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이상한 사랑이 많다. 때로는 범죄와 다름없는 사랑도 있다. <완전한 사육> 1편의 이와조노는 영혼과 육체가 일치하는 완전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납치’를 한다. 그건 명백한 범죄이고, 다른 인격체에 대한 폭력이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그건 폭력을 수반한 진심이고, 이와조노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적어도 그에게는 진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명백한 폭력이기 때문에.
얼마 전 개봉한 <달빛 속삭임>의 타쿠야는 이와조노와 다르다. 그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타쿠야는 동급생인 사츠키를 짝사랑한다. 순조롭게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되었지만, 난관이 있다. 타쿠야는 그동안 사츠키를 훔쳐보면서 사진을 찍었고, 지금은 화장실 소리까지 녹음해두었다. 그 사실을 안 사츠키는 타쿠야를 변태라고 부르며 떠나간다. <달빛 속삭임>의 진짜 이야기, 사랑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청소년의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이 산산이 파괴된 그 순간, 폐허와 절망에서 기묘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공원을 걸으며 함께하는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 보통의 사랑이다. 사츠키도 그것을, 평범한 사랑을 원했다. 배신감에 흔들리던 사츠키는 검도부 선배와 데이트를 하면서, 타쿠야에게 알린다. 그가 질투하기를 원하면서. 타쿠야가 상처입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하지만 타쿠야는 이른바 ‘변태’다. 질투는커녕 사츠키의 모든 것, 감추어진 분노와 잔인함을 알아가면서 더욱 그녀를 사랑한다. 남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것이 타쿠야에게는 사랑이다.
물론 타쿠야에게 동조할 이유는 없다. 타쿠야의 사랑이 이상하고, 불쾌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타인에 대한 폭력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스토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달빛 속삭임>을 사도마조히즘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적당하지 않다. 사츠키가 타쿠야를 괴롭히는 것은, 배신감 때문이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타쿠야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괴롭히면서 사츠키가 사랑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타쿠야 역시 괴롭힘을 당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타쿠야가 사랑하는 방식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추어진 것을, 훔쳐보는 것. 오로지 그녀의 곁에 있는 것. 개가 되든, 화분의 나무가 되든.
시오타 아키히코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왜 타쿠야가 변태가 되었는지, 어떤 단서도 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 사랑의 맹목성에 대해서만 말해준다. 사츠키가 그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고, 타쿠야는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만을 보여준다. <해충>과 <카나리아>에서도, 시오타 아키히코는 언제나 파멸의 상황에 직면한 아이들의 ‘변태’를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마땅한 상황에서, 기묘하게도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아니 살아남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절대로 인정하지 못할 사랑이지만, 타쿠야의 사랑이 진심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