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부재와 암시를 통해 탄생한 스타일
2006-06-21
글 : 홍성남 (평론가)
<캣 피플>등 대표작 7편 선보이는 자크 투르뇌르 감독전
<악령의 밤>

자크 투르뇌르가 말하길 미국에는 자기에게 이상한 평판이 따라다녔다고 했다. 영화계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시나리오가 있다고? 그럼 자크 투르뇌르에게 줘봐. 그라면 어떻게든 만들어낼 거야.” 사실 투르뇌르 자신도 “나는 내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거절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원래 그에게 먼저 제작 의뢰가 들어왔으나 그가 거절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로는 <여인의 비밀>(니콜라스 레이, 1949), <셋업>(로버트 와이즈, 1949), <악의 문>(앤서니 만, 1950) 같은 것들이 있다. 투르뇌르는 여간해서는 특정 영화를 만들겠다고 기를 쓰고 덤벼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용감독’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태연하게 받아들인 영화감독이었다. 그런데 아울러 그는 “나는 항상 내가 원한 것을 했다”고 말한 사람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어찌 보면 이건 앞서 이야기한 투르뇌르의 작업상의 기질과 배치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투르뇌르는 바로 이같은 ‘모순’을 끌어안고 활동한 시네아스트가 분명했다. 그는 영화감독이란 ‘직업’을 가지며 제작사의 요구에 따라 적게는 12일에서 18일에 이르는 짧은 시간 안에 촬영을 끝내곤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제약 아래에서도 자신만의 매혹적인 세계를 구축해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작가주의의 혜택을 온전하게 받지 못한 그는 작가주의의 시험적 사례(test case)가 되는 영화감독이라고 이야기되곤 한다. 누벨바그 세대에게조차 대접받지 못했던 투르뇌르가 새로운 ‘발견’의 대상이 된 것은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물론 그러고나서도 그에 대한 의심이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영화적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스타일리스트>

투르뇌르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평자라도, 그의 영화에는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그의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하는 영화적 ‘스타일’이 있음을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영화적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영화감독의 고전적 사례 가운데 하나임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그의 아버지 모리스 투르뇌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자크’가 그 반만큼이라도 훌륭한 감독이 된다면 행복하겠다고 말한 그의 아버지 ‘모리스’는 오귀스트 로댕의 조수로 일한 것을 포함해 여러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영화 세계에 정착한 사람이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건너가 활발한 영화작업을 수행했던 모리스 투르뇌르는 1918년에 이미 ‘스크린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뛰어난 영화감독을 아버지로 둔 자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화계에 들어가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10달러씩 받고 이야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팔기도 했다. 나중에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영화작업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답했다. 단순하게 보자면, 미묘함과 억제에 대한 취향, 미스터리-호러-판타지영화에서 보인 특별한 재능(앨프리드 히치콕은 어릴 적 자신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들 가운데 하나로 모리스 투르뇌르의 판타지영화 <잃어버린 배들의 섬>(1923)을 꼽은 적이 있다), 시각적인 것에 대한 탁월한 감각은 아버지 투르뇌르에게서 그 아들로 자연스럽게 전이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꼭 이렇게 단순한 일대일 대응을 하지 않더라도 모리스 투르뇌르가 아들에게 미학적 원칙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자크 투르뇌르에 대한 드물면서도 뛰어난 비평서를 쓴 크리스 후지와라는 (특히 빛과 배경의) 디테일에 대한 주의력, 자연스러운 연기 양식, 유별나고 두드러진 장면 효과 같은 특징이 자크 투르뇌르에게 어떻게든 ‘인상’을 주었을 것임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

<장르를 관조하는 외부인의 시선>

자크 투르뇌르는 무엇보다도 발 류튼과 함께 만든 미스터리호러영화들(<캣 피플>(1942), <레오파드 맨>(1943),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3))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코미디(<토토>(1933), <수위의 딸들>(1934)), 필름 누아르(<과거로부터>(1947), <황혼>(1957)), 웨스턴(<<캐년 패시지>(1946), <위치타>(1955))을 포함한 여러 장르를 오간 영화감독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에 위치한 영화들 속에서 그만의 인장을 하나 찾으라면 그건 영화비평가 앤드루 새리스가 말한 ‘프랑스적인 어떤 젠틀함’일 것이다(어려서부터 오랜 세월을 미국에서 보낸 투르뇌르지만 그는 자신을 프랑스인이라고 간주했다). 아마도 그 표현을 가지고 새리스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일종의 억제와 거리감이 아닌가 싶다. 예컨대, 투르뇌르는 웨스턴을 만들면서 여타의 감독들과는 달리 액션과 폭력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집중했다. 또 다른 예로, 보는 이로 하여금 해적의 감정 세계를 오가게 만드는 영화 <인도의 앤>(1951)의 경우는 “가장 젠틀한 해적영화”(제프리 오브라이언)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로빈 우드가 지적한 대로 투르뇌르는 장르에 대해 ‘외부인’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사람이었다. 이건 그의 호러영화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제임스 웨일과 로저 코먼의 것들을 포함해 일체의 호러영화들을 싫어했다던 그는 호러영화의 기본 전체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에게 공포란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대면케 함으로써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암시를 통해 주위에 위험 요소가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 태세를 하고 있음을 알게 하면서 은근한 전율을 주는 쪽과 관련이 있었다(따라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의 영화는 <레오파드 맨>에 대해 영화비평가 보슬리 크로우더가 썼듯이 반쯤만 구워져 하품만 나오게 하는 영화로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영화 매체의 활용이라는 문제가 중요한 것으로 대두된다. 그의 호러영화가 주는 공포란 무엇보다도 형식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캣 피플>에서 가장 무섭다고 할 시퀀스가 그 실례를 잘 보여준다. 불 꺼진 수영장에서 앨리스는 갑자기 사나운 야수로 변신한 이리나의 존재를 감지하고는 커다란 불안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여기서 앨리스도,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도 결코 ‘고양이 인간’ 이리나의 존재를 보지는 못한다. 다만 위협적인 그녀의 존재를 미묘하게 느끼게 하는 시청각적인 요소들이 앨리스와 우리에게 감정의 동요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 요소들이란 바로, 일렁이는 수영장의 물을 반사하여 미세하게 어둠의 크기를 바꿔놓는 그림자의 움직임이고, 또 화면 밖에서 들리는 으르렁거리는 야수의 소리이다. 여기에서 보듯, 투르뇌르는 조셉 폰 스턴버그,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등과 함께 그림자를 매만지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 시네아스트였고(그의 영화들에는 격투의 순간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경우가 꽤 있다), 사운드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 영화감독이었다(<레오파드 맨>이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에서 사운드가 공포의 중요한 원천으로 기능하는 것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재’와 ‘거리’의 미학>

크리스 후지와라는 이처럼 ‘부재’의 문제를 하나의 멋진 스타일로 통합해내는 투르뇌르의 영화란 ‘스펙터클의 영화’와는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썼다. 부재하는 대상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영화감독이 들이미는 시각에 공격당하기보다는 상상력을 발휘해 그것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부재’라는 것과 함께 투르뇌르의 세계를 구축하는 또 다른 자재로는 ‘거리’를 들 수가 있다. 그는 감정이 폭발해야 하는 순간에도 여간해서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않는다. 그러면서 인물을 그 주위의 요소들, 그리고 공간과 분리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그렇게 해서 인물의 정서적인 삶과 물질의 삶은 서로 섞여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미지의 대상과 보여지지 않는 존재 역시도 가시적인 리얼리티와 이미 융합을 이룬 상태다. 그처럼 투르뇌르의 영화는 서로 반대쪽 장(場)에 놓여 있는 요소들이 서로 미묘하게 경계를 파고드는 지점에서 매혹을 발휘하는 것이 된다. 투르뇌르 자신이 자주 썼던 표현을 활용하자면, 그것은 ‘평행 우주’(Parallel Worlds)를 만들어내는 순간에 대한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투르뇌르가 만들어낸 그 세계는 그래서 분명 고전적 할리우드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또 다른 향취를 뿜어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그건 분위기가 중시되는 탓도 있겠고, 또 고전적 양식의 영화로는 유난히 ‘죽은 시간’이 빛을 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투르뇌르의 영화는 어떤 고정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르뇌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그의 영화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함을 지적하곤 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 첫 번째 대면이 시작된다.

자크 투르뇌르 특별전 주요 상영작

<캣 피플>
Cat People/1942년/흑백/73분
RKO에서 제작자 발 류튼과 자크 투르뇌르가 콤비를 이뤄 만든 세편의 영화들 가운데 처음으로 만들어진 작품. “키스하면 할퀴어서 죽여버릴 거예요”라는 광고 문구가 잘 알려주듯, 영화는 저주받은 핏줄을 이어받아 키스를 하면 야수로 변신한다고 생각하는 여성 이리나를 중심으로 욕망, 질투, 공포, 수용 등이 맞물린 이야기를 들려준다. 불길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그림자를 시각적으로 활용하며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공포와 관련짓는다는 점 등에서 볼 때 <캣 피플>은 기본적으로는 호러영화의 범주에 들어갈 영화지만 슬쩍 그 영역을 벗어나면서 매력을 안겨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먼저 영화는 그 중심에 놓인 이리나라는 존재를 단지 위협적인 인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함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동정할 만한 인물로 그린다. 그리고 여타의 호러영화와는 달리 암시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것은 영화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른 가능성을 알려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앨리스가 어둠 속에서 쫓김을 당하는 장면과 수영장에서 두려움에 떠는 장면은 특히 압도적이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I Walked with a Zombie/1943년/흑백/69분
제목대로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자칫 현재의 좀비영화를 생각한다면 커다란 실망감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좀비영화도 아닐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그래서 분위기와 인물만이 부각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캐나다 출신의 간호사 벳시가 폴이라는 농장주의 아내 제시카를 돌보는 일을 하러 서인도 제도로 떠나면서 시작된다. 제시카는 심한 열병에 걸린 뒤로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런데 벳시는 그만 폴과 사랑에 빠지고 폴을 위해 제시카를 살려내겠다며 부두교 주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 삶과 죽음, 초자연적인 요소와 일상의 삶이 실존적인 갈등을 벌이는 양상을 다룬 이 영화는 투르뇌르적인 모호함의 한 정점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어떻게 매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벽에 드리운 그림자와 불길한 사운드가 두려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과거로부터>
Out of the Past/1947년/흑백/97분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가장 묘하게 시적인 범죄스릴러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과거로부터>는 자크 투르뇌르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필름 누아르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하다.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 주유소 일을 하고 있는 제프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 남자는 과거에 사립탐정이었던 제프를 고용했던 휘트의 하수인이다. 예전에 제프는 휘트로부터, 자신에게 총을 쏘고 4만달러를 가지고 달아난 아내 캐시를 찾아서 자기한테 되돌려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 여자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렇게 지나갔던 과거가 이제 제프의 삶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제목에서 드러난 대로 <과거로부터>는 결코 달아날 수 없는 과거에 발목 잡힌 사람들, 그러면서도 영속적인 도주의 상태를 꿈꾸는 사람들의 운명을 복잡한 내러티브와 빼어난 비주얼로 포착해낸다. 아마도 위험한 것에 대한 매혹과 그로 인한 운명의 길을 이처럼 매혹적으로 그린 영화는 영화사상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악령의 밤>
Night of the Demon/1957년/흑백/95분
미국에서 학술회의에 참석하고자 영국 땅을 밟은 홀든은 초자연적인 것의 존재를 믿지 않는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는 마술사 캐스웰과 만나면서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저주가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기 시작한다. 믿음과 회의주의, 판타지와 리얼리티 사이의 대립과 대화를 영화적으로 풀어낸 <악령의 밤>은 투르뇌르의 영화답게 여전히 분위기가 만드는 공포로 깊은 인상을 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는 다른 투르뇌르 영화와는 달리 악마의 존재를 실제로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제작사쪽의 압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삽입된 그 장면은,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믿음과 모호함이란 주제에 좀더 어울리는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악령의 밤>은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볼 수 있는 투르뇌르의 후기작이다. 영국에서 만든 이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해머 영화와 비교하면 투르뇌르의 특징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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