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페스티벌이라 하면 우선 끊임없는 플래시 세례와 함께 화려한 스타들의 ‘레드카펫’ 입장이나 관객의 환호 등 축제 분위기가 연상된다. 그러나 지난 4월25일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TFF)의 오프닝 작품으로 상영된 <플라이트93>의 월드 프리미어에서는 화려함이나 축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9·11을 주제로 한 첫 할리우드영화인 <플라이트93>은 당시 백악관을 타깃으로 한 테러리스트들을 막기 위해 싸우다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추락해 사망한 항공기 ‘유나이티드 플라이트 93편’의 탑승객과 승무원 40명의 이야기. 9·11 이후 맨해튼 경제 침체를 막기 위해 시작된 TFF의 창설자 로버트 드 니로는 맨해튼 지그필드시어터 행사장에서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이야말로 이 작품을 소개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며 “이 자리에 유가족과 친구들이 참석해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공동 창설자인 제인 로젠탈은 유가족에게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줄 것을 부탁했고, 극장 발코니에 앉아 있던 유가족이 (일부는 눈물을 참으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일부는 당시 사망한 가족의 사진을 들고) 일어서자 극장을 메운 관객이 이들을 기립박수로 맞았다.
“이 작품이 9·11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데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는 감독 폴 그린그래스는 “유가족과 뉴욕 시민들 앞에서 뉴욕의 페스티벌인 트라이베카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게 된 것에 겸허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고교 졸업 뒤 74년 뉴욕을 첫 방문했다는 그린그래스는 “뉴욕은 미국인의 특별한 천성(exceptional nature)과 관대함을 가르쳐준 곳”이라며, “9·11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현명함으로 이끄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가족과 함께 숙연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시사회에서 다큐멘터리 톤으로, 그리고 거의 리얼타임으로 연출된 작품을 보며 다시 한번 9·11의 아픔을 되새기게 됐다. 그러나 할리우드 특유의 영웅 심리나 액션 스펙터클을 철저히 배제한 이 작품은 다양한 증빙 자료와 유가족의 증언을 토대로 한 ‘타당성있는 추측’으로 만들어져, 관객을 이용한다는 느낌은 전혀 주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TV영화로 제작됐던 작품이 일부 승객을 영웅으로 묘사해 유가족에게 비난을 받았던 반면, 이 작품은 스포츠나 격투기에 능한 일부 승객이 테러리스트들과 싸우는 것을 보여주고, 파일럿 자격증이 있는 한 승객은 항공기 조정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며, 장난감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 승객은 테러리스트가 몸에 부착한 폭탄이 가짜임을 추측해낸다. 대부분의 캐릭터에는 이름이 없지만, 유가족이 자신의 가족을 알아볼 수 있게 짧게나마 당시 그들이 입었던 옷이나 안경, 여행 목적지에 관련된 잡지나 전화 내용들을 곳곳에 삽입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마지막 장면. 유나이티드 93편의 추락으로 영화가 끝나자 극장 안은 유가족의 오열로 가득 채워졌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싶다.
런던 지하철 폭발 테러 직후 제작된 이 작품은 2004년 발표된 ‘9·11 위원회리포트’(The 9·11 Commission Report: Final Report of the National Commission on Terrorist Attacks Upon the United States)를 바탕으로 했으며, 당시 항공 관제탑 등 항공기 납치를 가장 먼저 포착하고 대처했던 실제 인물들이 대거 찬조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너무 이르다’는 일부 여론 속에 지난 4월28일 개봉된 <플라이트93>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가족 휴가코미디 <R.V.>(1640만달러)에 이어, 1160만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리며 2위를 차지했다. 1500만달러의 소규모 예산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다른 할리우드 작품에 비해 절반가량인 1795개 스크린에서 개봉됐으나, 스크린당 평균수익 6462달러를 기록, 순위 10위권 내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