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장애인? 활기찬 삶의 전범! <맨발의 기봉이>
2006-05-17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소수자의 능력에 주목한 <맨발의 기봉이>

이 영화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 효도를 다하며, 급기야 마라톤이라는 한계에 도전하여 인간승리를 이루어내는 감동(?)의 휴먼드라마가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는 장애인이 아니고, 둘째, 그의 보살핌을 ‘효’(孝)로 한정할 수 없고, 셋째, 그의 마라톤이 극한의 자기희생이 아닌 ‘행복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소수자’의 능력에 주목하여, 보살핌의 미덕과 인생을 축제로 만드는 비법을 보여준다.

장애 아닌 능력에 주목

그는 장애인이 아니다. 신체적으로 약간의 관절운동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일상생활과 이동에 아무 문제가 없다. 체력도 강해서 힘든 노동도 거뜬히 해내고, 누구보다 잘 달리며, 심장이 나쁘다지만 하프마라톤을 완주할 만큼 튼튼하다. 게다가 “미남은 아니지만~” 좋은 인상(Social Smile!)을 지녔다. 정신적으로 지능이 좀 낮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으며, 물건값을 치를 수 있다. 충동조절도 잘되며, 감정교류에 문제가 없어 독립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다. 사회적으로 저임금이지만 노동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 경제활동인구이다. 이동권이 없던 ‘공주’나, 충동조절이 안 되던 ‘종두’, 감정교류가 어렵던 ‘초원’에 비해 그는 장애가 없으며, <우리형>의 ‘성현’보다도 스스로 장애인임을 느끼지 못한다(<우리형>은 그의 서울의대 갈 ‘능력’보다 사소한 ‘장애’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그 ‘능력’마저 ‘장애’에 대한 보상인 양 다룬다. “네가 공부라도 못하면…”).

하지만 엄연한 ‘정신지체 1급 장애인’ 아니냐고? 장애는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지 않냐고? 맞다. 그러나 장애란 상대적인 것이다. 장애는 그의 자연적 결함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와의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연구자 집단에선 위상수학을 이해 못하는 지능이 장애이며, 극악한 ‘왕따’ 학교에선 약간의 어눌함도 장애이다. 마찬가지로 공주, 종두, 초원도 그가 불편없이 생활할 수 있는 사회에선 장애인이 아니다. 장애는 사회가 들이대는 ‘척도’와 ‘배제의 규칙’에 따른 것이며, 장애를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이다. 영화 속 마을 공동체는 그가 살기에 장애가 없다. 그들은 기봉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경제활동에 참여시킨다. 그는 교회활동과 체육활동도 할 수 있고, 마을의 공적 이슈의 주인공이다. 그가 만약 대도시에 살았다면 그의 지능이 장애로 작용하여, 경제활동은 물론 취미활동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이 말은 농촌 사람들이 착하기 때문에 그를 배척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에게 기봉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필요의 대상이다. 마을 사람들과 기봉이 관계 맺는 방식은 그의 ‘장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능력, 운동능력, 사진찍기 능력 등. 그가 노동을 중단했을 때, 곤란해진 것은 그의 생계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일이었다. 저임금의 허드렛일일 뿐이지 않냐고? 그는 목돈은 없지만, 당장 일손을 놓아도 생필품은 물론 현상비, 운동복 값 등을 지불할 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으며, 자기 노동으로부터도 소외되지 않았다(남의 축사를 청소하며 소를 보고 웃던 기봉이!). 그의 삶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홍반장의 삶과 유사하다. 홍반장도 대도시의 시각에서 보면 ‘백수건달’이지만, 그 공동체에선 가장 요긴한 만능일꾼이다. 이장은 그의 달리기가 마을을 빛낼 것이라 생각하기에 트레이너를 자처하고, 사진관 아가씨도 그를 동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골손님이자 좋은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대한다. 사진관엔 그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능력 중 최고의 능력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이다. 설치미술을 하듯 빨래를 널고, 글씨를 목각하고, 일기예보와 야구중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며, 주변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패션소품도 직접 만든다.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는 외로움을 타지 않으며, 행복에 대한 감응력이 뛰어나다. 고구마를 맛있게 먹는 시늉을 내며 권하는 그에게 어머니의 질문 “넌 사는 게 그렇게 행복하냐?” 그의 대답 “네!”

장애가 아닌 능력이 부각될 때, 장애는 더이상 장애가 아니라, 그의 ‘개성’이 된다. 그는 ‘무장무애’일 뿐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생활을 향유하는 ‘예술가’이자, 행복에 대한 최고의 능력을 갖춘 ‘행복의 달인’이다. 그의 이런 능력을 보지 못하고 장애에 주목하는 여창은 “기봉이를 닮으라”는 말에, 그의 장애를 흉내내려 한다. 여창은 남보다 우월한 유머 감각을 위해 케이블 방송을 보아야 하고, 효도를 위해 비싼 술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수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가하는 기봉의 창조적인 행복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기봉은 ‘다수로부터 소외된 자’가 아니라, ‘(검사나 연예인을 부러워하는) 다수적 삶을 열망치 않는 소수자’이기에, 진정으로 행복하다.

효도 아닌 보살핌의 미덕

그가 어머니에게 잘하는 것을 과연 효도라 칭할 수 있을까? 그는 ‘부모라는 웃어른을 섬기는 도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하는 모든 것과 사랑을 나누고자 한다. 강아지에게 밥을 주면서 강아지와 눈높이를 맞추며 좋아하는 그에겐 위아래 개념은 중요치 않다. 위아래를 중시하는 여창이 “니가 나이가 몇개가 많은데 친구여?”라 묻지만, 기봉에겐 친구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뿐이다. 이웃집 소, 강아지, 물고기, 어머니, 이장, 여창이, 아가씨 등과의 관계에 위냐 아래냐의 서열이 있는 게 아니라, 친구인가 아닌가의 수평적 친밀함이 있을 뿐이다(이장과도 친해지자, 반말로 답한다. 이장, “말이 좀 짧다”). 그는 어머니가 웃어른이라서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극진한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동이 불편하시기에 버스를 붙잡고(이동권 문제는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체한 어머니의 손을 ‘따드린다’. 그의 행위는 효제(孝悌)의 도덕을 내면화한 결과가 아니라, 다른 생명을 돌보는 태도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어떤 행위를 어른에 대한 공경으로 보느냐, 약자에 대한 보살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판단의 문제가 된다. 가령 노인에게 자리 양보하는 근거를 경로사상에서 찾을 때 양보는 타율이 되지만, 돌봄의 미덕에서 찾을 때 양보는 자율이 된다. 양보가 타율인 곳에서 나이는 권력이 되고,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그는 (종두처럼)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고, (공주처럼) 가족에 의존하지 않으며, (초원이나 성현처럼) 가족의 과도한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기봉과 어머니의 관계는 절대적 관계도 아니고, 종속적 관계도 아니다. 따라서 <말아톤>처럼 모자관계를 반성해보는 과정도 불필요하고, “어머니가 영원히 같이 사시지 않는다”는 이장의 말이 그에게 별 충격이 되지 않는다. 이미 독립된 자아로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또한 아들의 봉양을 받으며, 그를 가여워하거나, 미안해하거나, 피학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가 약자였을 때, 어머니가 보살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이상적인 가족관계로서, 그들 사이의 윤리는 보살핌의 미덕이지, 효도라는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도덕률이 아니다.

자기희생 아닌 축제로서의 마라톤대회

마라톤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 애초 장애가 없으니 장애극복을 위함도 아니요, 소통에 문제가 없으니 소통을 위함도 아니다(그는 음성언어, 표정, 사진을 통해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행위를 사진으로 고발하는 기봉!). 그가 마라톤을 시작한 건 첫째, 원래 뛰는 걸 좋아했고, 둘째, 자신이 잘 뛴다는 걸 알게 됐고, 셋째, 상금을 타서 어머니에게 틀니를 해주기 위함이다. 이는 결코 비장하거나 절박한 상황이 아니다. 노래 잘하는 이가 노래자랑에 도전하거나, 박식한 자가 퀴즈대회에 나가는 게 비장한가? <아는 여자>의 정재영의 마라톤은 비장했지만, 기봉의 마라톤은 유쾌한 자기실현이자 재미있는 이벤트이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았고, 이를 끝까지 밀고나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는 사람들의 오해처럼 이장의 욕망에 포획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장의 욕망은 오해되거나 흔들리고, 여러 번 갱신된다. 재신임, 마을 이름 빛내기, 기봉의 정신적 독립과 다른 이들에 못지않음을 증명하기(사실 필요없다), 그러다 낙담하여 뛰는 것 말리기,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기 등. 사람들의 기봉을 둘러싼 생각도 이리저리 변한다. 노동력 손실, 장애인 학대, 혼자서도 계속 뛰니 대견하다, 좋아하니 어찌 말리나, 이참에 서울구경이라도 시켜주자 등등. 이것은 드라마의 허점이 아니다. 본래 타자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란 타자가 주는 감정(affection)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법이다. 이장과 사람들의 유동적인 욕망은 그의 확고부동한 욕망에 결국 흡수된다. 그 과정은 자기를 희생하거나 타자를 희생하는 방식도, 착취-피착취의 과정도 아니다. 그가 연습하는 동안 사람들은 새로운 화젯거리를 얻었고, 마라톤 출전은 그의 삶뿐 아니라 마을의 활력이 된다. 물론 그의 인생을 건 도전도, 마을의 사활을 건 ‘영웅적인’ 행위도 아니다. 그는 마라톤 없이도 충분히 행복했고, 사람들에겐 실질적인 이득도 없다. 그러나 그와 사람들에게 마라톤은 즐거운 체험을 제공한다. 무료한 일상에서 그들은 기봉이 덕분에 스포츠 정신에 관한 고상한 토론도 해보고, 서울까지 올라와 응원할 ‘건수’도 얻었다. 틀니의 비용은 사람들이 추렴한 것이겠지만, 그들 역시 ‘기봉이 틀니-벌기 대장정’에 동참한 삯으로 ‘기꺼이’ 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기봉이 대장정을 펼침으로써 그들 모두는 더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영화는 한 ‘소수자’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주변의 생명들과 사랑을 나누고, ‘남이야 뭐라든 나의 길을 감’으로써 즐거운 이벤트에 이웃을 동참시키는, 활기찬 삶의 전범(典範)을 보여준다. “기봉이 반만이라도 닮아라”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이 사람을 보라, 정말이지 이 사람의 반만큼이나 잘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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