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반딧불의 묘>는 일본 제국주의 예찬?
2006-06-12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웬만해선 끝나지 않을 논쟁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전’이 이번 주부터 열린다. 상영되는 네 편의 작품들은 웬만한 애니메이션 팬들이라면 이미 한 번 이상 접했을 영화들이지만 그래도 이 작품들을 극장에서 필름으로 볼 수 있는 기회이니 다카하타의 팬이라면 놓치지 마시길. 한 작품만 고르라면? 글쎄, 취향에 따라 심하게 갈리겠지만, 그래도 그의 최고 걸작은 〈반딧불의 묘〉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애니메이션 역사상 이 작품만큼 사람 마음을 확실하게 쥐어짜는 영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다시 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게 문제지만.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화 하나. 〈반딧불의 묘〉 제작 당시 〈에반겔리온〉의 안노 히데야키가 지브리에서 잠시 일하고 있었는데, 다카하타 이사오가 영화 속의 전함 장면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안노 히데야키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멋진 전함들을 그렸는데, 다카하타는 지나치게 군국주의 냄새가 난다며 그 공들여 그린 그림들을 모두 그림자로 처리해 버렸단다. 안노 히데야키는 화가 나서 지브리를 떠났고 그 뒤로 그가 다카하타에 대해 좋은 소리를 하는 걸 본 사람이 없었다는 … 뭐, 그런 전설이다.

이 이야기는 왜 유명할까? 첫째, 업계 사람들에겐 흥미진진한 뒷담화다. 다카하타 이사오와 안노 히데야키라는 쟁쟁한 거물들이 등장해 일대일로 정면충돌을 하고 있으니, 아쟁쿠르 전투가 따로 없다. 둘째, 이 에피소드는 〈반딧불의 묘〉가 일본 제국주의 예찬이 아니냐는 의문이 던져질 때마다 다카하타 이사오를 변호하는 얘기로 인용된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후자이다. 왜 이 에피소드는 그렇게 자주 이용되는가? 물론 이건 썩 좋은 변호자료다. 영화의 내용과 주제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를 변호하려는 가장 인기 있는 자료가 텍스트 외적인 것이라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반딧불의 묘〉는 제국주의 예찬인가? 다카하타 이시오의 인터뷰들이나 위의 에피소드들을 무시하고 봐도, 그 영화를 그렇게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 주인공 소년의 ‘대일본 제국이 망했단 말입니까?’라는 울부짖음에는 제국의 패망에 대한 슬픔보다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허망한 환영에 빠져 있는 어린아이에 대한 연민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속에서 희생된 두 아이의 비극이지, 특정 체제에 대한 정치적 선언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봐도, 논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새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들이밀고, 그 결과 안노 히데야키는 자기랑 큰 상관도 없고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영화를 지지하기 위해 계속 불려나온다.

이게 끝이 날까? 앞으로 한동안은 어림없다. 이건 다카하타 이사오 개인의 의도나 〈반딧불의 묘〉라는 훌륭한 한 편의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와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역사적 비극을 담고 있을 때 개인의 의견과 취사선택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건 어느 순간부터 전체의 일부가 되고 전체를 대변하는 자료가 된다. 이 경우에 그 전체는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역사의식이 될 텐데, 여기서 뒹굴다 보면 ‘보편적인 역사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라는 가치 있는 질문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죽을 때까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당사자로서는 귀찮기도 하겠지. 지은 죄라고는 전쟁의 비극을 그린 좋은 소설을 선택해 훌륭한 영화를 만든 것밖엔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발을 담근 영역은 중립적인 태도로 영화를 만들고 인터뷰를 통해 좋은 소리만 해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가 남은 시간 동안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그게 꼭 그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잘못만 챙기는 건 아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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