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배역으로 기억되는 그날까지, <구타유발자들>의 차예련
2006-06-02
글 : 장미
사진 : 이혜정

차예련은 카메라 앞에서 노련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인사를 건네며 수줍어하던 소녀는 없었다. 그녀는 팔과 다리의 방향을 비틀고 시선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모델 생활의 결과다. “그 미소 좋아요.” 사진기자가 칭찬하자 낮은 웃음을 터뜨린다. 여러 번 배경을 바꾸고 소품으로 의자를 넣었다 빼면서 촬영이 길어졌다. 차예련은 끝까지 노련하고 능숙하다.

모든 카메라 앞에서 능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배우로서 두 번째 출연작인 <구타유발자들>에서 차예련은 모든 사건의 빌미를 제공하는 음대생 인정으로 출연했다. 상대에게 당하기만 할 것처럼 순진해 보이지만 상대를 이용할 줄 아는 약은 면도 있는 인물이다. 인정이 가진 속물적인 이중성은 시나리오보다 영화에서 구체화됐다. 차예련 본인도 시나리오만 읽었을 때는 “그저 착한 여자이기만 한 것 같아서” 현실감도 떨어지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촬영 중에 원신연 감독이 시나리오를 조금씩 수정하면서 인정의 이중성이 좀더 구체화됐고 그녀도 인정을 알아가는 동시에 빠져들었다. 모델 차예련을 담는 카메라가 아니라 배우 차예련을 담아내는 카메라 앞에서 그가 가장 어려움을 느꼈던 순간은 늘 두들겨맞는 왕따 학생 현재(김시후)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고 소리 지르는 대목이다. 인정은 현재에게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면 악순환의 고리는 끊을 수 없다고 말해주고자 한다. 차예련은 당시 인정의 심리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어려워서 단순한 대사조차 외워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촬영장의 선배 배우 오달수가 불쑥 물었다. “연기가 뭐라고 생각하냐.” 대선배 앞에서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 “연기는 연기다”라고 답을 했다. 선배 배우는 그에게 “연기란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 말을 가슴에 담고 난 차예련은 고민했던 장면의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구타유발자들>에 출현한 배우는 오직 여덟명. 차예련은 한석규, 이문식, 오달수 등 충무로의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과 함께 크레딧에 주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차예련은 지난해 <여고괴담4: 목소리>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지만 아직까지 정식으로 연기를 배우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구타유발자들>은 제대로 된 연기 수업이었을 것이다. 오랜 경륜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몸놀림, 손짓, 말투, 눈빛 등을 그는 현장에서 유심히 지켜보았다고 했다. 경험에서 우러난 가르침을 선배들이 건네줄 때 그녀는 그것을 자기 연기에 녹여내려고 애썼다.

차예련이 <구타유발자들>에 합류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녀의 데뷔작 <여고괴담4…>이다. 귀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사는 날선 눈매의 여고생 초아의 모습을 보고 원신연 감독은 그녀를 캐스팅하게 되었다고 한다. 묘한 구석을 지녔다는 점에서 두 캐릭터는 닮아 있다. <여고괴담4…>에 없던 여성적인 모습을 <구타유발자들>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에 추가한 차예련은 “전도연 선배가 좋다”고 했다. “어느 영화에서나 배우 전도연이 아니라 해당 배역으로 기억되니까요.” 그는 다음 영화인 귀여니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주인공을 맡을 예정이다. 두 번째 출연작에서 받은 선배들의 가르침을 홀로 실천해야 할 때가 왔다. 모델 출신 차예련이 아닌 해당 배역의 인물로 기억될지는 이제 그녀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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