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감정에 충실한 ‘보험 연기’, <구타유발자들> 정경호
2006-06-17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여덟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한번씩 주인공이 되는 마당극 <구타유발자들>에서 홍배는 순환하는 폭력의 한 고리였다. 동네 형의 말이라면 흉악한 폭력도 망설임없이 따르던, 죄의식이라곤 모르는 변두리 양아치는 순진해서 더욱 무서운 악함의 전형을 보여줬다. 자기보다 약한 고등학생을 재미삼아 땅에 묻어보고, 처음 보는 여자를 겁탈하라는 명령에 복종하고, 실컷 놀려주던 고등학생과 막싸움을 벌이다 얼굴에 돌을 맞고, 급기야 죽은 쥐를 먹으라는 동네 경찰의 말까지 듣게 되는 그의 운명은, 참 기구하기만 했다.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자신만의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순간이나 기이한 모습의 원인이 되는 과거를 설명해주는 진지한 장면 하나없는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홍배의 빨간 머리는 소름끼칠 만큼 창백했던 <구타유발자들>의 화면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어떤 이유로든지 극중 비중과 관계없이 관객의 뇌리에 남는다는 점에서 홍배는, 정경호가 연기한 영화 속 인물과 일맥상통한다. <와니와 준하>에서 자동차 운전자로 등장해 승강이를 벌이는 단 한 장면에서 시작된 그의 영화연기는, <두사부일체> <버스, 정류장> 등의 영화 속 조·단역으로 이어지면서 편집 과정에서 가혹한 ‘잘림의 아픔’을 한번도 겪지 않은 신기한 경력을 쌓아왔다. <목포는 항구다>에서는 조폭 보스의 똘마니, 일명 ‘아름다운 새끼’로 한신 전체를 책임지는 감초 역할을 소화했고, 대원들이 한명씩 죽어나가는 <알포인트>에서는 비교적 후반부에 죽음을 맞았으며, <달콤, 살벌한 연인>을 통해 가장 비중있는 조연으로 발돋움했다. 막 나가는 터프함이 귀여운 마초 건달 계동은 그에게 꼭 맞는 옷이었다.

굳이 따진다면 정경호는 모든 역할을 몸에 맞도록 만들어나가는 편이다. 언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던 단역 시절에는 “출연한 신이 몽땅 빠져도 극 진행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재밌게 해서 도저히 못 자르게 만”드는 집요함이 중요했다. 이제 그는 이른바 “보험연기”를 말한다. “아무리 웃겨야 하는 역할이고 장면이라도 의도가 빤히 보이는 코믹연기는 안 된다. 일단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면 설사 관객을 웃기지 못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말장난 같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해 기본을 다진다는 성실함은 저축론으로 이어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연극을 해왔던 그는 “요즘은 일년에 한두번 나를 위한 사치를 시도하지만, 여태껏 얼마를 벌든지 일단 저축을 하고 나머지를 썼다. 어릴 때부터 내 힘으로 장가를 가겠다는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개인적으로 큰 기쁨”이라고 말한다. 본인 말처럼 “단지 직업이 배우인, 평범한 삼십대 남자”의 그 모습이 정겹고도 낯설다.

포털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넣으면 두명의 배우 정경호를 만날 수 있다. 연기 경력으로 치자면 그가 훨씬 선배겠지만, 막말로 ‘잘생긴’ 정경호가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후 꽤 많은 영화에서 얼굴을 알린 탓에 그의 경력과 동명이인의 필모그래피가 뒤섞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본인은 “난 하나도 불편한 게 없다. 어차피 묻어가는 인생이라, 여성팬들이 잘생긴 정경호라고 착각해서 영화 보러 많이 와주시면 고맙기만 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누군가와 헷갈리는 입장으로 남기에, 그의 과거가 제법 듬직하고, 미래는 적지 않은 이들의 기대를 모은다. “서른살이 돼서 연기력이 갖춰지면 원래 하고 싶었던 영화에 도전하겠다.” 작정하고 <남자충동> 등의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어느 날, 그는 서른이 됐고, 본인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다시 밑바닥에서 영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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