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거리>는 어떤 호러물보다 무섭다. 그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귀신이나 외계생물체, 또는 ‘민간인과 분리되어 있다고 믿고 싶은’ 다른 세계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속한 단 하나의 세계’가 인간을 쓰윽 집어삼키는 것을 처연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때 노래가 흐른다. “사람들이 당신을 알았냐고 내게 물어오면, 나는 웃으면서 말하겠죠. 내 ‘친구’ 중 하나였다고♬”
친구라니 <친구>가 떠오른다. 조폭 동창생, 실제 조폭과의 관련성 등.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친구>가 조폭간의 칼부림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리’ 혹은 ‘우정’을 다룬 영화인 양 관객의 뇌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첫째, 정감어린 제목과 향수어린 과거장면이 빚은 착시현상 때문이며, 둘째, 두명의 조폭 친구가 죽고 죽이는 가운데, 두명의 민간인 친구는 구술자로 남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친구>는 우리의 동창생이 일원일 만큼 조폭세계가 가깝다는 실감을 불어넣으면서도,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로 봉합하여 관객을 안심시키고 잔혹함을 즐기게 한다.
그러나 <비열한 거리>는 그 ‘한뼘의 거리’를 허용치 않는다. 미소가 좋던 민호가 자기를 죽이려던 종수와 마주앉아, 황 회장의 노래를 들을 때, 그는 더이상 ‘조폭이 아닌 민간인’ 민호가 아니다. 그가 병두 대신 살아서 그곳에 있는 이유는 ‘한참 떴기 때문이고’, 황 회장의 딸을 캐스팅할 수 있기 때문이고, 경찰에게 병두를 밀고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민호를 통해 관객을 그 자리에 소환하며, (감독이든 뭐든 간에)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 살아남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 모두가 이 ‘통째로 조폭스러운 세계’에서 피묻히며 살아가는 조폭과 다름없음을 역설한다. <비열한 거리>는 더이상 “깍두기는 깍두기 세계에 산다, 절대 민간인 세계로 넘어오지 않는다”를 외치는 ‘쌩까는 짓’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초록물고기>처럼 ‘심성은 착했던 조폭’의 삶과 죽음을 연민으로 포착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욕망, 가족에 대한 사랑은 병두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상철도 여동생 결혼이 중하고, 황 회장의 딸 사랑도 지극하다. 민호의 성공의지 역시 마찬가지다. 병두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착한 조폭이라서가 아니라, ‘조폭의 삶과는 다른 민간인의 삶’을 간절하게 동경했다는 것, 그런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건달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반달” 황 회장의 일을 하는 그가, 화목한 피로연장에서 “형을 봐버린” 그가, 하나의 세계의 이면으로서의 (비)폭력이 아닌, ‘비/폭력의 다른 세계’를 꿈꾸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영화는 그의 센티멘탈리즘과 가족애를 연민하지 않는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의 죽음은 가족을 먹여살리지만, 병두는 그냥 사라! 질 뿐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남동생은 조폭이 되고, 여동생과 연인은 위태롭게 기다린다.
영화는 ‘영화 속 영화’를 통해, ‘조폭영화의 판타지와 진실’이라는 OX문제지를 제시한다. “실제 싸움이랑 많이 다르다”는 병두의 말처럼, <비트> 이래 자주 빠지며, <말죽거리 잔혹사>의 옥상신도 반쯤 빠져 있던 휘황한 액션은 진실이 아니다. 싸움은 멋지지 않고, 비참할 뿐이다. 돌려차기를 빼자던 민호의 말처럼, 영화는 ‘진흙탕 싸움의 비루함’을 말 그대로 재현하며, (영화 속 영화의 과장된 살인장면과 대비되는) 절제된 장면을 구현한다.
영화는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찐한 건달영화를 만들어달라”는 대사를 반어적으로 곱씹는다. 상철-병두-종수로 이어지는 살인의 계보가 말해주듯, (<약속>의 조직과 두목을 위해 죽는) ‘의리있는 조폭’은 판타지다. 배신이 난무하는 ‘비정한 조폭’이 진실이다. 그들의 일 역시 <약속>이나 <모래시계>에서처럼 폼나지 않는다. 그들이 음지에서 ‘비열하게’ 협박하면, 양지에 ‘위풍당당한’ 타워팰리스가 들어선다. 비열한 욕망의 구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바로 여기가, 단 하나의 세계 ‘비열한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