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이다. 영화 <중독> 이후 이미연은 무려 4년 만에 주연 자리로 돌아왔다. ‘캐스팅할 배우 없음’의 난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충무로에서 주연급 여배우가 4년간 공백을 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연치 않게 고소영도 최근 안병기 감독의 공포물 <아파트>로 4년 만에 충무로 컴백을 알렸지만, 고소영과 달리 이미연은 4년간 무작정 쉬지만은 않았다. 2002년에는 드라마 <명성황후>를, 2005년에는 곽경택 감독의 <태풍>을 작업했다. 지금 이미연은 이언희 감독(<…ing>)의 두 번째 연출작 <어깨 너머의 연인>을 촬영 중이다. <어깨 너머의 연인>은 30대 초반의 두 여자가 사랑과 결혼 앞에서 성장해가는 드라마다. 이미연의 캐릭터 서정완은 서른두살의 사진작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발언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은 누구보다 사랑에 노출되기 쉬운 여자다. 4년 만에 그녀가 택한 주연작은 “지금까지 해온 것들 중에 가장 현실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물고기자리> <인디안 썸머> <흑수선> <중독> 등 지금까지는 제 캐릭터가 영화적으로 정확한 요소가 많이 있었어요. 겪은 일이 분명하고 따라서 감정도 분명하고. 정완은 그렇지 않아요. 정완이란 사람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여자예요. 그걸 염두에 두고 제 자신을 많이 열어놓고 작업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실제 이미연의 모습이 가장 많이 들어가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촬영 첫날 메이킹 필름을 찍는데 정완이가 어떤 여자냐고 묻기에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이 영화를 택하기 전까지 이미연은 “나중에는 토할 것 같다 싶을 정도로” 줄기차게 시나리오를 읽어댔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없어서 고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차기작을 두세편씩 골라놓는 일은 더더욱 못한다고 했다. 한 작품을 끝내고 났을 때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할지 그것은 본인조차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2년 전부터 이미연은 지인들을 만나면 “이젠 현실에 두발 딛고 살고 싶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으로는 사랑은 변해선 안 된다고 믿으며. 마치 정완처럼. <어깨 너머의 연인>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이런 마음의 닮은꼴 때문일 것이다.
“긴 시간 쉬었죠. 영화라는 작업은 즐겁기도 하지만 고통도 따르잖아요. 근데 <중독> 끝나고 나서 즐길 수만은 없는 고통이 왔고 그걸 극복하고 나서도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겠다라는 생각은 늘 가졌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마음을 다 줄 만한 작품을 결정하고 나서, 이미연은 영화가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백방으로 뛰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완의 친구 희수 역을 염두에 두고 이미연은 한번도 같이 작업해보지 않은 배우 이태란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를 촬영 중이라 바쁘다는 것도 알았고 그것이 함께 영화를 작업할 때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서로 가진 에너지가 잘 맞아야 하고 그런 에너지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서” 이태란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어깨 너머의 연인> 프로덕션이 다소 지연되면서 애초 촬영감독으로 정해졌던 홍경표 감독이 곽경택 감독의 차기작 때문에 외국에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곽 감독의 차기작 역시 지연될 거란 소식을 듣자마자 홍경표 촬영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와달라고. <태풍>의 일본 프로모션차 재회한 곽 감독에게 한마디 들었다. “성공했네.”
“광고를 찍어도 제가 신뢰하는 4∼5명의 감독님이 아니면 좀처럼 같이 작업을 안 해요. 저와 일하는 다른 식구들도 그렇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 눈과 몸짓으로 제 감정을 표현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걸 최상으로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이 없으면 함께 일하기가 어려워요. 현장에 있으면 모니터 확인도 잘 안 해요. 쑥스럽기도 하고, 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이 모두 오케이하신 거라면 그걸로 됐다고 믿어요. <태풍> 때 곽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하도 모니터를 안 보려고 하니까, 쫌! 와서 봐요! 촌스럽게!”
그 말에 이미연은 마지못해 모니터 앞으로 갔지만 결국은 멀찌감치 구석에 떨어져 서서 곁눈질로 제 모습을 확인했다고 했다. “디지털화가 덜 된 것 같기도 하고. (웃음)” 마음이 움직이기 전까지 작품을 고르지 못하는 걸 보면 “솔직한 말로” 자신은 상업화가 덜 된 것 같다며 이미연은 시원한 몸짓으로 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한참이나 연하인 기자에게 쾌활하고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고 “그렇습니다” 같은 말투를 종종 쓰던 이미연은 ‘털털한 큰언니’보다 ‘고지식한 만큼 순수한 형님’에 가까운 인상을 풍겼다. 이 말을 전하자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요. 보기보다 제가 좀, 많이 예민하고, 마음에 쌓아두고 곱씹고 생각하고 그래요. 그렇게 쿨하지 못해요. 애들이 그러잖아요. 제가 한번 안 본다 그러면 3년을 간다고.”
스튜디오에 들어서면서 사진기자와 반가운 재회의 포옹을 시원스럽게 나눈 이미연은 화이트 룩의 차림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서서 큼직큼직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으로 관리된 듯한 건강한 몸이 섬세한 근육의 흔적을 만들어냈다. 무표정을 하고 고개를 쳐들었을 때 이미연의 얼굴은 자신의 현재 감정에 충실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을 뿜어냈다. 그 광경은 아름답다기보다 멋졌다. 18년을 이 험한 곳에 몸담아왔어도 이미연은 여전히 사랑도, 믿음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녀 자신의 말대로 쿨하지 않은, 핫한 가슴의 소유자. “그러니까 배우 하지 않겠어요. 그것 때문에 평상시 삶은 살아가기 힘들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