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도 저마다 힘이 있다면, ‘어머니’처럼 위력적인 말도 없을 터다. 그러나 배우 나문희(65)에게는 어머니라는 이름도 성에 차지 않는다. 대신 ‘어미’라는 단어가 고집스레 목구멍에 차오른다. 어미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인상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19세기 말 야생 동물 사냥꾼들은 포획과 운송의 용이함을 위해 어린 동물만 노렸다고 한다. 무리를 발견하면 그들은 계략을 써서 어미부터 도살했다. 새끼를 보호하려고 달려드는 어미를 죽여야만 어린 짐승을 떼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해된 어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새끼는 언제나 쉽게 붙들렸다. 나문희는 “내 새끼”라는 부름에 깃든 오장육부의 울렁거림이 더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그런 배우다.
나문희가 분한 어머니들은 내 새끼가 중하다보니 때로 모진 짓도 한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아들의 애인을 중병을 앓았다 하여 내쳤고 <장밋빛 인생>에서는 바람난 아들과 헤어지지 않는 며느리를 구박했다.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버리라고 아들에게 울먹였고 <조용한 가족>에서는 내 가족부터 살고보자는 생각에 죄책감 따위 재빨리 파묻어버렸다. 그러나 ‘내 새끼’에 대한 그녀들의 끔찍한 사랑은 보통 끔찍한 것이 아니어서 결국은 ‘남의 새끼’한테까지 흘러넘친다. 불치병에 걸린 며느리가 딱해 눈물 흘리고, 면회실에 나온 AIDS 환자 며느리에게 “너 몸은 괜찮냐”고 묻고야 마는 것이다. 설경구와 공연한 새 영화 <열혈남아>에서 나문희는 급기야 아들을 죽이러 온 남자와 모자의 정을 맺는다. 퍼내고 퍼내도 바닥이 닿지 않는 그녀의 마음은 늘 밥그릇에 담겨 건네진다. <주먹이 운다>의 상환 할머니는 힘겹게 입을 열어 “밥은 먹었냐”고 묻고 <장밋빛 인생>에서는 “네가 먹어야 그 아이도 챙겨준다”고 아들을 투덕인다. <굿바이 솔로>에서 말없는 미영 할머니는 번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그저 “밥먹자” 한마디를 써 보인다. <열혈남아>에서 그녀가 분한 여인 김점심도 국밥집 주인이다. 나문희가 연기하는 여성들은 끼니의 위대함을 알고 있다. 더러 돌덩이 같은 서러움이 가슴에 얹히면 그들은 뜨거운 국물 한 숟갈을 떠넣고 같이 삼켜버린다.
그녀를 가까이 아는 이들은, 배우 나문희의 품과 깊이는 옹이 박힌 연륜이 아니라 기적과도 같은 순수에서 나온다고 입을 모은다. 그녀가 새 역을 맞이할 때마다 갓난아이 같은 눈으로 인간을 들여다보고,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시나리오를 파고드는 모습을 보았노라고. <너는 내 운명>의 박진표 감독은 “선생님은 아직도 어른이라는 느낌보다 여자라는 느낌을 간직하고 계시다. 좋은 의미에서 공주 같고, 소녀 같고, 빛이 난다. 선생님의 연기는 스펙트럼이 넓은 정도가 아니라 표현 못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고 들려주었다. <굿바이 솔로>의 노희경 작가는 “순수하고 맑다는, 흔히 젊은 배우들한테 붙이는 수사는 실은 나문희 선생님의 몫이다. 그냥 잘하시는 게 아니라 경이롭다”고 확언했다. 나문희를 경애해 마지않는 노 작가는 최근 영화계가 그녀에게 구애하는 현상을 두고 이렇게 덧붙였다. “세상이 아직도 귀한 것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희망이 솟았다.”
나문희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몇번이고 “그때 내가 많이 배웠어요”라는 말로 답을 맺었다. 나는 끄덕이며 생각했다.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은, 배우에게 얼마나 위대한 재산인가. 그녀는 독자에게 예의가 아니라며 예약한 식사를 인터뷰 뒤로 미뤘다. 대화가 끝나고 상이 차려졌다. “배고팠지? 많이 먹어.” 그녀의 한마디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지엄한 명을 받은 심정으로, 허겁지겁 밥을 떠넣었다.
-선생님 인터뷰한다니까 다들 제가 운이 좋대요. 인터뷰를 꺼리기로 유명하신데, 연기를 말로 설명하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인가요, 아니면 연기 이외 모습을 대중 앞에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여기시기 때문인가요?
=두 번째에 가깝죠. 내가 나를 알아서 그래요. 순발력도 약하고 드라마에서 이것저것 많이 보여주니까 내 자신도 내 모습이 보기 싫을 때도 많은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싶거든요. 어디 나가서 내가 독자나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있으면 좋지만 내 욕심만큼 안 될 것 같아서 조심하는 거죠.
-오늘은 그냥 딸 같은 사람이거니 여겨주세요. (웃음)
=그러니까 자기도 엄마처럼 그냥 물어봐. 날 긴장시키지 말고. (웃음) 우리, 막 수다 떨자.
-예. <열혈남아>와 <굿바이 솔로>를 마치고 지금은 주말연속극 <소문난 칠공주>만 하고 계시죠? 이번주 초에 심하게 감기를 앓으셨다고 들었는데, 두 작품 함께 찍느라 탈진하신 건 아닌가요?
=진이 빠져서 그랬지. 영화가 먼저 끝날 줄 알고 드라마 출연을 약속했는데, 날씨나 여러 조건 때문에 조금씩 지체돼 나중에는 스케줄이 겹쳤어요. 그리고 영화는 방송보다 힘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 방송은 좀더 기술적이고 영화는 호흡의 작업이 많아요. 물론 역할에 따라 다르지만 <열혈남아>에서는 호흡이 긴 엄마 역이라 들어가기 전부터 “이 작품 끝나고 죽어도 좋겠다”는 각오를 품었는데 과연, 그만큼 힘들었어요.
-영화쪽이 속엣것을 바닥까지 퍼내는 느낌이 커서 더 힘드신 걸까요?
=아니, 퍼내면 외려 안 힘들 것 같은데 그걸 참아야 하니까, 안에 담고 있어야 하니까 힘든 거지. 너무너무 많이 참아야 하니까. 물론 <열혈남아> 끝에 가서 한번 터뜨려보긴 했지만.
-한 작품이 끝나고 다음 작품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떻게 자신을 추스르세요?
=그게 참 힘들어요. 한 인물이 들어올 때 잘못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공백이 적당해서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생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예전 인물이 아직 안 나갔는데 새 것이 닥치면 힘들죠. 그렇게 되면 일을 시작한 뒤에 상당히 힘겨워요. 뭐, 그래도 나는 과감히 고쳐가며 하지만.
-인물이 잘못 들어온다는 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들어오는 지점의 문제지. 인물이 들어올 때 내게 기운이 있고 시간이 있어서 안에서 삭여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짧은 연기는 그럭저럭 해내도 깊이 들어가면 역시 들통이 나요. (웃음)
어릴때는 담요로 무대 만들고 놀았죠.
-중국에서 태어나셨지요?
=옛날에는 중국으로 많이들 갔어요. 나혜석(서양화가)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의 고모 되시는데 그 집안이 중국에서 공장을 했거든요. 조카인 아버지도 그리고 이주했죠. 거기서 내가 태어났고요. 다섯살에 한국으로 나왔어요.
-남아 있는 그 시절의 이미지가 있습니까?
=커다란 공터 건너편에서 하얀 말이 빙빙 돌고 있던 풍경이 생각나요. 어머니께 여쭤보았더니 두부공장 풍경일 거라고 해요. 베이징에 살다가 옮긴 봉천이라는 곳이었어요. 그리고 마을 입구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수제비 비슷한 것을 끓여 다같이 나눠먹던 기억도 나요. 그때도 아마 공산주의 체제 영향이 있었는지.
-중·고교 시절에 연기자가 될 조짐이 조금이라도 있었나요?
=내내 그런 걸 했죠. 연극반이나 방송반은 학교에 없었지만 오락부장 도맡아 하고.
-어쩐지 그런 성격은 아니셨을 것 같은데 뜻밖이네요.
=이렇게 얌전히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유형이잖아요. (웃음) 어려서부터 소꿉장난은 안 하고 담요를 뒤에 걸어 무대를 만들어서 놀았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애들의 반응보다 그냥 내가 좋아서, 노래하고 춤추는 일이 즐거웠어요. 재동의 문화극장 길로 내려가서 만날 임춘앵 극단이니 국극이니 친구들과 교복의 흰 칼라 떼놓고 구경 다녔죠. 모여서 소리 흉내도 내고.
-사춘기에 마음에 품고 많이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나요? 대중스타나 선생님이나 이웃 남학생이나.
=우리집이 굉장히 가난했어요. 그래서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무능하신 것이 부끄럽고 어떻게 하면 좀 편안히 사나 그런 생각을 했죠. 하지만 그런 고민을 친구들과 의논하거나 하소연하는 일은 없었어요. 그래서 선생님들도 명랑하고 좋은 학생이라고 여기셨죠. 그 뒤로도 고민을 표내지 않고 살아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단순해졌지.
-자존심이 몹시 강한 소녀였나 봅니다. 그때부터 감정을 안에 담아두는 것이 습관이 되셨나요?
=좀 그런 편이죠. 들어줄 사람을 찾는 사람은 그래도 어딘가 열려 있는 건데, 나는 더 막혀 있었을 거야. 대책도 생각 않고 그저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두어명쯤은 친한 친구가 있었지. 그런데 가장 절친한 친구가 졸업 뒤에 외국으로 떠나서 그 일도 참 힘들었어요.
-가족보다 친구한테 더 마음을 열어 보이는 편이었나요?
=아니, 엄마랑 제일 가까웠고 지금까지도 엄마한테 애틋한 마음이 강해요. 그래서 어머니라는 존재에 관심이 많고 엄마들 마음을 많이 이해해요. 지금도 이모, 어머님뻘 되는 분들, 동네분들과 친해요. 그중에는 <바람은 불어도>를 할 때 이북 사투리 아이디어를 가져온 아주머니도 계시죠.
한동안 <주말의 명화> 주인공은 내가 맡아 더빙했어요
-스무살에 문화방송 성우로 방송을 시작하셨습니다. 성우라면 당시 생소한 직업 아니었나요?
=생소했죠. 어느 해 여름 중앙예술학원이라는 곳에서 고졸자를 모집해 당시 제일 잘나가던 연출가 김경옥 선생, 문화방송 초대 사장 최창봉 선생, 배우 최상현 선생 세분이 연기론을 지도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스타니슬라프스키도 처음 들어봤는데, 그 잠깐의 배움이 평생 큰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문화방송의 성우 모집에 학원 친구와 둘이 응했지.
-김무생 선생님도 비슷한 시기에 성우로 활동하셨죠?
=김무생씨는 동아방송이었고, 김용림씨는 KBS, 전원주씨는 동아방송, 나랑 김영옥씨 등은 문화방송에서 성우로 일했죠. 주로 방송극을 했는데 나는 집이 어려우니까 방송국 끝나면 뮤직홀에 가서 디스크자키를 했어요. 뮤직홀? 차 한잔 시키고 몇 시간이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감상실이지. 르네상스, 메트로처럼 고전음악 트는 곳이 있었고, 이종환씨 있던 디 쉐네는 라이트 뮤직을 주로 듣는 뮤직홀이었어요. 메트로에서 초급대학 나온 DJ를 찾았는데 대학 문턱도 안 가보고 음악도 <라스 파뇨라>나 학교에서 배운 가곡 정도 아는 내가 일하게 된 거죠. 오후 DJ를 맡았던 동아방송 아나운서가 만들어놓은 노트를 보고 베토벤이니 드보르작을 따라서 틀었지. 나는 일이 필요했으니까. 다른 사람들 훈련받는 동안 나는 DJ 일도 하느라 방송국에서는 내가 좀 늦었어요. 대신 감수성이 한창 예민했던 그때 뮤직홀에서 음악을 틀고 음악책을 읽다보니 공부가 많이 됐어요.
-가장의 부담 같은 것이 있었나요?
=소녀가장이었지. 조숙하다면 조숙하고 다른 한쪽은 아주 바보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웃음)
-그러다가 60년대 말에 TV 연기로 옮겨가셨는데, 당시로선 자연스런 흐름이었습니까?
=지금은 많이 듣다보니 개성이 있는 것 같을지 몰라도 그때는 내 목소리에 개성이 없다고 했거든요. 음색도 굵으니까 서양영화에 잘 들어맞았는지 한동안 모든 <주말의 명화> 주인공은 내가 도맡아 더빙했어요. <선셋 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도 했지. 그런데 그 연기들이 굉장히 다이내믹하잖아? 거기서 연기를 배운 거야. 뮤직홀에서 DJ하면서 음악공부하고 더빙하고, 나는 방송국 들어간 다음부터 모든 연기공부를 한 것 같아요. 차범석 선생이 단장하셨던 극단 산하에서 연극도 좀 했어요. 당시 성우들은 비교적 자유스럽고 일도 아주 많지 않은 편이라 그럴 수 있었죠. (기자에게) 내 감기 자기한테 옮을까봐 겁난다. 조금만 멀리 앉아요, 응?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님 혼자만의 연기학교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래. 아무튼 나 혼자서 많이 애쓴 구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겐 어떤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식의 공부에 뭐랄까, 우울증 상태 비슷하게 몰입할 수 있었어요.
-배우로서 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연기에 눈이 확 떠지는 듯한 시기가 있었나요?
=아냐. 나는 처음부터 일이 마냥 재미있었어요. 연기가 안 풀린다고 답답했던 기억보다, ‘왜 이리 내 차례가 안 오나’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했거든요. 하지만 성우 출신이다보니 탤런트 출신보다 차례는 좀 더디 왔지. 그맘때 ‘멍게 엄마’라고 29살 동갑인 이대근씨의 엄마 역도 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장년 연기자 층이 두텁지 않아서 젊은 배우들이 두루 다 연기하셨다죠?
=내내 노역만 하다가 서른여섯살에 김수현씨가 쓴 <여고동창생> 뽕란이 역으로 비로소 나이에 맞는, 아니 더 어린 역을 했죠. 젊을 때 나이에 맞는 역을 충분히 못한 것은 역시 아쉬웠어요. 그래도 연극에서는 <적과 흑>의 레날 부인도 했고, <유령>의 엄마 역도 해봤지.
-최근 스크린에서 활약하는 중견 연기자 선생님들의 경우 1960, 70년대 왕성하게 영화 연기를 하시다가 한국 영화환경이 바뀌면서 충무로를 떠나 방송 중심으로 활동하시다 복귀한 예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 현장의 달라진 점을 많이 언급하시죠. 하지만 나 선생님 경우는 <조용한 가족>이 영화연기의 시작이나 다름없어서 그맘때 데뷔한 젊은 배우들과 현장 감각의 차이가 별로 없으실 것 같아요.
=격세지감은 내겐 전혀 없죠. 다만 <조용한 가족>을 찍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 김지운 감독한테 다시는 영화 안 한다고 했어요. 마침 동숭아트센터에서 김명곤씨 연출로 <어머니>라는 연극을 겹치기로 공연해서 더 힘들었나봐.
일 끝내고 오면 고쟁이로 갈아입고 완전한 자유죠
-<조용한 가족> 시나리오는 익숙하게 보지 못하던 장르의 이야기였을 텐데 낯설진 않으셨어요?
=이게 뭔가 싶었죠. 유형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우리 막내딸에게 의논했더니 “이러이러하게 해봐”라고 도와줘서 해낼 수 있었어요.
-산장 가족의 어머니 역이셨죠. 아주 선한 눈매를 하고 등장하셔서는 대뜸 첫 대사가 “옘병할 놈들!” 이었어요. (웃음) 그리고 가족이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으로 머뭇대다 서서히 죄에 둔감해지는데 그 기점이 선생님이 문에 묻은 핏자국을 침 묻혀 닦는 장면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김지운 감독이 만화를 아주 좋아했대요. 책에 빠져 읽다가 전봇대에도 부딪혔다지, 아마? 영화가 평범한 듯 나가다가 엉뚱해지는데, “나, 이거 안 돼서 어떻게 해?” 하며 내가 막 끌탕하니까 감독이 독특한 얘기라 괜찮다고 말해주더라고. 과정은 힘들었지만 사실 재미있었어. 또 영화할 맘이 내심 있었는데 그러고 한참 동안 영화가 안 들어오더라고.
-실제로 따님만 세분 두셨는데 <S 다이어리>나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딸 가진 어머니, 그것도 홀어머니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만날 딸들과 놀아 버릇했으니 딸 엄마 역이 편해서 그런 시나리오에 점수를 더 주죠. 엄마로서 실제로는 정신없었어요. 친정어머니가 거의 키워주셨죠. 큰딸은 피아노 치고 둘째는 바이올린 하고 셋째는 디자이너인데, 딸 가운데 배우가 하나쯤 나왔으면 좋았을 걸 아쉬워요. 아이들 아빠가 예술과 과학을 가장 좋아하거든. 호기심 많고 만날 애들처럼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악기도 고치죠. 옆에서 보면 얼마나 예민하면 그런 일을 할까 신경쓰이지. 반면 나는 관심 가진 부분은 예민하고 다른 쪽은 아주 둔해요. 일 끝내고 오면 고쟁이로 갈아입고 완전한 자유가 되죠.
-따님 중에 배우가 나왔으면 하셨다는 말씀은, 배우의 삶이 좋은 인생이라고 확신하신다는 뜻인가요?
=배우가 참 좋잖아요? 남의 삶을 다 살며 그것 하나씩 표현할 때마다 어렵기도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재미가 있지. 엄마가 배우니까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것도 있을 텐데, 한명쯤은 연기를 권해볼 걸 아쉬워요. 내가 딸들 연주나 작품에 조언해주는 것보다 내 연기에 딸들이 훨씬 적극적으로 도움을 줘요. 음악을 해서 그런가봐. 우선 연주자가 작곡가의 작품을 표현하려면 10개쯤으로 쪼개보잖아요? 연기자도 마찬가지예요. 한 인물을 표현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의 10가지 성격은 쪼개보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리고 어디에 힘을 주고 호흡을 어떻게 갈까를 연주처럼 생각해야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옆에서 나도 음악 레슨을 들었는데 엄마가 아니라 학생 입장에서 들었어요. 재미있었어요. 세상은 눈만 크게 뜨면 얼마든지 배울 게 있어. 그렇지?
-연주자의 곡 해석이나 배우의 캐릭터, 감정 해석이 유사한 작업이라고 보시는군요.
=베토벤이면 베토벤, 모차르트면 모차르트 작곡가에 따른 연주 방식이 있듯 연기도 작가에 따라 대략 길이 나와요. 노희경이면 노희경, 문영남이면 문영남. 그래서 한 작가의 작품을 계속한다는 건 어떤 면에선 좀 위험하다고 생각해. 왜냐면 우린 배우니까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웃음) 작가는 역시 자기 환경에서 이야기를 찾으니 비슷한 인물 구성이 많아요. 물론 익숙해지면 성향을 알아서 편할 때는 있지만 새로운 맛이 덜해져요.
-작품 속에서 보면 만약 딸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면 묵묵히 내버려뒀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한대 쥐어박거나 말없이 어떤 행동으로 스스로 깨우치게 만드는 어머니로 나오세요.
=워낙 내가 딸들을 그렇게 대해요. 간섭할 새도 없고 웬만한 선까지는 내버려두죠. 우리는 각자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주의예요. 만약 딸아이들이 나를 조르지 않으면 난 끝까지 안 들어줄 것도 같아요. (웃음)
무게가 지워지는 작품을 하면 나오는데 한참 걸려요
-김선아씨가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술에 취해 재회하는 장면이 방송된 다음에 선생님이 전화 주신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더군요. “젊어서 하고 싶던 연기인데, 내가 예뻐하는 선아가 잘해줘서 기쁘다”고 하셨다면서요. 가끔 젊은 배우들 연기를 보다가 “예전의 내가 저걸 할 수 있었다면!” 싶은 때가 있으신가요?
=그 장면에서 선아가 어쩌면 그렇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며 잘하던지! “아, 선아는 저 나이에 저렇게 좋은 역을 맡아서 좋겠다” 하며 부러워했죠. 그러고보니 지난 어버이날 선아랑 나영이(배우 이나영)랑 전화 왔더라. 얼마 전 <굿바이 솔로>에도 미영 할머니의 젊은 시절 장면이 있었거든요. 대본 보고 장면이 좋아서 내가 직접 하고 싶은 맘에 연출자한테 물어봤더니 “선생님 주름도 없으시니 머리만 검게 해서 하면 되려나?” 하더라고. 그래서 난 이제 그런 연기는 자격이 없구나 싶어 얼른 포기해버렸지. (웃음) 그냥 잠깐 서운한 거지 뭐. 우린 또 언제나 포기를 참 잘해요. 작품 끝나면 그냥 굿바이하잖아요. 예전에는 연극 공연이라도 끝나면 서운한 마음이 너무 커서 며칠씩 가슴이 아팠죠. 이번에 <열혈남아>도 좀 그랬어요. 끝나는 날 너무 많이 울고 싶어져 그냥 홱 돌아서 와버렸어. 나한테 무게가 많이 지워지는 작품을 하면 거기서 나오는 데 한참 걸려요. 물론 처음에 들어갈 때가 나올 때보다 더 오래 걸리지만.
-배우가 아닌 저로선 영원히 모를 일이겠지만, 인물 하나에 들어가는 것은 한 인간과 친해지는 일이랑 비슷한 과정일까요?
=한 인물이 내 안에 들어와 앉는다는 건, 글쎄, 무엇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냥 묵직하게 그 영혼이 나한테 들어와 앉아 있는 거야. 처음에는 이것이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그러다가, 다른 작품을 중간에 하면 잠시 잊었다가, 그러다 마침내 들어와 앉아요. 요번에도 <열혈남아> 하면서 분위기 안 잡힐 때는 극중에 나오는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를 들고다니며 계속 들었어요. 그런데 나중엔 그럴 것도 없이 딱 들어와 앉았더라고.
-우여곡절이 어쨌든 매번 그 과정을 잘해내시는 거잖아요. 포기한 적은 없으시죠?
=뭘 잘되겠어요. 포기는, 그냥 내가 그럴 수 있는 성격이 못 돼요. 그저 미련스럽게 꾸역꾸역 집어넣으려고 끝까지 애를 써요.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분 중에 <엄마의 치자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굿바이 솔로> 등을 함께 한 노희경 작가가 있으십니다. 노 작가님 작품에서 선생님이 맡으신 배역은 정신적 지체가 있다거나 말을 안 한다거나 연기적인 과제가 무거워 보이는 캐릭터도 많았는데요.
=그런데 노희경 작가랑 나랑 감수성이 잘 맞나봐요. 노희경씨 작품은 아주 쉽게 하고 미영 할머니도 쉽게 했어요. 그런데 할 때는 쉬운데 끝나고 나면 한참 동안 가슴에서 안 없어져요. 이상하더라. 참 좋은 작가예요. 모습이 꼭 안네 프랑크 같아. 이번에도 얼굴이 반쪽이 됐지. 한번 우리 희경씨 맛난 음식 사줘야 하는데.
-<굿바이 솔로>의 미영 할머니는 스스로 말하기와 듣기를 거부한 독특한 인물인데요. 처음 캐릭터를 접하고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그런데, 난 그이가 그리 별나게 보이지가 않았거든요. 나도 때로는 정말 내가 말을 안 할 수 있으면 안 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까지 가니까. 오늘 인터뷰 시작할 때도 난 입 꼭 다물고 있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웃음) 그래서 다른 사람들 생각과 달리 특별한 걱정이 없었어요.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군요. 미영 할머니가 대사가 없는데도 얼굴을 보면 마치 그때마다 아주 구체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혹시 발설은 안 해도 대본에 대사가 주어져 있는 걸까 상상도 해봤습니다.
=그건 아니야. 남의 말을 잘 귀기울여 들으면 대답이 되는 거예요. 내 대사가 없어도 상대방 대사가 나한테 말을 만들어주는 거죠.
-드라마 초반에 “안 돼!”라는 외마디소리는 하셨지만 나중에 미영 할머니가 어떻게 처음 입을 떼실까, 조마조마하면서 기다렸는데 결국 “이뻐!”라고 어린아이처럼 말씀하시더군요.
=나도 그 대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또 하다가, 내 소리에 가장 가까운 소리로 그냥 말해버렸지. 교도소 바닥에 “이쁜 민호”라고 쓰고 무릎 꿇는 장면 촬영을 앞두고는 내가 연기하다 울까봐 걱정이 많았어요. 대본을 처음 읽고도 울었고 분장실에 가서도 또 흐느끼고 있는데 고두심씨가 “언니!” 하며 들어오는 거야. “언니, 우니?” 하기에 “그래, 나 <굿바이 솔로> 때문에 미치겠다. 오늘이 마지막 촬영인데 너무 서럽다” 했거든요. 그랬더니 두심씨가 “어, 희경씨 것 원래 그래” 하면서 한바탕 나를 가볍게 해주고 갔어요. 그러고나니까 이 연기를 할 수 있겠다 싶었지. 한번 걸러진 마음으로, 눈물은 흘려보내고 남은 감정만 갖고 했어요.
-극중에서 민호(천정명)와 미영 할머니는 연인 사이 같기도 했습니다.
=난 드라마 끝나고 천정명씨가 <굿바이 솔로>의 여운을 마음에 더 많이 가져갔음 했는데, 작품 하면서 아팠는지 어느 연예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다른 작품 이야기만 하고 <굿바이 솔로> 이야기를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좀 섭섭했어요. 천정명씨가 민호를 예쁘게 열심히 잘했는데, 혹시 노력에 비해 시청률이 낮아서 서운했나 싶고. 내가 미영 할머니한테 애정이 많으니 다른 배우들도 그랬으면 싶은 거였지. 천정명씨가 이 작품을 오래 귀하게 기억하면 배우로서도 좋을 것 같았어요.
-말씀 들어보면 후배들 연기를 눈여겨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노희경 작가님 말씀을 들어보니, 친하고 마음 쓰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주 보는 게 아니라 가끔 연락해서 결정적인 한마디를 해주시는 편이라고요. 사람 관계에서 중요한 건 잦은 만남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나봐요.
=사람은, 그냥, 다 지나가는 것 같아. 그러니까 만났을 때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이만큼 살다보니 아무리 누군가를 마음에 둬도 보기 힘들 때가 있고 동료들도 작품 같이 안 하면 못 만난다는 걸 알게 되어서 다 이렇게 지나가는 거구나 해요.
테크닉은 홀랑 까먹을 수 있으면 제일 좋아요
-배우는 보통 사람들보다 그런 인식이 더욱 생생할 것 같습니다. 드라마도 시즌에 따라 바뀌고 영화도 촬영하는 동안은 같이 살다시피하다 끝나면 뿔뿔이 헤어지잖아요.
=사람은 다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인정이 없는 건가 싶기도 해요. 계기가 있었지. 2년 전에 내가 한번 일하다가 쓰러져서 다섯 시간쯤 정신을 잃은 적이 있어요. 일이 겹쳐 너무 신경을 쓴 탓이었는데 그 뒤 해방감을 얻은 것 같아요. 챙겨주는 것이 너무나 힘들구나, 그냥 지나가게 버려두고 해줄 수 있을 때에 최선을 다하고, 안 보게 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갈 수도 있구나라고 깨달은 거죠.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이런 말을 했어요. 배우는 일할수록 테크닉이 저절로 몸에 붙는데 테크닉이 늘수록 연기에서 자기를 던지기는 어려워진다고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옳은 말이네요. 테크닉이란 게 꼭 필요한 것인데 무서운 것이기도 해요. 테크닉은 버리는 작업을 더 많이 해야 하는 물건이에요. 어떻게 하면 나한테서 그게 없어지나 고민하는 거죠. 그런 지점을 감독이 딱 집어주면 아주 감사해요. <열혈남아>에서도 이정범 감독이 한 장면에서 시선을 어디 거치지 말고 바로 던지라고 말해주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기껏 터득한 것을 매번 몽땅 버려야 작업할 수 있는 전문직이라니, 배우란 기묘합니다.
=홀랑 까먹을 수 있으면 제일 좋아요.
-나라는 사람 자체가 이 배역을 거치면서 어느 부분 변했구나 싶은 경우도 있습니까?
=<내 이름은 김삼순>이 그랬어요. 그 작품 전까지는 난 이제 늙었으니 어떻게 해야겠다는 상이 있었는데, 김윤철 감독이 굳이 나 사장(삼식이 어머니) 역을 하라는 거예요. 나 사장은 활기차고 꼿꼿한 여자고 그 나이에 맞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내겐 그것이 없는 듯해서 사양했는데 결국 하고 말았지. 첫 촬영에서 언제나 나는 죽을 쒀요. 말도 못하게 NG를 많이 내죠. 처음부터 뭘 찾아야 하는데 안 되고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순 없으니 내버리고 내버리면서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죠. 그러다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나 사장 역을 하면서 내가 조금 젊어졌다고나 할까. 에너지가 많아졌어요. 삼식 어머니 역은 모처럼 내가 더 잘하고 싶어서 옷도 액세서리도 투자하고 준비를 많이 했는데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아서 불만이 좀 있었지. (웃음) 나를 더 보여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나중에 보니 보일 만큼은 다 보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속옷도 안 갖춰 입고 고쟁이 같은 것 입고 자연인으로 연기하는 경우만큼 좋은 건 없어요. 아무 구애도 없이 정말 연기만 할 수 있으니까.
-<너는 내 운명>의 박진표 감독님이 석중 어머니 역을 제의하시면서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영화에 출연해주시면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겠냐고 설득하셨다고요.
=작품이 워낙 좋았어요. 실화라서인지 몰라도 힘이 있었죠.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의의만으로 작품을 고르진 못해도 이런 것은 내가 해야겠다 싶은 표현이 있어요. <굿바이 솔로>에 미영 할머니가 젊어서 남편에게 매맞은 잔등 흉터를 벗어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내가 몸에 살도 있고 해서 부끄러운 일이었는데, 상당히 과감하게 했어요. 오히려 화면에 덜 나왔지. 그래야만 시청자가 극을 더 재미있고 감동 깊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봉사한 거죠. 내가 상처 자국을 보여줌으로써 정말 매맞고 산 사람들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저이도 그랬구나” 하고 같이 나눌 수 있잖아요?
진실하게 표현될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답죠
-<너는 내 운명>이 흥행 성공하고 <주먹이 운다>로 대종상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개봉을 앞둔 <열혈남아>에서는 설경구씨와 나란히 지금까지 출연하신 어떤 영화보다 큰 비중을 짊어지셨습니다.
=점점 일의 가짓수를 줄여서 하나씩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너는 내 운명>이나 <주먹이 운다>는 그래도 자식 이야기가 주였는데 <열혈남아>는 내 이야기가 되다보니 훨씬 나를 힘들게 했어요. 처음에는 내가 전라도 출신도 아니라 사양하고 다른 배우를 추천하기도 했는데 이정범 감독, 설경구씨가 나를 원한다고 하더군요. 대본을 보니 사투리보다 다른 중요한 것이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결심했죠.
-<열혈남아>에서 분한 국밥집 주인 김점심은 재문(설경구)이 복수하려고 찾아온 남자의 어머니입니다. 김점심은 어떤 여자라고 생각하셨어요?
=나 같은 사람이죠. 주어진 환경은 다 자기가 받아들이는. 그러면서도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지. 재문이라는 인물을 사람 만들어볼까 노력도 하고요.
-설경구씨와 주고받는 연기를 하신 건 처음이죠?
=너무 좋았어요. 모를 때는 까다로울 것 같았는데 하나도 안 까다로웠어요. 너무 고맙고, 또 배운 거죠. 어떤 배우는 내가 때리면 한대 맞고 피하기도 하던데 설경구씨는 그 말 듣더니 “아, 그 형은 좀 시원치 않아요” 하면서 얼굴을 들이대더라고. (웃음) 나를 아주 편안하게 해줬어요. 그래서 저 나이 정도는 돼야 뭘 아는구나 생각이 들었지. (웃음)
-선생님은 안경을 쓰면 굉장히 느낌이 달라지세요. 새 작품에 들어갈 때 새 인물의 외양은 혼자서 궁리하세요?
=내가 직접 딸들과 상의해서 많이 하는 편이죠. 그런 센스가 있는 사람이 배우하기가 좋아요. 다만 내 생각이 작가와 안 맞으면 괴롭죠. 한번 인물에 들어가면 나오기가 굉장히 힘들거든. 지금 <소문난 칠공주>의 장모 역을 위해 좀 요란하게 입었는데, 작가 선생님 생각보다 너무 지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고민이에요. 내가 보기엔 하나도 지적이지 않던데. (웃음)
-황정민씨가 나이 들어도 연기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선생님으로부터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배우들에겐 나이 들어도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다는 뜻인 것도 같아요. 오랫동안 연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 배우들은 우선 몸과 마음을 늘 운동해야 하고, 음악도 많이 들으면 좋아요. 배우는 항상 리드미컬해야 하니까. 남의 연기 많이 보고 연극도 영화도 많이 보면 좋아요. 세상을 많이 관찰해야죠. 주변 사람을 하나하나 잘 들여다봐서 표현해야 해요. 더군다나 지금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오래 사는 세상이 됐는데 그분들도 살 권리와 즐거움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같이 건재하면서 재미있게 모두 보여줘야 그분들이 “아, 내 나이에도 이 세상에 온전히 살 수 있구나” 하시죠. 만약 젊은 애들 위주로만 보여주면 “우리는 이제 다 끝났구나” 하지 않겠어요? 나는, 내가 건강하고 모양새가 아주 추해지지 않아 혐오감을 주지 않고, 설령 혐오감을 줘도 거기에 다른 아름다움이 있으면 이 일을 그냥 자연스럽게 계속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요. 대신 욕심이나 야심은 조금 멀리하고. 일하는 작업장이 행복해질 수 있게 먹을 것이라도 사먹이고, 항상 엄마처럼 할머니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돈버는 것도 좋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편하게 나누어 쓰면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고 싶어요.
-연출자가 배우에게 어떤 식으로 요구할 때 제일 막막하십니까?
=구체적으로 딱 집어서 행동을 지시하고 지적하면 막막해요. 그냥 배우한테 맡기고 거기서 행동이 우러나오도록 다른 말만 했으면 좋겠는데, 가끔 그렇게 용감한 연출자들이 있어요. (웃음)
-다음 영화로 광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휴가>가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계약은 안 했어요. 앞을 보지 못하는, 내 실제 나이보다 좀 젊은 어머니 역이죠.
-어쩔 수 없이 여쭙게 되네요. 피부가 어쩌면 그렇게 맑으세요?
=자기 전에 좋은 크림 바르지. (웃음) 농담이고 우리 어머니 닮았어요. 어머님이 계시니까 연기하기 편해요. <주먹이 운다> 할 때도 어머니를 많이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어머니가 그때 마침 편찮으셨는데, 피부가 고와서 아플 때도 해맑아 보이셨거든. 그 모습이 좋아서 마음에 두고 상환이 할머니를 연기했어요. 엄마는 당신이 많이 받는다고 하시지만 내가 받은 것이 더 많아요.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셔서 어머니의 모습을 잘 표현하시나봐요.
=아냐, 많이 사랑하진 못해. 어머니도 그냥 지나가는 거야. (웃음)
-인간이 어떤 때 제일 예뻐 보이고 어떤 때 무서워 보이세요?
=진실하게 표현될 때 아름답죠. 배우나 보통 사람이나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표현이 그 사람한테서만 나올 수 있을 때 그 순간이 참 아름다워요. 이 나이 되니까 그리 무서운 건 없어. 그렇다고 마냥 가여운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싶어요.
-현실의 삶은 오히려 순간순간 진심이기가 어렵잖아요. 그러나 배우는 연기할 때는 매 순간 진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없으니, 현실보다 더 밀도 높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죽을 맛이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 배우가 좋은 거죠. 자기를 자꾸자꾸 여과시킬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