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표현’의 욕망이 나를 밀어간다, <세이예스> 김주혁
2001-08-29
글 : 박은영
사진 : 정진환

첫 촬영 때 뒤집힐 수도 있었다. 조연출의 추천으로 <세이예스>팀에 합류한 김주혁이 내심 불안했던 김성홍 감독은 “첫 촬영까지 지켜보고, 아니다 싶으면 자르자”고 했단다. 뚜껑이 열리자마자 거의 만장일치로 김주혁이 남아야 한다,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김주혁은 뒤늦게 이 얘기를 전해듣고 “아찔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이 영화를 놓칠 뻔한 것이다. 남들은 왜 그렇게 힘든 영화를 데뷔작으로 골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지만, 그는 “영화가 이런 거구나”라고 실감하게 할 만큼 난이도가 있는 작품을 만난 것을 더없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김주혁이 연기한 정현은 살인마 M의 표적이 되는 인물. 작가의 꿈이 실현된 것을 자축하며 아내와 겨울바다로 여행을 떠났다가 이유없는 추격과 고문과 살해위협을 가하는 M에게 분노로 맞선다. 뜀박질에 물고문에 구타로 그의 몸은 촬영 내내 고달팠지만, 정작 가장 어려웠던 건 “인간의 이중적인 본능”을 표출해야 했던 내면연기라고. 아내를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였다가 M의 출현으로 갑자기 강해지는데, 그런 변화과정이 조금 혼란스러웠고 스스로 덜그럭거린 것처럼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한다. “정현이라는 인물이 드러나보이지 않길, 그냥 관객의 한 사람으로 느껴지길 바랐어요. 멋있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버렸고. 영화 보면,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지잖아요.” 특히 극 막바지에 병실에서 M과 결투하는 장면은 실제로 촬영 끝무렵에 찍었는데, 한신 찍고 한참 쉬어야 할 만큼 에너지를 많이 소진했다. “신 마칠 때마다 완전히 녹초가 됐는데, 그렇게 온몸을 다 던진 듯한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나나 보는 이나 가짜라고 느꼈을 거예요.” 영화 분위기에 따라 침울해지는 현장을 풀어보기 위해 틈틈이 박중훈, 추상미와 나눈 ‘농담 따먹기’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김주혁의 캐스팅 소식과 함께 노출된 공식적인 프로필에는 ‘탤런트 김무생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지 않겠다는 김주혁의 의사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만일 내가 아버지???와 쇼프로에 들락거렸다면, 지금 여기 없었을걸요.” 배우를 결심하게 된 데도, 일과 가정을 정확히 분리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버지의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오버하다가 “왜 그리 진지한 구석이 없냐”는 말에 가슴속에서 ‘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뒤로 생활 속에서 해내지 못하는 ‘표현’에 대한 욕심을 따라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김주혁은 동국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연극을 하다가 98년 SBS 공채로 탤런트가 됐다. <흐린날에 쓴 편지> <카이스트> <사랑은 아무나 하나>가 대표작. 영화가 될지, TV드라마가 될지 모를 차기작의 선택은 아직 미뤄둔 상태. 지금까지처럼 차근차근 풀어가고 싶어서다. 한 인간의 인생 역정을 그린 영화를 언젠가 꼭 해보고 싶다고. 당장 <세이예스> 이후에 어떤 영화를 만나고 싶은지를 물으니, 내내 진지하던 얼굴이 약간 풀어진다. “피없는 영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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