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후반작업도 편집도 끝나지 않은 지난 2월, LA의 소니 스튜디오에서 30분짜리 클립 묶음과 조연을 맡은 두명의 배우를 만났다. 톰 행크스와 오드리 토투, 두 주연배우가 홍보를 위해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아직 때가 이른 시점이기는 했다. 어떤 점에서, 마뉴엘 아링가고사 주교 역을 맡은 앨프리드 몰리나나 사일러스 역을 맡은 폴 베타니가 전해주는 현장 소식이 맛보기의 재미와 감질남을 부채질하기에는 딱 알맞았다. 30분짜리 클립은 할리우드의 장기인,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한 ‘가장 실감나는 허구’ 만들기가 빛을 발한다. 루브르 박물관 같은 까다로운 장소에서 촬영이 쉽지 않아 그랜드 갤러리 대부분을 세트로 지었다지만, 그림 표면의 텍스처까지 신경 써 모사하는 지경이니 흠잡기가 쉽지 않다. 폴 베타니가 “인간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는 사일러스를 보면서 무의식으로 원작과 스크린 이미지를 비교하던 것을 그만둔다. 사일러스의 무시무시한 흰 몸이 주는 생생한 즉물감, 이미지의 힘은 구체적이다. 관객은 아마도 상상 속 얼굴을 지우고, 폴 베타니의 사일러스만을 기억할 것이다. 톰 행크스, 오드리 토투, 이안 매켈런 등 일급배우들이 상상 속 캐릭터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이 리얼한 사건의 현장을 누벼서 다빈치의 암호를 풀어줄 터이다. 영화 <다빈치 코드>는 5월18일 전세계에서 동시개봉한다.
“길을 잃게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아링가고사 주교 역 맡은 앨프리드 몰리나
-영화에 참여하기 전에 <다빈치 코드>의 명성을 알고 있었나.
=휴가를 간 호텔 수영장에서 아내랑 쉬고 있었는데, 주위를 보니까 적어도 10명은 넘게 그 책을 읽고 있더라. 누군지 몰라도 엄청나게 돈 벌고 있겠군 했지. (웃음) 결국은 나도 뉴욕에서 공연하는 동안 한 권 사서 읽었는데, 딱 영화감이로군 생각했다. 공연이 끝나고 LA에서 론 하워드 감독을 만났는데 함께 작업하지 않겠냐고 했다. 긴 설명이 필요없었기에 바로 한다고 했다.-감독이 특별히 당신의 연기에 대해 주문한 것이 있나.
=전혀. 이번 경우에는 대본이 워낙 완벽하게 잘 만들어져 있어서 따로 추가하거나 손볼 필요가 없었다. 현장에서 이런저런 디테일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지만, 그외에는 영화 시작 전에 런던에서 캐스팅을 위해 만났을 때 논의한 것 말고는 없다. 대체로 이번 영화는 치밀하게 계획된 대로 일관되게 진행됐다. 게다가 감독이 배우 출신이기 때문에 열정이 있다. 항상 배우를 배려해주고, 유쾌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니까 같이 일하는 게 편하다. 보통 영화감독이 독재자가 되기 쉬운데. (웃음)-책 속에 등장한 기독교의 역사 해석 등이 논쟁거리가 됐다. 당신의 견해는.
=논쟁은 댄 브라운이 픽션 작가로서 제대로 작업했기 때문이다. 픽션 작가들이 하는 일이 허구의 일을 만들어내고, 믿음직한 사실들을 첨가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픽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거 아닌가. 잘 쓴 픽션들은 “만약 사실이 이렇다면 어떨까”라는 큰 질문을 던진다. <다빈치 코드>가 성공한 이유도 책 속의 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만약 이렇다면 어떨까라고 물음으로써 독자를 매혹시키기 때문이다. 상상할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에 한없이 매혹적인 거지.-종교적 견해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가톨릭이나 기독교인인가.
=우리 부모님은 무종교셨다. 어릴 적 가톨릭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그냥 그 동네에서 제일 좋은 학교라서 간 거고 크리스천은 아니다. 그러니까 ‘편의상 가톨릭’이라고 해야겠지. 가톨릭 학교와 관련된 기억은 오히려 다른 건데…. 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수녀나 신부님이셨다. 그중 한 선생님이 르네상스 미술의 열혈팬이어서, 우리 학교 4층 복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그림 복사본을 쭉 전시해두셨다. 그런데 우리가 뭔가 잘못할 때면, 선생님이 내리는 벌이 그 복도를 왔다갔다하면서, 그림과 화가 이름을 외우는 거였다.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런 식으로. 그때는 참 멍청한 짓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만큼 멋있는 벌도 없는 것 같다. (웃음)-당신의 역할을 어떻게 준비했나. 가톨릭 학교 다닌 경험이 도움이 되었나.
=특별한 건 없다. 나는 연기를 할 때, 캐릭터가 실제 인물이든 허구의 인물이든 최대한 대본에 씌어진 이야기대로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용적인 태도라고 해야 할까. 아링가고사 주교는 종교적 신념이 투철하고 교회를 보호하려는 자로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대본 밖에서 그 이상으로 캐릭터를 연구하진 않는다. 연극이나 영화 속 캐릭터가 만일 현실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관객의 몫이다. 덧붙이자면, 그래도 내가 맡은 주교 역할의 진정성을 표현하기 위해 가톨릭 신부로서 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따위의 디테일은 열심히 연구한다. 캐릭터의 디테일을 부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관객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라고 생각하니까.-영화에 많은 암호 풀이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퍼즐을 좋아하나.
=음, 상당히 좋아한다. 낱말 맞추기 퍼즐 말고 레고 같은 거. 어릴 적에 많이 가지고 놀았는데 나는 자동차나 집, 뭐 그런 걸 만든 게 아니라, 항상 패턴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기하학적 패턴이나 만화경 같은 데 매료됐다. 아마 나 나름대로 ‘질서’를 모으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질서없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웃음) 영화에서도 원작의 암호 풀이의 재미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마뉴엘 아링가고사라는 주교의 이탈리아 이름도 일종의 암호인데 영어로 치면 레드 헤링(red herring)이란 뜻이다. 알다시피 레드 헤링은 ‘길을 잃게 만드는 헛정보’를 의미하지 않나. 주교의 역할이 그런 거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 이게 아니잖아” 하고 느끼게 하는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
“모든 연기는 결국 미스터리다”
사일러스 역 맡은 폴 베타니
-원작에서 가장 멋진 역할 중 하나인 사일러스를 연기했는데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다.
=음, 운이 좋았지. 캐나다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하워드 감독이 연락해서 <다빈치 코드>에서 같이 일하겠냐고 묻기에 일단 “무조건 예스”라고 했다. 하하. (러브리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러브리! (웃음) 그리고는 저격수 승려를 연기할래 하고 묻더라. “노”라고 하면 기회가 없다는 걸 았았다. 그래서 예스.-왜 이 영화에 매료됐나.
=음… 아… 만약 지금 내가 여기서 인터뷰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 집에서 종이와 펜을 들고 폴 베타니판 이야기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디카프리오 코드>라고. (웃음). 솔직히 말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이 책 안 봤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촬영현장에서 작가 댄 브라운을 본 적이 있는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당연히, 왜 그런지 말 안 해도 알지. (웃음).-당신을 보면, 대체로 유쾌한 성격 같은데, 배우로서 사일러스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했나.
=그렇게 행복한 어린이로 자라지 않았는데. (웃음) 음, 난… 정말 모르겠다. 연기에 대해 말하는 게 참 그렇다. 만약 내가 사일러스 역에 공감할 수 잇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사일러스가 아버지상을 찾고 있다는 점이겠다. 사실 간단한 이야기다. 사일러스가 영화 마지막에 자신을 ‘고스트’라고 부른다. 결국 자신이 누군가의 도구라고, 그게 아링가고사 주교든 신이든, 받아들인 것 같다.-어제 사일러스 뒷모습 누드가 나온 클립도 봤지만, 신체적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그 점이 특별히 신경쓰이지 않았는지.
=역할에 따라 누드가 필요하다면 한다. 문제는… 그러니까… 옷을 벗는 건 연기할 때 부딪치는 다른 문제들과 별다를 바 없다. 영화에서 사일러스는 저격수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분명 몸관리를 잘할 거라고 가정했다. 그냥 헬스클럽가서 운동했지 뭐. (몸매가 멋있다.) 지금? (아니, 영화 속에서) 그렇지, 영화 속에서. (웃음), 영화 끝나고 15파운드가 더 쪘다. 크리스마스 휴가가 있었는데 어쩌겠냐. 아. 헬스클럽 얘기 하고 있었지. 정말 지겹다. 하루 종일 하라면 절대 못한다. 그것보다 얼굴 분장이 힘들었는데. 촬영에 따라 2시간 반에서 4시간 정도 걸렸다. 눈썹이랑 머리랑 다 염색하고. 몸 색깔 분장하는 데만 세명의 분장사가 6시간 동안이나 작업했다.-<파이어월>에 이어서 악역을 계속 맡고 있는데, 부담스럽지는 않나.
=전혀.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게 들리는데, 사실 할리우드가 지금까지 나를 잘 받아줬다. 많은 유럽 영화배우들이 할리우드에 와서 주로 악역을 많이 맡는데, 내 경우에는 할리우드가 매우 친절했다고 할까. 굿 가이도 많이 연기하고, 이런저런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무지하게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타입 캐스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책 속의 역사적 사실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이야기가 많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냥 어드벤처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기자분은 어떻게 생각하나? (일동 웃음) 말하자면 이렇다. 영화 찍기 바로 전에 책을 읽었는데, 내가 찍을 영화 책을 안 본다면 멍청한 짓일 것 같아서. 어쨌거나 차를 몰고 동네 서점에 갔고 ‘픽션’ 섹션에서 이 책을 찾았다. ‘철학’이나 ‘종교’ 뭐 이런 섹션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이 이야기가 픽션이라는 사실이 명확하니까, 거기에 영향을 받거나, 설득되고 말고 할 여지가 없다.-평소에 미스터리나 미스터리영화에 관심이 많나.
=아니. 굳이 미스터리에 관해 말하자면, 그게 연기의 첫 번째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이 뭐든지 간에 아무리 건조한 정치영화라고 하더라고, 관객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관객이 미스터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영화는 실패하는 거다. 내가 보기에 뛰어난 배우들은 그 캐릭터에 대해 계속 궁금해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더라. 그런 점에서 모든 연기는 결국 미스터리라고 생각한다.-그렇다면 보통 역할을 맡으면 어떻게 준비하나.
=나는… 음… 오 마이 갓,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솔직히 말해 정말… 지루하지 않게 얘기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알던 배우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은 절대 공연 전에는 누구에게도 무대 의상도 보여주지 않았다. 연기의 신비를 깨서는 안 된다는 거다. 나도 그런 입장에 공감하는 것 같다. 어떤 배우들은 자기가 어떻게 연기 준비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곤 하는데,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 몸을 만드는 거라든가 어떤 정서 모드로 일했나, 그런 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내가 연기 준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그건 내가 얼마만큼 열심히 일했나를 부연 설명하는 것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열심히 일했다고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서가 아닐까, 얘기하는 순간 더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 부분은 비밀로 간직하는 편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경우에는 그냥 연기가 된다. 즉흥적으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리허설에서 딱 원하는 느낌을 찾아내기도 한다. 때로는 화장실에서 그 느낌이 찾아오기도 한다. (웃음) 그러니까 이런 걸 뭐 다 할 필요는 없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