 갇힌 뒤 거울을 통해 비록 상상일지언정,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때, 관객 역시 무방비로 그 거울 속에 노출된 실재를 대면하게 된다)에서 오는 그 짧은 고통의 순간마저 제거해버리고 타자를 외면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조강이 아리의 거짓말을 들으며, 매번 믿는 척을 할 때, 그리고 영화가 아리의 병이 전면화되는 순간까지 그녀의 거짓말을 탐구하지 않고 그저 나열할 때, 조강도, 영화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실재와의 대면을 회피하게 해주는 환상이 필요할 뿐이다. 아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리는 거짓인 줄 알면서도 스스로를 외계의 존재로 정의하며 결정적인 순간들마다 사라지고, 조강은 아리를 구해줄 유에프오를 기다리고, 영화는 이들의 이 유아적인 행동들을 사랑으로 환원한다. 에이즈와 죽음은 낭만적인 환상에 의해, 그 끔찍한 불안과 두려움이 적당한 슬픔이 될 때까지 세척된다.
만약, 이 영화가 아리에 대한 조강의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조강은 아리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정해놓은 경계선을 지웠어야 했다. 그것을 지우기 어려웠다면, 스스로 그 선을 넘어서 그녀를 선 안의 세계로 끌어왔어야 했다. 18년 동안 환상 속에서 그녀를 키우는 대신, 그녀의 병을 함께 호흡하면서 말이다. 조강은 순수한 아리를 더럽히는 병이 에이즈가 아니라, 아리가 에이즈 자체임을, 그가 사랑해야 했던 건 에이즈와 분리된 아리가 아니라는 점을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는 18년간의 순정,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말하지만, 조강이 아리를 사랑했던 순간은 단 두번이다. 그 한번은 그가 어린 시절 아리와 함께 우비를 쓰고 난 다음날 홍역에 걸렸을 때, 그리고 다른 한번은 십대 후반에 아리와 입을 맞춘 뒤 감기에 걸렸을 때이다. 타자의 결핍과 만난 이 위태로운 순간, 그녀의 결핍이 조강에게 ‘전염’된 순간, 서로의 불완전성을 경험한 순간, 고통스러운 실패의 뒤따름을 전제한 그 순간. 이것이 사랑이다. 물론 영화는(혹은 아리와 조강은) 그 순간을 견뎌내지 못하고 아리의 죄의식으로 건너뛰어 아리와 조강의 불운한 어긋남으로 이동해버린다.
그리하여 아리 혹은 그녀의 병은 단 한순간도 현실에 속하지 못하고 거짓 이야기로 떠돌다 죽어서 영원한 사랑의 기억으로 승화된다. 영화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에이즈라는 실재와 나아가 영화가 그토록 강조하는 진정한 사랑과도 마주하지 못한다. 주체는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순종적으로 수용하며 스스로 물러나는 순결한 타자의 상을 창조한다. 그리고 타자에게서 흐르는 고름을 대면해야 하는 고통없이, ‘완전한 존재’로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무서운 일이다. <너는 내 운명>에서처럼 <도마뱀>의 결말에서도 어김없이 하얀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