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광기 어린 마당극에 담긴 폭력의 순환, <구타유발자들>
2006-05-25
글 : 오정연
블랙 유머러스 서스펜스 변두리 토박이 스릴러 <구타유발자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도시 촌놈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시골 공포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해는 마시길. 정형화된 관계와 반응에 길든 이들은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사정없이 무기력해진다는 얘기다. 인적없는 교외에서 수상한 옷차림을 하고 실실거리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동네 토박이들을 만나면, 그들의 이유없는 호의를 맘 편하게 받아들일 도시인은 별로 없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홍보 카피로 내세운 <구타유발자들>의 초반부는 그처럼 알량한 도시인의 불안을 여지없이 이용한다.

젊은 제자 인정(차예련)을 벤츠에 태워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온 음대 교수 영선(이병준)은 인적이 드문 강가에서 모종의 작업을 시도하다 심상찮은 이들과 맞닥뜨린다. 군대에서 심한 구타를 당해 청각과 지능에 문제가 생긴 오근(오달수), 나사가 풀린 표정으로 일관하다 봉연(이문식)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고보는 고교 퇴학생 홍배(정경호)와 원룡(신현탁), 마지막으로 순박한 얼굴 밑에 짐승 같은 폭력성을 감춘 봉연까지. 이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몰려들어 덜 익은 삼겹살을 안주 삼아 대낮부터 소주를 들이켜고, 자신보다 약한 고등학생 현재(김시후)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전혀 죄의식을 모르는 짐승처럼 낄낄거린다. 결정적으로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늘어놓는 외지인의 거짓말. 자, 이제 폭력의 굿판은 시작됐다.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누런 이를 드러내고 머리가 깨진 채로 웃음 짓는 토박이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외지인, 끝간 곳을 모르고 당하다가도 폭발하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왕따 고등학생, 위협적으로 보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동네 경찰. 긴장을 조이고 풀어주는 두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쉴새없이 뒤바꾸는 이들 중 그 아무도 완벽하게 악하거나 선한 사람은 없다. 주·조연을 따질 수 없는 여덟명의 캐릭터 중 주인공을 꼽으라면 이들 모두에게 번갈아 빙의하는 소름끼치는 광기, 그 자체가 아닐까. 그러므로 네 시간 여에 걸쳐 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구타유발자들>을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눈살 찌푸려지는 폭력 속에 정체불명의 불편한 유머를 곳곳에 감춘 이 영화의 매력은 범상치않다. 원치 않는데도 자꾸만 뒤돌아 곱씹게 되는 악몽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심상찮은 배우들

믿음직스런 주연급, 든든한 연기파, 무서운 신예 등 다양한 개성과 경력을 자랑하는 <구타유발자들>의 주연은 모두 여덟명. 한컷씩 등장하는 경운기 할배와 렉카 운전수를 제외한 이 영화의 등장인물 전부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연기 인생 중 가장 적은 비중의 역할이지만 <넘버 3.> 이후 가장 인상적인 악역을 소화한 한석규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친절함과 사람좋은 미소는 흔적도 없다. 사람좋은 첫인상에 대조되는 거친 입버릇과 극단적인 폭력성향을 소름끼치게 소화한 이문식과 나사빠진 표정으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광기어린 바보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선보인 오달수는 어떤가. 이들의 익숙한 자신들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변주했다는 사실이 더욱 소름끼친다. <알포인트>, 드라마 <단팥빵> 등에 출연했고 최근 <달콤, 살벌한 연인>의 건달 연기로 주목받았던 정경호의 파격적인 빨간 머리, <싸움의 기술>과 드라마 <들꽃>으로 얼굴을 알린 신현탁의 친근한 듯 살벌한 미소도 잊을 수 없다. 각각 <여고괴담4-목소리>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예쁘장한 외모로 눈길을 끌었던 차예련과 김시후는 순진한 듯 영악한 음대생과 연약한 듯 질긴 고교생을 통해 완벽한 변신에 성공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대어급 신예의 탄생이 반갑다. 뭐니뭐니해도 <구타유발자들> 최고의 발견은 구제불능의 느끼한 속물 음대교수를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인 이병준이 될 것이다. 제자를 향한 그의 능글맞은 눈빛과 입술 연기, 어마어마한 체구가 민망한 비겁함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패션 70s> <남자가 사랑할 때> 등 드라마,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이후 몇 편의 영화 속 단역, 다수의 뮤지컬에서 활약했고 실제 백제예술대학 뮤지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심상찮은 현장

<구타유발자들> 속 대부분의 장면은 많은 눈과 안개, 혹독한 추위로 기억될 지난 겨울의 한복판, 강원도 문막 간현유원지 안에서 촬영됐다. 일단 인물이 등장하면 퇴장할 줄 모른 채 거의 모든 사건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영화,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이어져야 하는 연극 무대처럼 한달음에 치닫는 영화인지라 촬영 현장의 진행 방식 역시 독특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두달 여에 걸친 현장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한겨울의 짧은 해가 산 속에서 뜨고 지기까지, 그 중에서도 해가 머리 위에서 쨍 내리쬐는 한낮의 두 시간을 제외한 여섯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둘째로 짧은 컷들이 교차하며 마당극처럼 이어지는 극의 흐름 상 언제나 두 세대의 카메라(최대 네 대까지 카메라를 사용했다)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것은 필수다. 원신연 감독은 한 테이크로 찍을 수 있는 상황을 길게 이어서 촬영한 뒤 수십 개의 컷으로 쪼개는 방식을 취했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이러한 촬영 시스템을 어색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의 흐름을 끊지 않고, 미처 계산하지 않았던 순간의 연기까지 각각 다른 각도에서 잡아주는 카메라 운영 방식에 만족감을 표했다. 그러다보니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이 공들여서 조명할 시간이다. 야박한 겨울 태양이 기우는 비상상황에서만 조명기를 등장시킨 원신연 감독과 김동은 촬영감독. 단편 때부터 원신연 감독의 전작 <가발> 등에서 호흡을 맞춰온 이들은 거의 조명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블리치 바이 패스 등의 필름 현상작업과 DI(디지털 색보정) 등 후반작업 만으로 영화의 스산한 톤을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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