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힘의 무한증식과 공포의 파워게임, <엑스맨: 최후의 전쟁>
2006-07-05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핵무기 확산 둘러싼 미국의 공포 반영된 <엑스맨: 최후의 전쟁>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마블 코믹스의 만화 <X맨>에 영감을 준 흑인 혁명가 말콤 X(1925∼65)에 관해 알렉스 헤일리가 쓴 평전 <말콤 X>에는 콩크(conk)라는 단어가 나온다. 콩크는 백인 스타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바꾼 흑인의 머리를 일컫는 속어다. 백인의 외모를 닮기 원했던 많은 흑인들은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펴기 위해 독한 약품을 썼고, 뜨거운 양잿물과 바셀린과 생달걀이 섞인 그 약품을 바르며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아픔”을 견뎠다.

백인을 혐오하면서도 유사 백인 되기를 소망했던 젊은 말콤 X 역시 그런 아픔을 견디며 콩크 머리를 만들었다. 그 순간 그는 깊은 자기모멸에 빠진다. “내 자연스러운 머리가 백인 머리처럼 보이도록 흐느적거릴 때까지 양잿물로 내 살갗을 말 그대로 태우며 모든 고통을 견뎠다. 그럴 때 나는,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믿도록 세뇌되어 그래서 백인이 만든 미적 기준으로 예뻐 보이기 위해 신이 주신 육체를 훼손하는 멍청한 미국 흑인 무리 속에 들어간 것이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는 ‘큐어’라는 약품이 등장한다. 이 약품을 주입하면 돌연변이는 인간이 된다. 이 약은 말콤 X에게 고통과 모멸을 준 끓는 양잿물이 아니다. 주사 한방에 순식간에 정상인으로 바뀐다. 게다가 콩크처럼 부분적인 모방이 아니라, 유전자 자체가 인간으로 변이된다. 돌연변이라면, 그리고 주사 한방으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세상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 본성을 지닌” 인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큐어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양잿물과 큐어는 차이를 없애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전환하려는 기획이다. 전자는 하위 주체 스스로 발견한 조잡하고 불완전한 개인적 기획이며, 후자는 상위 주체가 하위 주체에게 강요하는 세련되고 철저한 국가적 기획이다. 말콤 X와 엑스맨들은 공히 그 기획에 유혹당하면서도 결국 그를 거부하고 차이를 보존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다. 물론 현실의 말콤 X는 암살당했고 그 차이로 인한 차별은 지속되고 있다. 반면 영화 속의 엑스맨은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인간과의 공존이라는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초인으로서의 돌연변이를 사회적 소수자로 설정

주요 인물들의 연원을 현대사의 실제 사건에서 찾고 공동체 영웅으로 활동한 과거가 주어져 있는 원작 만화와는 달리,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거의 모든 엑스맨들을 태생부터 저주받은 돌연변이로 설정함으로써 성적, 인종적 혹은 사회적 소수자의 알레고리를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알레고리가 이 시리즈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왔다. 그러나 여기엔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극히 단순한 사실 하나는, 엑스맨들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벽을 뚫고 다니거나, 뇌우와 토네이도를 일으키거나, 뇌파만으로 지상의 모든 존재를 전멸시킬 힘을 소유하거나, 거대한 금문교를 절단해 우주선처럼 움직일 수 있는 엄청난 염력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일부는 흉한 모습이지만 상당수는 보통의 인간보다 더 훌륭한 외모까지 갖추고 있다. 돌연변이라 불리지만 그들은 실은 초인이거나 신에 가깝다(매그니토는 큐어를 비웃으며 “왜 여신을 인간으로 전락시키려 하는가”라고 말한다). 평범한 우리는 차라리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물론 인간의 영혼으로 초인의 육체를 부여받은 슈퍼히어로의 외로움과 번민을 <슈퍼맨>과 <스파이더 맨> 그리고 <헐크>에서 알게 되긴 했지만.

<엑스맨>이 초인으로서의 돌연변이를 사회적 소수자로 설정하는 순간, 이 알레고리는 한 가지 딜레마와 마주치게 된다. 돌연변이와 인간의 차이는 흑인과 백인의 머리카락의 차이와 같지 않다. 계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현실에서 사회적 소수와 다수의 차이는 기호와 취향의 차이다. 소수자의 차별은 기호와 취향의 차이가 사회적 능력과 가치의 차이와 허구적 인과론을 만들어내면서 발생한다. 검은 피부와 가난, 범죄, 무지, 더러움은 내적 연관이 없지만, 이들의 연쇄는 흰 피부와 부유, 안정, 교양, 청결이라는 연쇄와 대립항을 형성한다.

소수의 반란은 결국 기만적 기호작용을 겨냥한 기호학적 전쟁이다. 콩크를 택함으로써 그것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흑인의 곱슬머리를 열등한 것으로 만드는 기호작용 자체를 폭파하는 일이 이 전쟁의 목표다. 어떤 다른 양식이 아닌 영화가 그 싸움의 전장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할리우드에서 이 싸움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간 인물은 팀 버튼이다. <가위손>의 에드워드, <배트맨>의 조커, <배트맨2>의 펭귄맨은 현존하는 이미지의 위계를 해체시키려는 기호학적 전사들이다.

기호학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돌연변이들

<엑스맨>의 난점은 돌연변이와 인간의 차이를 기호와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능력의 차이로 설정하고(<엑스맨>의 돌연변이는 한결같이 초능력자다), 초능력의 소유자들을 억압당하고 동정받는 소수자로 설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엑스맨>은 이 난점을 절충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먼저, 일부의 초능력에 어떤 결점을 부여한다. 로그는 연인의 손을 잡을 수 없고, 스캇은 맨눈으로 대상을 보지 못하며, 울버린은 손에 칼이 올라올 때 깊은 통증을 느낀다.

무엇보다 돌연변이의 일부에게 소수자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초록색 피부와 비늘을 지닌 미스틱, 히스패닉과 아프리칸 이미지의 변용인 커트(<엑스맨2>), 푸른색 피부와 고릴라의 털을 지닌 행크(<엑스맨3>)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울버린과 스톰, 스캇과 진과 로그, 아이스맨과 파이로는 모두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이며 자비에와 매그니토도 근사하다. 울버린의 도깨비 머리는 원작만화의 늑대인간 이미지를 흉내낸 것이기도 하지만, ‘백인이 만든 미적 기준’에 적합한 근사한 외모에 소수자의 이미지를 가미하려는 절충적 노력의 우스꽝스러운 사례다.

이들은 기호학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인물들이며, 그런 점에서 <엑스맨> 시리즈가 소수자 문제에 대한 지적 통찰이 깊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한 1, 2편이 그래도 더 뛰어나다면, 그것은 개별 캐릭터의 번민에 상대적으로 많은 숏들이 할애되고 있다는 점 외에도(1편에서는 울버린의 방황이, 2편에서는 진의 불안이 스펙터클에의 기대를 지연시키며 세밀하게 묘사된다) 상대적으로 잘 짜인 이야기와 뛰어난 시각적 아이디어 때문이다. 2편에서 플라스틱 감옥에 갇혀 있던 매그니토가 경비원의 피 속에 있는 철분을 끌어내 탈출하는 시퀀스의 시각 효과는 경탄할 만하다.

핵무기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알레고리

브렛 래트너가 연출한 3편 <엑스맨: 최후의 전쟁>은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볼 만한 시각 효과의 전시장이며 더 많은 장르가 혼재돼 있고 노골적인 인용들도 등장한다. <터미네이터> <엑소시스트> <라이프포스>(토브 후퍼), <제5원소>의 일부를 고스란히 옮겨온 장면, 심지어 <첩혈쌍웅>의 앵글까지 모방한 장면까지 눈에 띄며, 매그니토와 자비에는 <관계의 종말>의 팻과 빌리의 관계처럼 묘사된다.

무엇보다 3편의 다른 점은 전편들에서 절충적 묘사에 가려져 있던, 능력이라는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돌연변이는 더이상 우울하고 버림받은 소수가 아니라, ‘덜 진화한’ 인간들이 공포감을 느끼는 강력한 파워 집단으로 등장한다. 매그니토는 힘의 무한증식에 집착한다. 그는 돌연변이를 ‘더 진화한’ 종으로 여기며, 그중에서도 진에게서 진화의 완성을 발견한다. 그는 히틀러처럼 진화론적 파시스트처럼 보인다.

문제는 더이상 소수와 다수가 아니라, 슈퍼 파워에 대한 집착과 그것의 적절한 제어의 대립이다. 첫 장면에서 어린 진을 찾아간 자비에는 진에게 “너의 힘이 너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네가 너의 힘을 통제하도록 하라”라고 가르친다. 3편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진은 파괴를 추구하는 무의식의 힘이 지배하는 피닉스와 이성과 사랑을 믿는 진의 이중인격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간편한 인용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핵무기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알레고리에 가깝다.

돌연변이는 기성 질서의 외곽에서 형성 중인 잠재적인 슈퍼 파워다. 그들은 언제 세상을 뒤집을지 모른다. 인간은 기성 질서를 위협하는 그 새로운 파워를 기성 질서 안에 편입시키기 위해 그들 중 하나인 행크를 장관으로 임명한다. 그것은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공포의 표현이다. 그들의 형상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 두렵다. 그 공포감이 결국 큐어라는 약품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제어가 아니라 제거다.

종교 전쟁의 외피를 쓴 파워게임

여기엔 제3세계의 핵무기(혹은 대량살상 무기) 확산에 대한 미국인의 공포가 반영돼 있다. 돌연변이의 능력을 제거하는 큐어는 실은 양잿물이 아니라 NPT(핵무기확산방지조약)에 가깝다. 큐어에 반대하는 테러와 그것을 선전하는 매그니토의 방식이 아랍 테러리즘과 유사한 건 우연이 아니다. 매그니토는 돌연변이를 모아놓고 “우리가 큐어”라고 외친다. 이 구호는 인간과 돌연변이의 전쟁이 억압과 공존의 대립이 아니라, 종교전쟁의 외피를 쓴 파워게임임을 암시한다. 2편에서도 등장했던 폐쇄된 성당이 3편에서 돌연변이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다. 기독교의 폐허에서 그들의 새로운 종교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화려한 스펙터클이 등장하는 알카트라스섬에서 진이 무한대의 파워로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지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을 때, 제어되지 않은 슈퍼 파워는 마침내 핵무기처럼 지구의 종말을 향해 작동된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은 제거하지 않아도 제어가 가능하다고 결말짓는다. 갈등은 심원한데 해결은 간단하다. 진의 파괴력은 사랑으로 멈춰지며, 큐어는 폐기되고, 인간과 돌연변이의 공존이 선포되며, 돌연변이 장관 행크는 유엔 대사로 임명된다. 인간으로 돌아간 로그는 자비에 학교로 돌아와 드디어 아이스맨의 손을 잡는다. 사랑은 다시 찬미되며 돌연변이와 인간은 이렇게 포옹한다.

영화의 마지막 서비스는 괴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속편을 위해) 공포영화의 관습을 반복하며 자신의 멍청할 만큼 순진한 결말을 비트는 에필로그다. 돌연변이의 능력을 제거당했던 매그니토는 노인 요양소에서 혼자 장기를 두고 있다. 그의 손이 떨리자 몇 인치 앞에 있던 장기 말이 쓰러진다.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 라고 다시 진부하게 암시한다. 하지만 이제 돌아오지 않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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