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처음부터 다빈치 코드는 없었다, <다빈치 코드>
2006-06-07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허망한 음모론에 허우적대는 <다빈치 코드>

만일 당신이 이 글을 노트북으로 읽고 계시다면 www.louvre.fr에 접속한 다음 뜨는 세개의 창 중에 맨 왼쪽에 있는 ‘da Vinch code sound walk’을 클릭하시라. 그러면 장 르노의 음성과 함께 장엄한 사운드트랙이 깔리면서 당신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앞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 그림의 주인공은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우아한 초상화이며, 회화 사상 가장 오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여인이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그 음성에는 몇 가지 비밀이 있다. 그건 이 글을 다 읽은 다음에 알려줄 생각이다.

우선 나쁜 소식.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론 하워드의 <다빈치 코드>는 독후감이라기보다는 다이제스트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만족스럽지도 않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댄 브라운의 소설을 읽지 못했다(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영화와 소설을 비교할 생각이 없으며, 이 글은 전적으로 영화만 보고 난 다음 영화에 한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칸영화제 개막식인 5월17일 오후 8시40분에 드뷔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리베라시옹>과 <르몽드>의 표현을 빌리면 ‘그나마’ 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재미있다고 한다. 또 같은 날 뉴욕에서 이 영화를 본 <롤링 스톤>의 피터 트래비스는 소설보다 영화가 재미없다고 시종일관 툴툴대는 평을 썼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생각이다. 그 다음 좋은 소식. 시종일관 지나치게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다빈치 코드>를 보기 위해서 당신이 구태여 예수회의 그 복잡한 계보와 그에 얽힌 중세의 역사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들의 판본을 따로 공부할 필요는 없다(그건 소설도 그렇다고 한다). 게다가 중간중간 설명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때는 예수 박해에서 중세를 거쳐 십자군 원정에 이르는 스펙터클 장면들이 할리우드 에픽영화들의 발췌본처럼 인서트 숏으로 여기저기 슬쩍 끼워져 있다. 장엄한 원형 이판본 디지털 성서. 그런데 이 장면들은 이상할 정도로 론 하워드보다는 리들리 스콧이 와서 찍은 것 같아 보인다. 특히 <글래디에이터>와 <킹덤 오브 헤븐>. 말하자면 이 영화는 소설에 대한 일종의 ‘알기 쉬운’ 그림책 판본이다. 문제는 음모까지도 구구절절 말로 모두 설명해주기 때문에 추리라고 할까, 혹은 지적 게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소설 보듯이 영화를 볼 것. 혹은 라디오 드라마를 들을 때처럼 한껏 귀를 세우실 것. 같은 말이지만 자막을 놓치지 말 것.

마술을 거는 듯한 배우들의 몸짓 흉내

하지만 소설과의 비교는 여기까지이다. 그 다음. 소설의 행간을 지나 영화의 프레임의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이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인데 여기에는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옮긴다는 것 이상의 큰 문제가 버티고 있다. 댄 브라운은 문장 안에서 피해갈 수 있었지만 론 하워드는 껴안을 수밖에 없는 눈앞에 존재하는 질료로서의 대상. 질문은 이 책 제목에 담겨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의 작품 속의 (그런 게 있다 치고) 숨겨진 (혹은 숨겨져 있다고 가정된) 코드. 그런데 그 코드는 어디에 담겨 있는가? 인물. 즉 초상화.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다빈치 코드>는 어쩔 수 없이 초상화로서의 영화이(어야 했)다. 이 말은 비유법으로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외양의 영화. 만일 소피 느뵈가 끝내 예수의 손녀라고 설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소설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그저 단 한 문장, 그렇게 보인다, 라고 써넣으면 된다. 그러면 그 다음은 독자들 각자의 믿음만큼 행간 사이에서 보일 것이다. 미메시스의 마술. 그러나 영화의 존재론은 그것이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이건 론 하워드의 영화이건 동일한 인과율로 활동한다. 그림에서 대상으로서의 모델은 자기 안에서 드라마를 담아내지만 영화에서는 드라마 안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 영화의 스타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들과 경쟁해야 한다. 다빈치의 코드는 그림 안에서뿐만 아니라 인물들 속에서 활동하는 코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빈치 그림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외양을 갖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톰 행크스는 대사가 너무 많아서인지 시종일관 시무룩한 얼굴이고, 오드리 토투는 자기가 정말 예수의 손녀라고 믿어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귀여운 아멜리에의 표정은 말끔하게 증발되었다. 상반되는 얼굴의 초상화. 할리우드 스타로서의 톰 행크스에 머물면서 단 한번도 그 자신을 상징기호학자라는 믿음을 주지 못한 리처드 랭던. 인물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할리우드 스타. 차라리 과묵한 인디아나 존스에 가까운 성배의 수호자 혹은 지나치게 덩치가 큰 프로도(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성배에 대해서 리처드 랭던은 단 한번도 탐욕을 내지 않는다). 그 반대로 자신이 예수의 손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를 포기해야 하는 아멜리에. 그런 다음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흉내내기 위해 가져야 하는 도상적 외양. 성스러운 피를 물려받은 여인. 우리가 이제까지 성배(聖杯)라고 알고 있었던 여인. 물(物)로서의 페르소나. 그녀의 먼 어머니 막달라 마리아, 먼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말하자면 여기서는 할리우드 스타 톰 행크스와 창백한 아멜리에가 리처드 랭던과 소피 느뵈 혹은 ‘성스러운 피’를 흉내낼 뿐이다. 더 나쁜 것은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할 이안 매켈런은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와 리 티빙 경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성배의 주인(공)을 찾기 위한 성배 원정대인 이 커플의 안내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훼방꾼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런 역할이다. 문제는 그게 너무 눈에 띄게 오락가락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안 매켈런은 거의 마술을 거는 듯한 제스처로 이 황당무계한 음모론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그 장황한 제스처는 두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미스터리의 플롯에서 해결의 국면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별 다른 기복없이 드라마를 바꿔친다. 만일 이 영화에 특수효과가 있다면 그건 이안 매켈런이다. 론 하워드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우리의 집중을 흩뜨려놓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자동차 추격전 장면을 들이밀다가 리 티빙 경의 해설이 시작되자 그 긴 해설을 내내 귀기울여 듣는다.

아르데코 장식으로 타락한 다빈치의 작품들

두 번째 질문. 21세기 할리우드영화들은 더이상 미국에서는 음모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다. 혹은 투명사회로서의 미국. 그러므로 할리우드영화에는 두개의 세상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행복한 홈 코미디의 사회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온갖 재난과 음모로 넘쳐나는 미국 바깥이다. 올 여름 이단 헌트는 그의 ‘미션 임파서블’을 황량한 베를린 공장지대에서 뒤집어쓰고 고색창연한 로마 바티칸 궁전으로 향한다. 그런 다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가 과거와 공존하는 휘황찬란한 상하이로 간다. 로케이션이 보여주는 트랜스 내셔널리티의 알레고리들 혹은 미국의 전 지구적 감각의 내면적 외재화(여기에 대해서는 <씨네21> 554호 전영객잔에 김소영이 <미션 임파서블3>에 대해서 쓴 ‘엔터테인먼트가 된 하이테크 군사전’을 읽어보실 것). 하버드대 상징기호 학자 리처드 랭던은 갑작스러운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파리와 런던 혹은 루브르 박물관 앞 입구에 놓인 피라미드에서 시작해서 먼 길을 돌아 다시 이 피라미드로 돌아오는 기나긴 모험에 뛰어든다. 하지만 <다빈치 코드>는 이단 헌트와 매우 가깝게 있으면서도 할리우드의 하이테크한 특수효과로 재현할 수 없는 역사적인 건물과 그 안에 걸려 있는 그림과 장식들을 동원해서 일종의 드라마에 세워진 병풍, 레오나르도 다빈치식으로 말하자면 스푸마토(sfumato)적인 분위기로 미스터리를 감싼다. 이때 영화의 로케이션은 그 예술품들이 자리하고 있는 건축물들의 역사적 구체성을 잃고 드라마 표면의 아르데코적인 장식의 미장센으로 타락한다. 리차드 랭던과 소피 느뵈는 쫓고 쫓기면서 박물관과 성당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장면들을 따라가면서 점점 파리와 런던을 연결하는 미술관 관광 가이드 안내자에 가까워진다. 그때 <다빈치 코드>는 갤러리를 어떻게 찍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표현주의영화 이후 미술이 직접적으로 영화 안으로 들어온 미장 갤러리(mise-en-galerie)의 화면. 일종의 룩(look)의 영화. 하지만 다빈치의 위대한 예술품들이 고작해야 아르데코적인 장식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은 비통한 일이다. 혹은 론 하워드는 그 예술품들을 감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감상의 지체된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예술적 감흥이 다름 아닌 다빈치 코드의 출발점이 아닌가? 이것이 두 번째 질문에 기댄 내 세 번째 질문이다.

그러므로 내 개인적인 세 번째 질문. 사실 내가 <다빈치 코드>를 보러 간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들을 좀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를테면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하면 <모나리자>를 보러 찾아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 유명한 그림 앞까지 내내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저 그것만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도착한 다음부터가 문제다. 그 앞에 서면 거의 시장바닥이다. 서로 보겠다고 파리 떼처럼 달라붙어서 본다. 하지만 그 그림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작고(77x 53cm) 게다가 빛 아래서 그림의 훼손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간접 조명 아래 배치한데다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도판들은 원본보다 채도와 명도를 밝게 인쇄해서 실제로 보면 전체적으로 매우 어둡고 은밀하게 보인다(내가 갖고 있는 다빈치의 네권의 도판본들은 모두 그렇다). 여기에 더해서 다른 그림들보다 훨씬 더 멀리서 보도록 줄까지 쳐놓아서 아비규환을 제치고 모나리자 뒤에 있는 그 디테일들을 보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매우 실망스럽게 <다빈치 코드>에서 모나리자의 그림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탄식하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은 로맨스도 없이 아버지와 딸처럼 손을 붙들고 오직 다빈치의 상자를 여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하기는 생명이 위급한 그들에게 그림을 보면서 그 자리에 서 있기를 기대하는 내가 나쁜 놈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할리우드의 돈을 빌려 무엇보다 정말 보고 싶은 그림은 <최후의 만찬>이다. 말하자면 (내 생각에) 회화에서의 <시민 케인>. 또는 루이스 브뉘엘의 <비리디아나>에서 비루하고 천박하며 탐욕스럽고 고마움도 알지 못하는 12명의 거지들로 재현된 12사도들의 토할 것만 같은 웃음으로 가득 찬 만찬. 매우 슬프게도 이 한점의 그림을 보기 위해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까지 갈 호사가의 여유를 나는 갖지 못했다. 물론 위대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이 성당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시간의 부식 속에서 이 그림을 지키려는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프레스코화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하게 부서져가면서 수명을 다해가는 이 애처로운 그림을 그 벽 앞에 선 듯이 나를 대신해서 할리우드의 최신 장비로 무장한 카메라와 성당 전체를 간접조명으로 밝힐 수 있는 어마어마한 조명으로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가서 마치 내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여주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런 다음 460x880cm밖에 안 되는 이 그림을 대형극장의 가장 좋은 프로젝터로 영사하는 스크린 위에서 어마어마하게 크게 볼 수만 있었다면 나는 이 믿을 수 없게 지루한 이야기의 모든 것을 용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바람은 간단하게 배신당했다. 물론 소설을 읽지 않은 내 잘못이다. 리처드 랭던과 소피 느뵈는 밀라노에 가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사실 리처드 랭던과 소피 느뵈가 성배에 관한 비밀을 알기 위해 리 티빙 경의 성을 방문했을 때부터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리 티빙 경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처럼 화면을 띄운 다음 해설을 시작한다. 지속적인 훼손과 잘못된 복원, 역사의 상처, 원본에 대한 수많은 연구. 만일 이 그림의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다빈치가 아니라 어쩌면 후대의 복원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코드’를 숨겨놓은 왜상이 있었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리 티빙 경도, 리처드 랭던도 <최후의 만찬>의 복원 판본에 대해서 전혀 의심이 없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거기 인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서! 게다가 슬프게도 성배 전문가인 리 티빙 경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해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전문적이다. 우선 리 티빙 경은 이 그림이 마치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설명한다. 이를테면 자크 라캉이 1964년에 행한 그의 열한 번째 세미나 “정신분석의 기본적인 네 가지 개념”에서 ‘소문자 타자 a로서의 시선에 대하여’라는 토픽 아래 진행된 7장 아나모르포즈(L'anamorphose)에서의 설명. 혹은 그 설명의 대중적 판본인 슬라보예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에서 히치콕을 끌어들여서 덧붙인 잉여지식의 해설. 말하자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본다는 것.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 자체적으로 이중화되고 이중 거울놀이에서처럼 끊임없이 자체 내에서 반영되기 때문이다. (중략) 이처럼 모든 것은 여전히 전과 다름없는 똑같은 상태인데도 전혀 다른 각도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빈치 코드>에서 이 모든 것의 비밀인 <최후의 만찬>을 놓고 설명하는 장면을 다시 한번 보자.

마리아일지도 모른다고 지명된, 예수의 (우리가 바라보는) 바로 옆 왼쪽에 앉은 사람은 요한이다. 그 바로 옆에 약간 고개를 뒤로 한 다음 기댄 이가 예수를 판 유다이다. 그리고 요한과 유다 사이에 끼어들어서 요한에게 손을 올려놓은 이는 베드로이다. 기록에 의하면 다빈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놓고 가장 망설였다고 한다. 한 사람은 물론 예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면서 삶의 선생님이지만 그를 팔아넘긴 유다였다. 그리고 그를 찾기 위해 다빈치는 밀라노의 거지들을 찾아 다녔으며, 프레스코화였음에도 유다를 세번에 걸쳐서 고쳐 그렸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자, 그리고 역사에서 가장 저주받은 운명.

요한은 어디로 갔나

리 티빙 경의 주장을 들은 다음 내가 즉각적으로 이상하게 생각한 점은 두 가지이다. 만일 그가 요한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면 도대체 요한은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가설은 두 가지이다. 잠시 이 장면에서 요한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림이지 사진이 아니다. 두 번째. 그러면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였는가? 말 그대로 동명이인.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쓴 사람은 누구인가? 혹은 요한계시록이 사실은 마리아 계시록이었던 것일까? 이 마지막 만찬의 순간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사이의 암호가 아니다. 그냥 누구나 알고 있는 일종의 교양이다. 그런데 자기 입으로 가톨릭 신자라고 말한 리처드 랭던은 왜 요한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을까? 그는 요한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면 그는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이 그림을 단 한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까? 그런데 리처드 랭던은 동서고금의 상징과 기호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하버드대 교수이다.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 아니면 그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그 가설을 리 티빙 경과 공유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 설명을 듣기 위해 뭐 하러 여기까지 오나?

그 다음.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라면 요한복음 13장16절에서 29절까지를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 유다에게 돈에 팔려 죽으러 가는 길임을 알리는 슬픈 이별의 문장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만찬에 대해서는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마가복음,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그 구절을 다른 복음과 어떻게 달리 읽어야 할까? 리 티빙 경은 마치 성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다빈치의 그림으로 설명한다. 좋다. 하지만 그것이 요한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면, 혹은 동명이인이라면, 그래서 예수의 품에 안기는 모티브가 중요했다면 구태여 시온 종교회에서는 다빈치의 그림을 끌어들이는 대신 플로렌스에 있는 모자이크 버전의 <최후의 만찬>이나 볼테라 성당에 있는 <최후의 만찬>으로라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미 거기에는 예수의 품에 안기는 그림들이 있다. 이 그림들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전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또한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요한’복음 13장23절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는 구절도 있다. 이미 그런 그림들과 문구가 존재하는데 왜 다빈치는 구태여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요한을 베드로와 얼굴을 맞대고 유다 곁에 앉힌 것일까? 즉 내 질문은 요한을 그렇게 오려내서 옮겨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을 오려내는 순간 그 자리의 의미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잘 알려진 것처럼 이 그림은 예수가 마지막으로 만찬을 먹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이 핵심이 아니다. 다빈치는 여기서 ‘만찬’이 아니라 ‘최후’라는 순간의 장면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이전의 <최후의 만찬> 그림들과 결별하는 지점이다. 이 자리에서 마침내 예수는 자신을 팔아넘길 배신자의 존재를 말한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마태복음 26장21절), 그래서 그들은 극도로 슬퍼 그들 한 사람씩 주여, 그게 저입니까?(22절)”라고 물었던 바로 그 순간. 그때 예수의 말씀이 이 열두명의 제자들로 하여금 동요하게 만든다. 그들은 일시에 놀라서 술렁거리지만 그 가운데 계신 예수만이 그 어떤 동요도 없이 앉아 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의 식탁 위에 흐트러진 접시와 빵과 달리 예수 앞에 놓인 거의 멈춘 듯이 가지런한 빵과 접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식탁 위에 올려진 두손. 그때 제자들은 그 전체이자 동시에 네개로 나뉘어져 있으며, 동시에 그 네 모임은 각자의 놀라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선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의 왼쪽에 요한과 베드로, 그리고 유다가 있다. 그 곁에 차례로 안드레와 그에게 손을 올려놓은 작은 야고보, 바돌로매가 앉아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큰 야고보가 앉아 있고, 그 뒤에 의심을 품은 도마와 질문을 하는 빌립이 있다. 맨 오른쪽에는 마태와 다대오가 놀라서 시몬과 말을 나누고 있다. 이 말씀의 충격은 예수를 중앙에 두고 원근법처럼 양옆으로 갈수록 감정의 격랑이 커지고 있다. 이때 (내 생각에) 이 장면의 핵심은 예수를 판 유다이다. 이 마지막 판본에 대해서는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위해서 그린 초판본과의 차이에서 좀더 분명해진다. 다빈치는 배신하고 그 모두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을 유다의 죄의식을 무시무시하게 그린다. 그것이 끔찍해지는 것은 가장 어두침침하고 보잘것없게 그려진 유다 바로 옆에 마치 <바위의 동정녀>(1506∼08년 판본이 아니라 1483∼86년 판본)처럼 비스듬히 머리를 왼쪽으로 기대고서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있는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요한의 누구보다도 환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이 그 옆에서 두개의 희생을 중재하고 있다. 영원한 축복을 누릴 희생과 영원한 저주의 운명에 떨어질 희생. 그때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요한을 잘라내서 예수의 맞은편에 붙였을 때 유다의 의미는 사라진다. 혹은 만일 그 자리에 놓게 되면 가장 의심이 많았던 도마를 그 말씀의 순간에 예수 바로 옆에 앉힌 다빈치의 의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빈치 코드>에 없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댄 브라운은 다빈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가 아니라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문제가 된 것이다.

내게서 사실상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났다. 나머지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 이 이야기는 머리가 나쁘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아이작 뉴턴의 암호는 즉시 풀렸고, 등장인물 중에서 1인2역이 아닌 사람은 오직 리처드 랭던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리처드 랭던이 끝내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집에 단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으며,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영화 첫 장면이 시작되었던 루브르 박물관 앞으로 한밤중에 돌아와 그 피라미드 위에서 깊은 탄식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그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는 시종일관 인류 문화유산을 부수고(이 사람 인류 문화의 상징을 연구하는 사람 맞아?), 훼손시키고, 무단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아무 때나 가고 싶은 시간에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간다. 유럽은 할리우드의 새로운 세트장이다. 할리우드 모험영화들은 당분간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이라크에 주둔 중인 미군들도 당분간 집에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아, 참. 이 글의 맨 앞에 일러준 비밀의 답. 그건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의 2003년 3월18일에 더블 데이에서 출판된 하드커버 영문판 초판본 455페이지의 맨 아래서부터 성부, 성자, 성신을 가리키는 세 번째 줄에서 마리아를 지키려고 했던 기사단을 일시에 멸한 13일의 금요일의 열세 번째 단어와 열두명의 제자를 말하는 열두 번째 줄에서 행운을 가져올 일곱 번째 단어를 하나로 쓴 다음 그 단어로 만들 수 있는 한 단어를 생각해볼 것. 말하자면 애너그램. 거기에 당신 나이를 곱해볼 것. 당신이 쓸데없는 음모론에 얼마나 심취했는지를 알려줄 지수임. 미안하지만 이 영화가 딱 이렇다. 혹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지적 수준을 알려주는 지표가 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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