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키노 아이’로 구축한 마음의 우주, <보이지 않는 물결>
2006-05-24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인간 내면의 물결 그려냈으나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물결>

펜엑 라타나루앙의 <보이지 않는 물결>에는 주인공 쿄지(아사노 다다노부)가 보스의 부인이자 자신의 연인이었던 여자를 죽이고 홍콩에서 푸껫으로 떠나는 선박이 등장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꽤 오랜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선박 시퀀스에는 인물이 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그 흔해빠진 시점숏이 없다. 펜엑은 일반적인 영화라면 마땅히 존재할 숏을 생략함으로써 바다를 항해하는 여객선의 실체가 모호해지도록 하고, 심지어 선박을 이동시키는 바다의 물결 자체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펜엑은 줄기차게 한 인물을 따라가면서도 서사적 층위의 심리묘사를 삭제하여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존재감의 인물을 그려낸다. 이러한 면에서 선박과 쿄지는 동일한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외부의 현실이 아닌 내면의 풍경에 주목

펜엑은 말 그대로 거두절미한 몇 가지 사건만을 제시한다. 살이 붙어 있지 않은 영화 속 사건은 뼈대만 앙상할 뿐인데도 이 영화는 이상하리만큼 매혹적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물결>이 내러티브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조우한 인물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데 방점을 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작이었던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에는 모든 사물을 가지런히 질서화하려는 켄지(아사노 다다노부)의 세계와 어질러진 모든 것을 방치하는 노이(시니타 분야삭)의 세계가 충돌할 때, 현실의 물리적 법칙에서 자유로워진 또 다른 세계, 나른함의 아름다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매혹적인 세계의 문이 열리는 장면이 있다. 그 세계는 외부 현실의 재현이 아닌, 인물이 느끼는 내면의 파동을 세계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결과였다.

이 두 작품 모두에서 펜엑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외부 현실이 아니라 인물 내면의 풍경이다. 특히 <보이지 않는 물결>에서는 인물 스스로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달리 말해 인물이 그 실체를 정확하게 지각하기 이전의 내면의 혼돈 그 자체를 기록하는 데 주력한다. 무엇보다 선박의 공간에서 잘 나타나듯이, 쿄지가 경험하는 세계는 시공간적인 물리적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기이한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쿄지는 길을 잃고 해매기도 하고, 뜬금없이 자신의 방에 갇히기도 하며, 이유없이 샤워기가 퍼붓는 물세례에 몸을 적시기도 한다.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영화의 분위기와 함께 빨아들인 뒤, 이를 쿄지가 경험하는 내면의 질감으로 변형시킨다. 즉 <보이지 않는 물결>은 쿄지가 자신의 내면에서 길을 잃고,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에 갇히고 등등을 반복하지만, 그것이 죄로 얼룩진 자신의 내면인지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더욱 혼미해지는 시공간적 경험의 기록이다.

<보이지 않는 물결>은 죄의식에 대한 탐구보다는 이 혼미한 상태에서 죄의 지각과 인정이라는 종착지를 향해가는 내면의 여정이다. 쿄지는 바에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처벌하고 있는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기 이전에, 우연히 그 바를 지난 적이 있다. 그의 시점으로 보이는 바의 수족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핏자국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실제의 핏자국이라기보다는 죄로 물든 쿄지의 내면이 외화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선박에서 만난 노이(강혜정)가 쿄지에게 마치 유령을 본 사람 같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즉, 그 핏자국은 내면 어딘가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갑작스러운 구토를 유발시키기도 하지만, 그 실체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기에 혼돈 그 자체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쿄지의 내면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물결>은 마치 그 제목처럼, 육안이었다면 볼 수 없었을 내면의 미세한 물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감성에 새겨진 미세 지각의 세계를 키노 아이(kino-eye)의 힘을 빌려 기록하고 있다.

영화의 엔딩에서 쿄지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보스를 처벌하기를 포기하고 여객선의 바텐더처럼 자신의 죄에 대한 처벌(혹은 행복한 자들을 위한 희생)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무기력한 자신으로부터 죽음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하면서 영화는 어느 염세주의자의 젠체하는 자기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떠가는 선박의 모습은 유령 같았던 선박의 존재감을 회복시켜주는 듯도 하지만, 그것이 쿄지의 죽음이 무책임한 농담처럼 느껴지는 불만을 상쇄시켜주지는 못한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물결>이 구축한 내면의 우주에 감탄하면서도, 완전한 동의를 표할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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