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강철 손톱과 얼굴선을 따라 뒤덮인 구레나룻의 히어로 울버린. 과거의 기억을 찾아 헤매던 외로운 전사가 최후의 전쟁에 뛰어들기까지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건 대타로 울버린의 역할을 낚아챘던 호주 사나이 휴 잭맨이 ‘남반구의 가장 섹시한 수출품’이라는 별명을 지닌 할리우드 스타가 되기까지의 세월이기도 하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의 휴 잭맨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가 도착한 날은 공교롭게도 토고와 한국의 월드컵 경기가 있었던 지난 6월13일. 조심스레 “호주 국가대표팀의 승리를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더니 “한국팀의 승리를 축하한다. 어젯밤에 경기를 보느라 한숨도 못 잤다”는 답례가 돌아온다. “안녕… 안녕하세요.” 장신의 할리우드 스타가 간밤에 급히 외운 듯한 인사를 정확하게 발음하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울버린의 거친 숨소리를 떠올리기란 쉽지가 않다. 휴 잭맨은 인터뷰를 마친 뒤 수천명의 팬들이 운집한 레드 카펫 행사를 남반구의 태양 같은 미소로 끝내고 돌아갔다.
-3번째 <엑스맨>이다. 3부작의 마지막을 닫는 작품이기도 하다. 팬들과 당신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하나.
=한마디로 판타스틱하다. 3부작 중에서도 가장 감정적인 분출이 크고, 가장 거대하며, 가장 스펙터클한 작품이다. 동시에 전편들처럼 캐릭터의 감정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3부작의 마지막으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팬들의 지지에 힘입어 엄청난 박스오피스 성적을 거둔 것도 행복한 일이다.
-감독이 세번이나 바뀌었다. 브라이언 싱어가 떠나갔고, 매튜 본이 잠시 연출직에 앉아 있다가 결국 브렛 래트너가 연출을 마무리했다. 이런 변화 때문에 혼란스럽지는 않았나.
=모든 변화들은 그냥 벌어진 일일 뿐이다. 이런 경우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에 스스로를 적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적을 만드는 일이다.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그래서 모든 영화들의 제작과정은 혼돈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사실 그런 식의 장애들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모든 장애들을 극복해낸 것 또한 기적적인 일이고. 어제 한국과 경기한 토고팀을 생각해봐라. 감독이 사임하고 새로운 감독이 들어오나 했고. 하지만 결국 게임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브렛 래트너와 브라이언 싱어의 차이점은 무엇이었나.
=둘은 매우 다르다. 래트너는 천성적으로 감정적인 사람이고 싱어는 좀더 논리적이다. 래트너의 훌륭한 선택은 시리즈의 바탕이 되어온 것을 굳이 바꾸려 들지 않았다는 거다. 그는 싱어가 만들어온 세계에 자신의 것을 그저 더하기만 했고,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또 다른 <배트맨 포에버>처럼 전작의 세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은 <엑스맨: 최후의 전쟁>이 형편없는 언더독(Underdog: 패배자)이라고 예상했다. 브라이언 싱어는 코믹스 원작 영화들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엑스맨>이 나오기 전까지 코믹스 원작 영화들은 참으로 볼품없었다. 하지만 <엑스맨>의 성공 덕에 <스파이더 맨> 같은 영화들의 기획이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코믹스 팬들에게 싱어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다. 모두 그를 사랑한다. 뒤를 잇는 감독은 누구든 격한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우리 영화가 언더독으로 취급받은 것이 오히려 호재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기대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결과물에 대한 감흥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와 이안 매켈런 같은 배우들이 <엑스맨> 시리즈에 품고 있는 깊은 감정들은 소수자로서의 정체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엑스맨> 시리즈를 어떤 식으로 자신과 연결시키며 연기해왔나.
=모든 십대들은 어떤 식으로든 돌연변이다. 게이나 흑인이나 유대인 아이들만이 스스로를 돌연변이로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수많은 캐릭터들에 감정을 이입할 수가 있다. 물론 내가 소수자로서 살아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릴 때 엄마가 가족을 떠난 경험이 있다. 그때의 나는 사람들이 엄마가 없는 나를 평범한 아이로서 봐주길 원했었다. 그런 경험을 떠올려보면 세상의 모든 십대들은 다 돌연변이가 아닌가 싶다.
-당신은 <엑스맨: 최후의 전쟁>이 마지막 <엑스맨>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영화는 자비에와 매그니토의 부활을 암시하며 끝이 난다. 혹시 또 다른 속편을 찍을 계획이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장면을 찍은 줄도 몰랐다. 브렛 래트너가 몰래 찍은 거다. 물론 패트릭 스튜어트와 이안 매켈런은 알고 있었겠지. (웃음) 어째 카메라를 몰래 위층에 올려서 찍더니 말이다. (웃음)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암시 아닌가. 관객에 대한 가벼운 희롱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물론 스튜디오는 <엑스맨> 시리즈의 스핀 오프(외전 시리즈)에 대한 많은 계획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젊은 엑스맨 영화나 매그니토와 자비에의 젊은 날에 대한 영화도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다. 하지만 <엑스맨: 최후의 전쟁>을 본 관객이라면 이것이 정식 <엑스맨> 신화의 종점이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거다. 대체 어떤 관객이 더 강한 (<오스틴 파워>의 닥터 이블처럼 새끼손가락을 물며) 이.블.을 바라겠는가.
-호주 출신 배우들은 남반구가 할리우드로 보낸 가장 근사한 수출품으로 종종 불린다.
=정말인가? (웃음)
-정말이고 말고.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호주 배우들간에 어떤 커뮤니티나 특별한 친밀감이 존재하는가.
=할리우드와 호주 사이에는 긴밀한 커넥션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다. 멜 깁슨, 주디 데이비스, 피터 위어, 조지 밀러 같은 사람들이 커넥션을 개척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호주 배우들이 끊임없이 할리우드로 건너가는 이유는 자국에 일자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한편을 찍기 위해서 2년에서 4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호주 배우들은 자유롭게 자신을 변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물론 공통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도 가깝고.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미국 배우들보다 싸기 때문일 게다. 그냥 호주 달러로 개런티를 지불하면 되니까. (웃음)
-울버린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스핀 오프는 어떻게 진행 중인가.
=벌써 두번의 초고가 나왔고, 이제는 촬영에 돌입할 시간만 찾고 있다.
-혹여 울버린이라는 캐릭터가 휴 잭맨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제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조바심은 없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울버린이라는 캐릭터를 사랑한다. 이 캐릭터에는 좋은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이 숨겨져 있다. 물론 나는 이걸로 또 다른 일곱편의 영화를 만들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다. <폴리스 아카데미>가 아니니까. (웃음) 또한 울버린 스핀 오프는 <엑스맨4>도 아니다. <엑스맨>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과 전혀 다른 캐릭터들을 가진 영화가 될 거다.
-당신은 그동안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할리우드만큼의 명성을 얻어왔다. <오즈에서 온 소년>으로는 토니상을 수상했다. 무대에 서는 것을 영화와 비교한다면 어떤 경험인가.
=나는 영화와 무대를 모두 사랑한다. 하지만 내 직업의 가장 멋진 10개의 순간을 꼽으라면, 그건 전부 무대에서의 순간들이다. 나는 호주 시절부터 무대에서 훈련된 배우다. 현장에서 직접 관객과 교감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완전히 마약 같다. 엄청난 에너지를 주고, 나를 더 날카로운 배우로 만들어준다. 영화에서는 여러 컷을 찍어 잘 나온 하나를 선택하면 되지만, 무대에서는 연기하는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렵다. 영화보다도 더 어렵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감독한 <파운틴>이 올 여름 개봉 예정이다. 이 영화는 여전히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데.
=<파운틴>을 바로 얼마 전에 뉴욕에서 보고 왔다.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엄청난 영화다. 이전에는 한번도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내 영화라고 공치사하는 게 아니다. 당신도 알지 않나. 이건 ‘그’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라는 것을. 이 영화를 레이첼 바이스와 함께 봤는데, 바이스는 영화를 보던 중에 산통을 느껴서 병원으로 갔고, 남자아이를 순산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정말 멋진 일이지 않은가? <파운틴>을 다시 설명하자면, 1천년 동안 지속되는 사이키델릭 러브스토리다.
-당신이 설명을 할수록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웃음). <파운틴>은 도저히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곧 들어갈 차기작은 무엇인가.
=일단은 <오즈에서 온 소년>을 2주 뒤부터 호주에서 공연한다. 이후에는 바즈 루어만이 연출하고 니콜 키드먼과 연기하는 신작에 들어간다. 호주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할 수 있는 영화로, 2차 세계대전 직전의 호주 다윈이 배경이다. 광활한 대지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영국 여인이 땅을 팔려고 하지만 한 카우보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또 땅과 원주민들을 사랑하게 되면서 변해간다는 내용이다.
-당신 캐릭터는, 이를테면 아웃백의 버틀러로군.
=바로 그거다. (웃음)
-첫 번째 <엑스맨>이 개봉한 지 6년이 흘렀다. 할리우드의 명성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
=물론이다. 더 좋은 항공기 좌석을 얻고. 또 이렇게 좋은 호텔방을 제공받고. (웃음) 첫 <엑스맨>을 찍었던 해가 떠오른다. 나는 값싼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기의 이코노미석을 타고 비행을 해야만 했다. 이처럼 완벽하게 바뀐 삶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완벽한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