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비단구두>로 5년 만에 돌아온 여균동 감독
2006-06-19
글 : 김나형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여균동 감독은 박광수, 장선우 바로 다음 세대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인물이다.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로 영화판에 뛰어든 그는 1994년 두 탈옥수와 한 여자의 로드무비 <세상 밖으로>로 데뷔한 이래 본인이 쓴 시나리오로 본인이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왔다. 1995년에 포르노를 통한 알레고리영화 <맨?>, 1997년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 <죽이는 이야기>를 만든 그는 이후 점점 행보가 느려지는가 싶더니 2000년 몸에 대한 영화 <미인>을 내놓은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리하여 5년 만에 그가 들고 온 것은 저예산 장편영화 <비단구두>. ‘개량종, 쥐새끼, 사기꾼’ 같은 영화감독이 조폭의 협박을 받아 조폭 두목의 치매기 있는 아버지를 이북 고향으로 모시고 가는 얘기로 그 고향은 남한에 세트로 지어진 것이다. KBS와 영진위의 지원을 받아, HD 카메라로 하루에 1.2일 분량을 찍는 강행군을 하며 영화를 끝냈으나 개봉은 어려웠고 빚은 늘어갔다. <간큰가족>보다도 <굿바이 레닌>보다도 먼저 기획됐지만 결국 최후속타가 되어 그로 하여금 변명을 하도록 만들었다. <비단구두>는 중견 감독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경험이 되었으나 감독 본인은 침착해 보였다. 호된 현실과 <비단구두>가 보여준 가능성 사이에서, 그는 침울해하지도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5년 만의 장편이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나.
=사실 <비단구두> 시작한 건 2002년이다. 펀딩을 못해서 그렇지. 2∼3년 계속 준비하며 지냈더니 오랜만에 영화 찍는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시간 참 빨리 간다.

-지인의 일화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2000년 일인데 실향민 아버지를 둔 선배가 진지하게 “남한에서도 50년 살았는데 북한에서 20∼30년 못 살겠냐”고 했다. 하도 고향에 가고 싶어하시니까 모시고 가겠다는 거다. 쫑긋했는데, 개인적으로 북한 가는 얘기는 관심도 자신도 없었다. 남한사회에 대한 거울보기로서 이야기를 뒤틀면 재밌겠다 싶었다. 치매 노인에겐 시간, 공간, 인간이 다 혼동된다. 남한을 북한으로 꾸며도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 말미 배 영감은 갑분이로 혼동된 할머니를 만나 정착하고, 거짓 연극을 하던 감독 만수와 깡패 성철이 오히려 북한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도 일종의 거울보기, 뒤틀기인가.
=그렇다. 분단도 통일도 어쩌면 별거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는 역사적 경험치로서 엄존함, 무서움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대단치 않은지도 모른다. 구시대적 엄격함은 이제 영화의 아이로니컬한 엔딩처럼 별거 아니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질문들이 더 많다. 만수와 성철이 만수대 앞에 앉아서 “씨발, 어떻게 가냐 남한에” 하는 마지막 장면이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 찍었다. 북한에 가서 찍을 생각이었거든. 내년쯤 되면 지금 금강산 다니듯 다 다닐 것 같다. 그러면 두 배우랑 평양가서 못 찍은 라스트신 찍고 싶다. 그래서 딱 1회만 재개봉하는 거다.

-촬영 때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던 모양이다. 스탭들도 임금 깎고 나서주었고, 극단 차이무 소속 배우들도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그러나 어려움도 컸다. 펀딩이 어려워 작업이 지연됐고, 결국 KBS에서 지원받은 3억원 외에 1억6천만원 정도를 사재로 충당했다고 들었다. 배급·상영도 손 내미는 곳이 없어 1년 만에 씨네큐브 단독 개봉하게 됐다. 특히 임금 채불 문제로 일부 스탭들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도와준 이들이 있어 정말 기뻤다. <세상 밖으로> 찍을 때 로드무비라는 게 정말 어려운 것임을 호되게 교육받았다. 그 경험을 총동원하고 서로 열심히 의논한 때문인지 이번에는 굉장히 쉽게 진행됐다. 돈 없는 걸 알았는지 날씨까지도 도와줬다. 헌팅도 그랬다. 돈은… 빌리고, 훔치고, 못 주고, 고소당하고. 소송건은 문제제기한 두 사람 몫을 빌려서 지불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기다려주고 있는 나머지 분들 것은 아직 주질 못했다. 영화의 운명을 같이 가고 있는 거다.

-영화 개봉으로 다른 이들과 자신에 대한 채무를 보상할 수 있겠나.
=예상할 수가 없다. 아트플러스 체인의 수지타산 내역을 들여다보면 절대 희망적이지 않다. 이미 각오를 하고 있다.

-<비단구두>가 당신에게 남긴 의미는 뭔가.
=나 자신의 독립이다. 개인 프로덕션에서 저예산으로, 처음으로 독립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관객과 만나는 방법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어떤 방법이 서겠다 싶었다. 지금의 1.5배 정도 예산이라면 어떤 영화든 만들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독립영화 제작 방식은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은 참 어렵다. 앞으로 독립영화 작업 방식을 계속할 생각인가.
=아니. 꼭 그러진 않을 거다. 그런데 하고 싶다. 써둔 시나리오도 몇개 있다. 가능하다면 둘을 병행하겠다.

-<비단구두>는 전작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데뷔작 <세상 밖으로>와 곧바로 이어져 있고, 진짜 아들의 대리 역할을 하면서 누군가의 아픔을 겪어간다는 점에서는 <외투>와 닮았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라는 점에선 <죽이는 이야기>와 닿아 있다. 한데 상황은 좀 달라진 것 같다. 이를테면 <죽이는 이야기>의 구이도는 “이건 내 영화야!” 하는데, <비단구두>의 만수는 “영화 망한 게 다 내 책임이야? 왜 나한테만 그러냐” 한다. 이 감독들은 여균동의 분신이기도 한가.
=누가 “왜 자꾸 메타영화를 하느냐”고 묻더라. 나도 잘 모르겠다. 메타 문학이 성행했던 때를 보면 일종의 반성의 시대다. 커다란 적은 사라지고, 신념은 붕괴됐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자신에 대해 물으면서 뭔가를 회복하려는 거다.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도 믿어왔던 신념 체계가 자꾸 깨지는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나름대로 재미를 부여하고 싶나보다.

-연극, 노동극을 하다 박광수 감독 연출부로 영화판에 뛰어들어 <세상 밖으로>로 데뷔했던 그때와 지금은 달라도 엄청나게 다를 터다.
=박광수 감독한테 “내가 충무로 가서 영화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가 “잘됐다. 연출부로 와라” 해서 간 게 <그들도 우리처럼>이었다. 그때는 그런 영화를 동아수출공사, 지금으로 치자면 CJ 같은 메이저에서 만들던 시대였다. 내가 영화판에 들어올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다. 80년대, 90년대는 핵분열 직전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 대기업에서 투자를 시작하고 회사도 생기면서 불과 10여년 사이에 몇 세대가 급격히 지나간 것 같다.

-당신은 영화를 발언대로 삼아온 사람이다. <외투> <대륙횡단> 같은 단편은 직접적으로 인권문제를 다루고 있고, <세상 밖으로>나 <죽이는 이야기> 등도 세태를 비꼰다.
=영화로 말을 좀 잘했으면 좋겠다고 늘 자책만 한다. 말을 썩 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미인>은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비친 영화라 속상하다. 물론 그건 순전히 내 잘못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미인>은 필모그래피에서 상당히 돌출된 영화다. 내용보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영화이기도 하고.
=내가 봐도 그렇다. 주인공 기자가 장기수를 취재하는 서브라인이 하나 있었다. 사는 것에 흔들리던 기자가, 40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지만 감정과 생각은 20살 즈음에 멈춰 있는 장기수를 만나 친해질 무렵, 스무살 여자를 만나게 된 거다. 오지랖 넓게 장기수 얘기하려니 쪽팔려서 그걸 빼버렸더니, 몸만 남겨뒀더니, 형이상학적인 영화가 돼버렸다. 아, 할 말이 없네. (웃음) 수없이 찍어보면서 말 잘하는 법을 익히기엔 영화라는 게 호의적이지 않다. 게다가 여균동 비호감 모드가 영화판에서 벌써 작동하기 시작했고, 점점 연세가 드는 단계에 오니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기가 아직까지 있다는 게 행복하다.

-여균동 비호감 모드라.
=들으니까 내 나이 또래의 감독들은 다들 자리잡기 참 어렵단다. 그건 잘못된 게 아니고 진실이다. 시계는 가는 거니까. 다만, 자기 얘기를 가장 잘할 수 있는 때 주변 여건이 안 돼 수많은 영화가 못 만들어진다는 게 안타깝다. 인간이든 사회든 세계든 혹은 오락이든 자기 트렌드를 갖고 할 수 있을 때 가게문을 닫아야 된다는 것. 구멍가게 운영하다가 드디어 도를 트려는데 아주 그냥 단방에 나가떨어지는 거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사람은 아니지 않나.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뭘. 끝없이 제안하고 얘기는 한다. 한데 요즘은 내가 생각해도 저예산영화쪽이 맞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시나리오 써놓고 몇명 들까 생각하면 내가 생각해도 맥시멈 10만명이다. 역산하면 예산은 5억원. 바보 아니라면 누가 거기에 20억원을 내겠나. 하지만 중요한 건 그 10만명을 위한 영화를 만들 엄청난 지적 자산들이 있다는 거다. 그 10만명의 관객이라는 게 형성될지도 모르고. 대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바보지만 대중만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것도 바보다. 대중의 욕망은 변덕스럽고 자본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것인데 거기 국가 문화자산의 한 부분을 통째로 맡길 수는 없다. 다들 나보다 나은 고민을 하고 있겠지. 한데 스크린쿼터 문제까지 터져, 독립영화 얘기 꺼내는 게 이중의 어려움이 됐다.

-10만명이 아닌 500만, 1천만명이 볼 것 같은 영화, 더 평이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나.
=나는 ‘나한테 재미있는가 재미없는가’를 기준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현실과 살갗이 닿아 있고, 찌질이·언저리·양아치 등 좀 모자란 놈들이 나왔으면 좋겠고, 큰 놈들 좀 놀려먹었으면 좋겠다. 그걸 판타지나 알레고리 같이 덜 사실적인 방식으로 만들고 싶은 거다. 그게 사람들에게 호감 모드로 가면 좋은 거고, 비호감 모드로 가면 접는 거다. 한데 가늠을 못하겠다. 지난해 말 ‘이건 내 인생 최고의 상업영화야! 나도 이제 상업영화할 거야’ 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한 두 군데 줬거든? (잠시 뜸) 메이킹이 안 된대. 하지만 다음 작품은 상업영화가 될 거다. 이때까지는 내가 쓴 시나리오로 내가 감독해왔는데,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기획영화를 하게 됐다. 읽어보니 재밌더라. 설렌다. 천지신명께 물었더니 “밥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니?” 하더라.

-얼마짜리 영화인데.
=50억원 생각하던데? 나는 아직 10억원 이상을 써본 적이 없어서 계산이 안 선다. 50억원? ‘네가 쓰겠지 내가 쓰겠니?’ 싶다.

-당신에게 있어서 영화란 무엇인가? 직업은 아닐 것 같다.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 내 안엔 수많은 약속이 있었을 거다. 상당한 의무감과 부채 같은 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지금도 그렇다. 만년 실업에 만년 정년퇴직인 것을 누가 직업이라 하나. 그러고보니 나도 15년이 됐다. 1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나니까, 내 나름의 방식을 찾아서 영화로 끝을 내야 되겠다는 생각은 든다. 열심히 찾다가 그 방식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더이상 나타나지 말고, 깝죽거리지 말고, 그냥 사라지는 게 맞는 것 같다.

-만년 실업 만년 정년퇴직. 그럼 다른 밥벌이를 하기라도.
=밥만 먹고 살 수 있나요. 그런데. 밥만 먹고 살기도 힘드네요. 문화노동자 안형석 노래 가사가 딱이다. 나도 꿈이 있고 말이야, 밥만 먹고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밥만 먹고 살기도 힘든 거다. (웃음)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 애가 셋이거든? 내가 돈이라곤 번 적이 없는데 여하튼 들녘에서 밀은 자라 뻐정하게 올라와 있다. 밤마다 걔들 보고 있으면 신기해서 와이프한테 물어본다. “너 구슬이 몇개나 남았니? 그럴 바에는 빨리 다 꺼내 봐”라고. 그런데 이제 없대. 구슬이. 나도 이해가 안 된다. 20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20년간 살 건지.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 하겠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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