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5월28일(일) 오후 1시50분
사막처럼 황량한 어느 섬에 투표 박스가 떨어진다. 그리고 뒤이어 한 여성이 도착한다. 그녀는 섬사람들에게 투표를 권유하는 임무를 맡고 도시에서 파견된 선거요원이다. 섬을 지키는 군인에게 여자와 동행하라는 임무가 맡겨진다. 둘은 하룻동안 함께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선거요원인 여자와 군인인 남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별다른 클라이맥스 없이 길고 끈질기게 계속된다.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느껴지기에는 이야기의 구조나 인물들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담담하고 영화의 배경은 현실을 벗어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들이 찾아간 ‘잠재적 투표자’들의 삶과 투표를 둘러싼 그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그들의 인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란의 현실적 상황이 곳곳에서 세밀하게 드러나고 있다.
버박 파여미의 두 번째 작품인 <비밀투표>는 단선적이고도 고요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유머러스한 순간들과 배경 그 자체에서 오는 쓸쓸한 정서, 그리고 무관심과 배려 사이에 존재하는 듯한 이란영화 특유의 캐릭터들까지 영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극적인 갈등과 필연적인 화해가 중심이 되는 서구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에게 이 영화는 다소 무모하고 지루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신념으로 무장된 여자와 무료한 섬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는 무뚝뚝한 남자의 어색하고 짧은 여행길에 귀를 기울인다면, 이 영화만의 독특한 화법이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다. 더구나 여전히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이란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는 똑똑하고 침착한 여자와 결국은 그녀에게 수동적으로 이끌려다니는 남자의 모습은, 이란의 현실을 상기해볼 때 통쾌함을 안겨준다.
그런데 도시의 정치판과는 별개로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평화로운 섬사람들에게 굳이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영화 속 선거요원은 정치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설득할까. 이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이자, 이 영화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버박 파여미는 초현실적인 미장센 이면에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적절히 위치시킨 이 작품으로 2001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