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싸우지 않고 적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병법의 최고라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재즈 뮤지션 중 최고수는 누가 뭐래도 차인표일 것이다. 그는, 데뷔작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의 색소폰 연주에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허리만 한 차례 젖혀주는 존 케이지적 아방가르드 미학을 선보임으로써 국내에 ‘재즈’라는 단어를 알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것은 불지 않고도 관객을 쓰러뜨리는 최고의 경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연주 스턴트’ 기법은 극미량의 노력으로 극대량의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지금까지 장르와 매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애용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개봉된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피아노 치는 장면이 시종일관 주야장천 등장함에도 ‘연주 스턴트’ 기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연주 영화사에 일획을 긋는다. 하지만 당 영화는, 그렇게 높은 기술적인 완성도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제대로 보여주는 데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 왜냐.
다들 알다시피 당 영화에서는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자폐적 성격을 갖게 된 천재 소년 피아니스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엄정화가 연기하는 극중 피아노 선생님은, 자신의 실패에 대한 보상심리로 걔를 혹독하게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뭐, 굉장히 재미없고 고되 보이긴 한다만, 그래야만 진정한 프로로 거듭난다니, 이 훈련 자체에 투덜거릴 것은 없음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 선생님이(그리고 이 영화가) 천재 소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원생들을 다루는 태도에 있다. 이 선생님의 학원에서는, 피아노를 ‘천재적’으로 치지 못하는 학생들은 모두 발밑에서 거치적거리는 해초 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더듬더듬 쉬운 소절 하나 제대로 못 치는 도수 높은 안경 낀 여자애나, 엄마의 압력에 굴하여 태권도복을 입고 피아노 학원에 오는 뚱뚱한 남자애 등등은 천재를 향한 선생님의 불살라 오르는 열정을 가로막는 존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광경을 보며, 필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일 저 피아노 학원의 ‘보통’ 학생이었다면, 다시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지지 않게 됐을 것 같다고.
물론 천재를 세계적인 연주가로 키워내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게다. 하지만 더 많은 천재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비록 서툴더라도 악기를 연주하는 일 자체의 즐거움을 알도록 해주는 것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가치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기본적으로 즐기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에 이 ‘즐기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기술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차인표의 색소폰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텅 빈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어디 음악에서만 적용되는 얘기일 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