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다시 떠올린 건 지난 3월 중국 출장 때였다. 나는 저장성 항저우 공항에서 내려 헝뎬이라는 시골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펼쳐지는 차장 밖 풍경에 심드렁해질 즈음 뭔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염색(染色)’이란 글자가 박힌 간판들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버스는 막 염색공장 지대를 지나는 중이었다. 허리를 곧추세워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내 마음은 이미 장이머우 감독의 <국두>를 좇고 있었다.
그렇다고 옆사람을 붙잡고 <국두>를 보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공리가 당대 최고의 배우 아니냐고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이 최선이란 걸 알고 있었다. 공리가 만인의 연인이 될 수 없는 이상 내가 원하는 만큼의 공감과 탄복을 얻어내지 못할 게 뻔했다. 나는 공리를 가슴에 숨김으로써 일체의 훼손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붉은 염색천이 난무하던 이 영화를 만난 건 1990년대 초반 군 복무 시절이었다. 전작 <붉은 수수밭>의 명성에 이끌렸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청승맞게 혼자 찾아간 극장에서 그녀와 처음 대면한 느낌은 먹먹함과 울적함이었다.
<국두>에서 공리는 늙은 남편이 운영하는 염색공장에서 남편의 조카와 파멸적인 사랑을 나누던 모습을 열연했다. 스크린 속의 그녀는 20대의 내 혈기를 자극할 만한 농염을 갖추지도 못했고, 애써 요망을 떨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상미학이 곁들여진 화면이 곳곳에서 붉은색으로 타오를 때 내 가슴도 그렇게 물들어 갔다. 비극적 사랑은 그녀의 절규와 함께,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때 나는 기꺼이 마음을 줘버렸다. 규율과 절도의 생활 탓에 연정의 이유까지 단순해지기 쉬운 군대 시절임을 고려하더라도 당시의 무장해제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전까지 내가 가슴에 둔 여배우는 사춘기 시절의 소피 마르소가 전부였다. 그런 면에서 나는 심심한 사람이었다.
<국두>를 접한 이후 나는 두 살 연상인 공리의 영화 행적을 따라갔다. 전작 <붉은 수수밭>(1988)을 뒤져서 봤고 <홍등>(1991), <귀주 이야기>(1992), <인생>(1994)은 개봉 직후 기어이 표를 끊었다. 그녀의 출연작들은 중국 영화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까지 뒤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나는 오래도록 답을 구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공리에게는 천박하지 않은 관능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국두>에서 사내의 야위고 풀기 없는 모습에 비해 그녀는 얼마나 생기 있고 육감적이던지.
되바라지고 다소 이악스런 모습을 드러낼 때(<홍등>)나, 이례적으로 단발머리를 선보였을 때(<인생>), 그리고 관료주의에 끈질기게 대항하는 투박한 촌부로 변신했을 때(<귀주 이야기>)조차 나는 그의 숨어 있는 관능을 보았다. 누군가 그의 볼이 팬 광대뼈를 단점으로 지적할 때에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올해 나는 그녀가 잠시 낯설었다. <게이샤의 추억>에서 질투심 많은 게이샤 하쓰모모로 나왔을 때 선뜻 마음을 주지 못했다. 하쓰모모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듯 맹렬한 분노에 몸을 떨 때에도 쉽사리 감정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연기 인생은 약진했지만, 나는 자꾸 과거의 공리를 찾고 있었다.
영화 속의 내 여인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다는 헛된 믿음을 그렇게라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