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에, 그러니까 제프 버클리가 자살했을 때,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성문영씨와 이야기를 하다가 커트 코베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성문영씨는 분을 참다못해 급기야 흥분하면서 단호하게 선언처럼 말했다. “그런 놈들은 다 지옥에 가야 돼요, 아니, 당연히 지옥에 갔을 게 틀림없어요. 이렇게 소녀의 애간장에 불을 질러놓고는 그냥 그렇게 자살해버리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 그런 놈들은 다 지옥에 가야 한다. 거의 좋아 죽을 지경이 되도록 유혹한 다음 그렇게 자살해버리면 살아남은 나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살아남은 자의 그리움, 죽은 자의 침묵. 말하자면 어처구니없는 사모곡.
<라스트 데이즈>의 죽음, ‘자살’
그런 다음 한참 뒤에 구스 반 산트가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나날을 영화로 찍는다는 말을 그에게서 직접 들었다(그는 처음부터 커트 코베인에 관한 전기영화가 아니라 ‘마지막 날들’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물론 그가 나에게만 해준 이야기는 아니고 2003년 칸영화제에 <엘리펀트>을 들고 경쟁부문에 왔을 때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당신의 다음 영화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대답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냥 중얼거렸다. 또? 사막에서 친구를 죽이고 혼자 살아 돌아온 실화를 다룬 다음(<게리>) 컬럼바인고등학교 사건을 찍고 나서(<엘리펀트>) 이제는 결국 커트 코베인의 자살을? 여기서 (나에게) 방점은 커트 코베인이 아니라 자살이다. 이건 이미 다룬 두개의 죽음과 전혀 다르다. 물론 타살설이 여전히 나돌고 있으며, 여전히 그 죽음에 대해서는 미스터리이다. 그건 슈퍼스타들의 공통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이 있다. 짐 모리슨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외계인이라는 설도 있다. 지미 헨드릭스는 부두교 교주로 은둔 중이라고 한다. 마크 볼란은 죽은 척한 다음 성전환 수술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도 있다. 그게 이언 커티스라는 말도 있다. 이를테면 슈퍼스타의 죽음과 신화에 관한 토드 헤인즈의 <벨벳 골드마인>. 이상하게 시드 비셔스에 관해서는 별다른 소문을 듣지 못했다. 그런 다음 커트 코베인의 죽음. 여기에는 두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커트 코베인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다루는 것이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진실은 무엇인가? 좋은 소식. 숨겨진 진실이 있다. 나쁜 소식, 그런데 그 진실이 저 너머에만 있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는 크리스 카터가 아니며, <엘리펀트>는 <X파일>이 아니다. 그러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죽음을 앞둔 나날들을 말 그대로 ‘그냥’ 다루는 것이다. 그냥? 그냥. 여기에는 어떤 흥분도 없으며, 흔히 로큰롤 스타를 그릴 때 보여주는 결정적인 라이브 공연이나 앨범 제작을 둘러싼 그룹 내의 갈등 끝의 감동도 없으며, 혹은 스타이자 예술가인 그의 고독한 영혼의 넋두리나 예술가로서의 그 자신의 심금을 울리는 초상을 그릴 생각도 없다. <라스트 데이즈>는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단순해서 그런 것을 담을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는 아니다. 이를테면 <라스트 데이즈>를 가장 진부하게 설명하는 방법.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 영화는 커트 코베인에 관한 일종의 추모이며, 구스 반 산트의 <게리>와 <엘리펀트>에 이어지는 그의 ‘레퀴엠 3부작’ 중 마지막 완결편이다. 이야기는 병원 클리닉에서 탈출한 (커트 코베인이라고 생각되는) 블레이크가 집에 돌아와 마약한 상태에서 환각에 빠져 혼미한 며칠을 보낸 다음 결국 그의 집 뒤편에 자리한 온실에서 자살한다는 줄거리이다. 영화는 이걸 시간적으로 마치 마약에 취한 것처럼 혼란스럽게 구성했으며, 그 대신 (어쩌고저쩌고)… 라고 설명하는 글은 <라스트 데이즈>를 본 적이 없거나 이 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나는 지난해 칸에 가지 못했고 그래서 이 영화를 늦게 보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그런 이야기와 이 영화 사이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런 글을 읽은 다음 영화를 보면 누구라도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반문. 물론 커트 코베인 대신 블레이크라는 이명동일인으로 설정할 수 있다(아마도 여기에는 코트니 러브 혹은 커트 코베인의 유가족과의 기나긴 법정 분쟁을 피하려는 현실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마약에 취한 블레이크가 병원에서 도망쳐서 집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34번째 숏에서 계단을 내려온 아시아가 방문을 열자 쓰러진 블레이크를 발견하는 장면이 47번째 숏에서 다시 한번 반복될 때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 혼미한 사람은 블레이크인데 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시간 안의 미로에 빠져들고 있는가? 그들은 모두 마약 때문에 혼란에 빠진 것인가? 왜 아시아는 중간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는가? 블레이크를 발견한 사람들은 왜 항상 시간의 원을 그리듯이 제자리로 돌아오는가? 왜 어떤 사람은 끝내 블레이크를 만나지 못하는가? 바로 옆방에 블레이크가 있는데도. 블레이크가 개입되지 않은 장면의 시간적 반복이나 중복 혹은 생략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또는 몇번이고 반복되는 언덕. 거듭 올라와야 하는 계단. 계속해서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침실 방문. 어떻게 블레이크는 갑자기 공간을 점프하듯이 이동하는가? 말하자면 블레이크가 마약에 취한 것이지 그에게 초능력이 있는 것은 아닌데?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블레이크를 바라보는 시점숏은 누가 보는 것인가? 갑자기 한참을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는 돌리 숏은 왜 뒤로 물러나야만 성립되는 것인가?
왜 스토리라인을 따라가야 하는가
구스 반 산트의 <게리> 이후 <엘리펀트>를 거쳐 <라스트 데이즈>에 이르는 새로운 미학적 행보와 그 의심스러운 윤리적 선택에 대해서는 이미 정한석이 충분히 지적했다(<씨네21> 제550호, “마지막 나날, 그 혼몽의 절정 속으로”). 특히 “다들 보고 떠드는 신문의 한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 미처 적히지 않은 인상을 잡으려 한다. 인과율이 없다느니, 무책임하다느니 하는 말은 그래서 성립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풍문과 반쪽 사실로만 전해진 그 ‘실재의 잔영을 구조화’하는 작업이며, 그 문제에 대한 구스 반 산트의 해석 방법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이 바로 구스 반 산트가 취한 윤리적 태도이기도 하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말하는 중이다. 그러나 “<라스트 데이즈>의 스토리 라인을 설명하는 것은 그래서 부질없는 짓이다. 영화가 요구한 보기의 방법을 거스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이어지는 글은 동의할 수 없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정반대다. <라스트 데이즈>는 영화 자신이 스토리 라인을 설명해달라고 간절하게 간청하는 영화이다. 만일 이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끝내 <라스트 데이즈>가 보여주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없다. 아니,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구스 반 산트가 취한 윤리적 태도라면 더더구나 그 이야기를 따라갈 때에만 그 윤리적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구스 반 산트는 남의 죽음을 놓고서 매우 유치한 지적 유희에 빠져든 것이다. 여기서 스토리 라인을 포기하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한 앎에 관한 질문을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그때 이 포기는 즉각적으로 (안티고네가 스스로에게 했던) 윤리의 반문을 받아야 한다.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살을 한다. 여기서 그 행위를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물을 것인가, 아니면 그 행위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라고 물을 것인가는 미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윤리적으로는 무엇을 대가로 치르고 내 의무를 선택하는가, 라고 묻기 때문에 매우 중요해진다. 정한석은 질문을 던진 다음 미학적 선택을 따라간다. 그러나 나는 <라스트 데이즈>에서 윤리적 선택에 대한 (블레이크가 자신에게 내린 정언명령에 대한) 질문을 하는 쪽의 (구스 반 산트의 윤리적) 선택을 묻기 위해서 (두개의 선택) 이 이야기 전체의 운동 방식을 아는 것이 그 형식을 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구스 반 산트가 세개의 죽음을 다루면서(<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세개의 시간을 응시하고 재현한 다음 그 안에서 화해의 불가능성을 다루는 까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 그 시간(의 영화적 방식)에 대한 이유로서의 근거를 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영화들의 이야기를 무시하기는커녕 다루고 또 다루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 재현의 불충분성이 일으키는 모순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방점은 불충분성이다. 그 세개의 죽음은 절대적으로 불충분하다.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이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우리는 살인을, 자살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스트 데이즈>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굿 윌 헌팅>과 <엘리펀트>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에서 백주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학교 학생 두명이 인터넷에서 주문한 총기로 중무장한 다음 학교에 찾아와 친구들을 별 이유없이 차례로 죽이기 시작한다. 그때 구스 반 산트는 미학적 이유로 선형 이야기 구조를 버린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을 미학적으로 설명하면 그건 끔찍한 일이 된다. 오직 구스 반 산트는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만 이 사건을 불충분하게 영화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천재적인 수학자 윌 헌팅을 이야기하는 방법(<굿 윌 헌팅>)과 고등학교에서 친구들을 살해한 두 소년을 다루는 방법은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상 두 이야기가 모두 실화이며, 그는 두 영화에 동일한 원칙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구스 반 산트는 주인공이 요구하는 이야기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스 반 산트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의 선택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순종하게 되었는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구스 반 산트가 주인공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이야기를 물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인공의 행위, 그 행위의 사건, 그 사건으로서의 이야기가 내리는 명령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상투적인 오해. 할리우드에서 상업적인 영화를 만드는 구스 반 산트와 인디영화를 만드는 구스 반 산트라는 서로 다른 두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끝내 구스 반 산트의 변덕을 따라잡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변덕이 아니라 오해이다. 구스 반 산트는 같은 원칙을 갖고 두개의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 역이 아니다. 다만 그는 사건의 권리, 인물의 진실, 이로부터 뒤따르는 원인과 결과에 관해서 성립하는 시간의 계약을 놓고 내기를 벌이면서 그것을 다루는 연출의 윤리라는 의무에 책임질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물어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구스 반 산트에게는 (<카우걸 블루스>와 <파인딩 포레스터>를 제외하고) 실제 인물, 정말 있었던 사건을 다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심지어 그의 리메이크영화 <싸이코>가 보여준 미장-카피(mise-en-copy) 방식의 그 철저한 재현. 말하자면 실제 했던 (사실이 아니라) 영화를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서의 유일한 선택인 카피. 여기서 이런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만일 <굿 윌 헌팅>과 <엘리펀트>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의 차이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둘 사이의 차이가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두 영화를 같은 구조의 시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게으르게 오해하는 것이다. <라스트 데이즈>는 <엘리펀트>의 반복이 아니다. <엘리펀트>에서 시종일관 따라다니는 카메라가 <라스트 데이즈>에서는 자꾸만 멀리 떨어져서 쳐다보는 것은 단지 구도와 이동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인물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는 완강한 저항이 있다. 혹은 다가갈 수 없다는 포기가 있다. 이때 여기서 만일 이야기를 포기하면 그것은 사실상 구스 반 산트의 둘 사이의 이해의 (차이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라스트 데이즈>의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도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나는 그것이 지금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라스트 데이즈>는 지금 영화가 이야기를 하는 화법의 하나의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동시대 영화들이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라스트 데이즈>를 설명하는 것은 내게 매우 긴급한 질문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이 글이 길어진 이유이다. 그러니 이 지나친 친절을 이해해주시길. 나는 상영시간 1시간41분 동안(자막 모두 포함) 122숏 혹은 128숏(여기에는 좀 애매한 측면이 있다. 마지막의 자막이 픽스 카메라의 롱테이크에 일종의 인서트처럼 들어가 있다)의 이야기의 접히거나 늘려놓은, 두개로 그어놓은, 잘려나간 선을 따라가면서 셈을 할 것이다. 말 그대로 스토리 라인.
블레이크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선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서 먼저 주인공의 소개. 여기서 주인공의 이름은 커트 코베인이 아니라 블레이크이다(게다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너바나의 노래는 단 한곡도 나오지 않는다). 블레이크라는 이름을 들은 다음 두 사람이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한명은 영국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이고, 다른 한명은 그 이름과 동명이인이었던 짐 자무시의 <데드 맨>의 윌리엄 블레이크이다. 블레이크에게는 이 두 사람의 그림자가 동시에 어른거린다. 우선 짐 자무시의 윌리엄 블레이크. 일자리를 찾아 서부에 온 블레이크는 생각지 않았던 총격전에 말려들고 마침내 인디언 ‘노바디’와 함께 먼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의 끝에 도착했을 때 블레이크는 인디언 추장에게서 진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이미 죽었으며, 다만 자신이 그것을 알지 못한 것뿐이었다(여기에 더해서. 짐 자무시의 <데드 맨>은 닐 영의 기타 솔로로 진행된다. 커트 코베인은 자기 유서에 “잊혀지느니 차라리 불타버리겠다”고 썼다. 그런데 그 말은 닐 영의 <헤이 헤이, 마이 마이>의 가사 중 일부이다.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그 내부적인 인연의 선들). 내 생각에 <라스트 데이즈>는 <데드 맨>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 둘은 같은 영화이거나 혹은 리메이크이다. 구스 반 산트는 리메이크의 대가이다. 이를테면 히치콕의 <싸이코>의 ‘숏 바이 숏’ 카피인 <싸이코>. 그 다음 짐 자무시의 윌리엄 블레이크와 동명이인인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 <라스트 데이즈>는 힐데가르트 베스테르캄프의 사운드로 디자인했다. 영화는 시종일관 그 사운드의 풍경 속에서 진행된다. 또는 블레이크는 그 사운드와 함께 한몸이 되어 집에 도착한다. 아니, 차라리 사운드는 그의 흔적이거나, 혹은 감옥이다. 그 음악의 제목은 <지각의 문들>(Doors of Perception)이다. 그런데 그 음악의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빌려온 것이다. 블레이크는 커트 코베인이지만, 동시에 윌리엄 블레이크이고 (짐 자무시의) 윌리엄 블레이크이자 또한 블레이크이다. 그런데 그는 또 누구일까? 아니, 차라리 블레이크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기에 더해서 생각해볼 점. <라스트 데이즈>의 인물들은 블레이크를 제외하면 모두 자기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시아(아르젠토), 루카스(하스), 스캇(그린), 니콜(비셔스). 말하자면 현실과 영화의 일인이역, 동명이인. 두 사람이자 한 사람이라는 점.
그러나 블레이크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검은 화면에 들리는 아카펠라 합창이다. 영화에서 처음 듣는 소리는 전기기타의 선율이나 언플러그드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킹스 싱어즈가 아름다운 화음으로 노래하는 ‘전쟁’(La guerre)이다. 전쟁? 그렇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전쟁인가? 왜 시작하자마자 전쟁을 알리는가? 어떤 선전포고. <라스트 데이즈>는 그 어떤 전쟁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숲속 작은 집에서 진행된다. 블레이크는 전쟁하기 위해서 돌아왔는가, 아니면 전쟁 속으로 돌아온 것인가? 그것이 전쟁이라면 무슨 전쟁인가? 누구와의 전쟁인가? 블레이크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총을 들고 돌아다닌다. 그는 그 총으로 누구와 싸우는가?
블레이크의 귀환
하지만 그보다 잠시 앞으로, 첫 장면(말하자면 이게 이 영화의 방식이다. 앞으로 간 다음 다시 좀더 앞으로. 나는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의 선을 따라갈 셈이다). 블레이크는 숲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질러 가고 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폭포가 쏟아지는 연못에 도착한다. 그는 연못을 가로질러온 (그래서 카메라 앞까지 다가온) 다음 소변을 본다. 쏟아지는 두개의 물, 폭포와 소변. 여기서 이 폭포의 물소리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화는 이 폭포의 물소리를 몇 차례고 반복해서 들려준다. 블레이크가 도착한 집 근처에는 호수가 있지 폭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장면은 숲속의 깊은 밤중에 모닥불을 피우면서 블레이크 혼자 앉아 있다. 말하자면 산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번에 블레이크는 숲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고 있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이다. 블레이크가 (산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산 반대편을 가고 있는 중이다. 말하자면 그는 같은 산을 빙빙 돌고 있다. 다른 하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중이다. 그때 블레이크 저편에 지나가는 것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열차이다. 같은 방향. 두개의 속도, 두개의 길(우연의 일치라고? 천만의 말씀. 그건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찍을 수 없는 장면이다. 게다가 기차를 위해서 비워놓은 상단부의 화면의 텅 빈 구도를 생각해보라). 기차라는 실재. 실재의 속도의 곁. 동시에 실재 안으로 들어가는, 블레이크의 휘청거리는 느린 걸음걸이. 그 느린 걸음걸이를 따라 블레이크는 두개의 길 앞에 선다. 하나는 아무도 다니지 않아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길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다녀서 난 길이다. 블레이크는 사람들이 다니던 그 길, 왼쪽 길로 간다. 그는 가던 길을 돌아오는 중이다. 그는 처음 가는 길이 아니라 이미 다니던 길을 따라간다. 말하자면 반복 혹은 귀환.
블레이크는 길을 따라 집을 향해 걸어 올라가면서 중얼거린다. 자막은 이렇다. “나는 두렵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세상에, 난 모를 뿐이야.” 그런데 블레이크의 대사는 이렇다. “Cause I’m afraid. You can’t do anything, you can’t do anything. I don’t know what I’m. God, it’s just I don’t know.” 이때 대사가 중요한 것은 블레이크가 ‘God’을 부를 때 갑자기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이다. 이 집을 찾아온 사람들의 대사에서 셈을 해보면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고, 근처에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교회 종소리는 어디선가 계속 들리고, 그 소리는 시계소리와 겹친다. 말하자면 소리의 몽타주. 무한에 대한 약속과 뒤를 밟듯이 쫓아오는 유한.
귀신과 기억의 경주에 나서다
블레이크는 그 먼 길을 걸어서 집 앞에 도착하지만 그 집에 들어서기를 망설인다. 그 집은 블레이크에게 이상한 집이다. 영화를 본 다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블레이크가 그 집에 들어가는 장면이나 나오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이미 안에 있거나 바깥에 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이런 집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한 가지 연상.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가 떠올랐다. 아무리 집 안을 거닐어도 마치 홀린 듯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집. 그것이 진행된 이야기의 반복인지, 혹은 그 시간의 찰나의 무한정한 연장이었는지 알 수 없는 사라진 현재 앞에서 기억을 놓고 벌이는 가정된 능동적 종합의 저편에서 재현된 수동적 종합에로의 왕복. 다른 한 가지 추론. 그런데 구스 반 산트는 차라리 루이스 브뉘엘의 <자유의 환영>에서 본 수없이 많은 방문을 지닌 산속의 여인숙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스캇이 이 집에 돌아와 한밤중에 파티를 하면서 꺼내들었던 음반을 지나치기는 어렵다. 그때 스캇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코>의 LP판 A면 네 번째 곡 <모피를 두른 비너스>(Venus in Furs)를 턴테이블에 걸어놓은 다음 그걸 따라 부른다. 이 곡명은 사디즘으로 잘 알려진 도나시엥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백작의 소설 제목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러나 루 리드에게 영감을 준 것은 사드의 소설이 아니라 루이스 브뉘엘의 <세브린느>이다. 그 곡을 틀고 스캇은 마치 구애를 하듯이, 혹은 루 리드의 목소리를 립싱크하듯이,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세브린느라는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다. 루이스 브뉘엘에게 보내는 오마주? 혹은 우리에게 알리는 퍼즐의 힌트?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이 집은 일종의 귀신 들린 집이다. 이 집에 들어서면 갑자기 시간의 미로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그 미로는 등장인물들 중 누구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귀신 들리는 것은 우리다. 우리는 귀신과 기억의 경주에 나선다. 이때 여기서 가장 이상한 것은 소리이다. 여전히 블레이크가 폭포가 쏟아지던 냇가에 있는 것처럼 물소리가 첨벙거리면서 들린다. 마치 소리는 블레이크와 함께 그 장소를 떠나지 못한 것처럼, 혹은 그 장소로 다시 끌어당기는 것처럼, 아니면 블레이크의 육신을 남겨두고 영혼만이 여기에 온 것처럼, 미처 소리가 블레이크를 뒤따라오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들린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종소리는 집에 도착한 다음부터 장소를 이동해도 여전히 동일하게 들린다. 그때 사운드는 원근감을 상실한 것처럼 그렇게 들린다. 여기서 그냥 소리를 앰비언트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첨벙거리면서 물을 가로질러 오던 블레이크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을까? 그런 다음 그 소리는 계속 따라온다.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기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말하자면 단지 이것은 공간과 사운드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와 사운드의 문제이다. 블레이크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속도와 사운드가 흘러가는 속도가 서로 다르면서 생겨나는 불일치이다. 하나가 늦게 돌아가는 동안 다른 하나가 정상적으로 들리고 있거나, 아니면 블레이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동안 사운드는 빠르게 흘러가는 중이다. 돌아가는 블레이크와 스쳐 지나가던 다른 속도의 기차를 생각할 것. 영화는 그때부터 화면과 사운드가 일치하지 않았다. 혹은 영화 전체가 여전히 블레이크가 물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 모든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다면? 질문의 요지. 하지만 왜 이렇게 다른 두개의 속도가 그렇게 중요해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