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호로비츠를 위하여>로 다시 모성 연기에 도전한 배우 엄정화
2006-06-05
글 : 정재혁
사진 : 오계옥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지수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혜진과 닮았다. 당당하고 발랄하지만 변두리(혹은 시골)지역으로 떠밀리듯 이사오는 캐릭터. 자신만은 그 곳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들의 인간다움에 마음을 여는 지수와 혜진. 이 두 여인은 어딘가 모르게 엄정화와도 비슷하다. <눈동자>를 부르며 섹시하게 도발했던 그녀는 KBS 드라마 <아내>에서 한 남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여인을 연기했고, <오로라 공주>에서는 (뒤틀린 방식이긴 했지만) 딸에 대한 끔찍한 모성을 보여줬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를 통해 다시 한번 ‘색다른 모성 연기’에 도전한 엄정화,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머리가 짧아졌다. 영화 촬영 끝나고 자른 건가.
=그렇다. 나는 항상 영화가 끝나면 머리를 자르는 버릇이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끝내고도 아멜리에처럼 싹둑 잘라버렸다. 스트레스 해소인 것 같다. 이번에도 아직 다음 작품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머리를 잘랐다. 처음엔 윗머리를 다 쳐셔, 기자님보다 더 짧았다. 근데 이게 안 되겠더라. 그래서 자르던 중에 스톱하고 집에 왔다. 이러다가 맹구가 될 것 같았다. 위는 짧고 다른 데는 기니까 머리가 서로 연결이 안 돼서 다른 머리 스타일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커트를 한 거지.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선 양옆이 불룩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나왔다. 가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처음 보는 스타일이다.
=선생님처럼 보여지길 원했다. 옆이 좀 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아노칠 때는 옆모습이 중요하지 않나. 근데 그 장면은 참 안 예쁘게 나왔다. 내가 피아노칠 때, 박용우씨가 보고 반하는 장면 있지 않나. 앞모습을 보면 너무 못생겼다. 나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웃음) 옆모습은 괜찮게 나왔는데, 앞모습은 반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시나리오는 언제 처음 받았나.
=지난해 9월에 받았다. 영화가 11월에 크랭크인했으니 참 늦게 받았지.

-출연을 빨리 결정했다.
=그 당시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하고 있어서 시나리오 볼 겨를이 없었다. 근데 유하 감독님이 계속 전화하셔서 네가 꼭 해야 할 시나리오가 있다고 하시더라. 전화로 20분 동안 통화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건 굳이 내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냥 평범한 여자고,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시나리오를 나에게 늦게 준 것도 좀 불만이었다. 의재(영화에서 경민 역을 맡은 아이)는 1년 전에 주고 나는 왜 이제 주는지. 그거 때문에 삐쳐 있었다. 혹시 다른 배우를 기다렸던 건 아닐까 하고. (웃음)

-일반시사할 때, 처음 피아노를 치는 장면(베토벤의 <황제>를 연주한다)에서 관객이 ‘오우~’하더라.
=피아노는 정말 배운 적이 없다. 친구들은 학원도 많이 다녔지만, 우리집은 엄마 혼자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배울 수가 없었다. 2, 3개월 안에 그냥 외웠다. 하니까 외워지더라.

-<오로라 공주> 때에는 직접 크레인 연습도 했다고 들었다.
=연습을 하긴 했지만, 촬영시 직접 내가 크레인 운전을 하진 않았다. 그냥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했다. 직접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그게 연기처럼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경민 역을 맡은 신의재와는 어떻게 연기했나. 별로 어른들을 잘 따를 것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 (웃음)
=실제로도 그렇다. 내가 의재한데 맞춰줘야 했다. 친해져야 했고, 잘 보여야 했다. 일단 얘가 날 좋아해야 하니까, 초반에는 거기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같이 앉아 있어도 의재 눈치보고. (웃음)

-처음엔 서로 서먹서먹했을 텐데, 의재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는가.
=순간이라기보다는 그냥 지내면서 느껴지는 게 있다. 의재가 눈을 마주치면 귀여운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 나한데 짓는 표정과 분장팀한테 짓는 표정이 다르다. 영화 중에서 시냇물 소리, 나비, 오리 등을 소재로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웃는 장면이 있지 않나. 어느 순간 나에게 그 표정을 하더라. 그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게 나에 대한 의재의 애정표현인 것 같고.

-의재를 떠나보내고, 피아노 앞에 앉아 혼자 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나는 촬영을 할 때 진짜 감정까지 못 가면 매우 힘들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괜찮다고 해도, 내가 아니면 너무 괴롭다. 근데 그때 그 장면은 진짜인 것 같은 감정이 들었다. 거의 마지막 촬영이었고, 그냥 지수의 감정이 그대로 나에게 왔던 것 같다. 의재가 마시던 컵을 보고,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보았을 때, 나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 순간에 사람들이 그냥 엉엉 울 것 같진 않더라. 예전에 수진이라는 아이를 입양해서 키워보는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다. 그때도 헤어지는 순간에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가슴 아팠다, 많이.

-그 프로그램은 얼마 동안 찍은 건가.
=15일. 그 아기가 온 다음에는 모든 게 아기 위주로 돌아갔다. 집 안의 모든 걸 다 치워야 했다. 하루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이가 깨어 있더라. 나랑 눈이 마주쳐서 웃는데, 정말 어떻게 그렇게 웃어? 눈썹도 예쁘게 위로 올라가서. 또 생각나.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한번은 걔를 데리고 병원에 갔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 엄마랑 있는 거다. 나는 이 조그만 아이가 이런 아픔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박용우의 웃음소리는 어땠나.
=촬영할 때는 참 시끄러웠는데(웃음), 박용우씨 분량 끝나고 나니 참 허전하더라. 많이 아쉽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만나보고 싶다.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마누라 죽이기> 이후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다.
=시나리오가 매우 좋았다. 어려운 장면들이 많을 것 같아서 망설이기도 했지만,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유하 감독님이 연출하신 두 작품의 시나리오를 모두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엄정화는 유하 감독의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도 출연했다). 감독님이 “시나리오 볼래?”라고 하시는데 정말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내가 배우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준 영화인 것 같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는 어떻게 출연한 건가.
=유하 감독님이 나에게 “너는 오렌지족처럼 생겼는데, 눈은 되게 착하다”고 하시더라. 근데 나는 완전 시골 사람이다. 당시엔 시골에서 서울 올라온 지 딱 1년 정도 됐다. 감독님이 나를 많이 긍정적으로 봐주신 것 같다. 아마 내가 마음에 딱 드셔서 캐스팅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나를 인간적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많이 도와주셨다.

-영화를 고를 때 순서를 중요시하나.
=순서라, 그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시나리오가 들어와주지 않는다. (웃음) 하지만 비슷한 것을 또 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 다음 영화가 또 휴먼드라마라면 안 할 거다. 나에 대해 섹시하다, 귀엽다, 당차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변신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로라 공주>는 순서를 고려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냥 좋은 영화가 있다면 하자는 식이다. 순서를 고려할 정도로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오지도 않고.

-시나리오는 많이 받을 것 같은데.
=예전에 비하면 많이 받는다. 요즘엔 베고 잔다는 말을 하기도 하니까. (웃음)

-얼마 전 오락 프로그램 <야심만만>에서의 멘트 때문에 화제가 됐다.(‘나는 이럴 때 변태라고 느낀 적이 있다’라는 질문에 ‘남자가 다리를 벌리고 있으면 그곳만 본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나 변태다. (웃음) 그냥 그런 프로는 웃고 지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크게 반응하는 부분도 있다. 그냥 분위기 탄 거다. 그 얘기는 예전에 여자들끼리 이야기할 때 많이 들었던 거라 반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솔직한 편이기도 하고.

-MBC 합창단으로 데뷔했다. 예전엔 배우보다 가수가 더 되고 싶었나.
=그건 아니다. 배우도, 가수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전엔 내가 연예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연기는 하고 싶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뛰어난 미모로 캐스팅된 것도 아니라.

-그래도 어릴 때 동네에서 예쁘다고 소문나지 않았나.
=그랬다. 충북 제천에서는. (웃음) 내가 사람들 시선받는 거 매우 좋아한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들국화 콘서트 보러 상경했는데, 예쁜 애들이 너무 많더라. 시골에선 내가 밖에 나오면 다 쳐다보는데, 여기선 아무도 관심이 없고. 너무 슬펐다. 다신 서울에 안 갈 거라고 다짐했었다. (웃음)

-들국화 콘서트를 보러 혼자 서울에 갔나.
=그렇다. 내가 음악 듣는 걸 매우 좋아했다. 아바나 올리비아 뉴턴 존 등. 고등학교 때까지 합창단을 하기도 했고. 노래하면서 돈도 번다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수로 데뷔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 운명인 것 같다.

-9집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번달부터 녹음에 들어간다. 8집 때는 ‘롤러코스터’의 지누가 한곡을 해줬는데 이번에는 프로듀싱을 한다.

-8집 앨범을 들었을 때, 기존에 했던 댄스 음악에서 굉장히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집 앨범을 낼 당시, 뭔가 굉장히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힙합 음악을 할 순 없지 않나. 클럽 음악으로 가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때 한창 듣고 있던 음악들도 그런 거였고. 그러나 8집 앨범은 좀 무거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했던 음악과 좋아하는 음악을 잘 섞을 거다.

-댄스도 할 예정인가.
=그럼, 댄싱퀸인데. (웃음) 하지만 많이 어렵게 가진 않을 거다.

-체력적으로 변화를 느끼진 않나.
=인터뷰 여기서 그만 끝내죠. (웃음) 그렇진 않다. 운동을 안 했다면, 그럴 수도 있을 텐데. 체력 단련을 꾸준히 하니까 괜찮다.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가면 숨이 찰 것 같긴 하다. 그래서 평소에 유산소 운동을 많이 한다.

-영화쪽에서 먼저 접근해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사람은 없나.
=많다. 배우는 너무 많다. 전도연씨, 장진영씨 등이랑 모여서 여자들 얘기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황정민씨, 감우성씨, 다 같이 해본 사람들이네. (웃음) 정말 다시 만나서라도 같이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배우로서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그냥 믿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저 배우가 나온 영화는 항상 재밌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을 줄 수 있는 배우.

-다음 작품이 <미스터 로빈 꼬시기>라고 들었다.
=로맨틱코미디다. 재밌어서 선택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리만족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많이 궁금해하는 부분들을 해결해줄 수 있을 거다.

장소협찬 루머루즈·스타일리스트 성문석, 이미화·의상 질 스튜어트, 송자인·신발 향(청담점)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