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B영화의 역량과 도발 엿보기, B무비 특별전
2006-06-3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냥꾼의 밤> <악마의 씨> 등 김지운이 추천하는 B무비 특별전
<악마의 씨>

‘B무비 특별전 Presented by 김지운’이 6월30일(금)부터 7월7일(금)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찰스 로튼의 기괴한 필름누아르와 새뮤얼 풀러의 타블로이드판 범죄영화의 세계를 먼저 주목할 만하다. <사냥꾼의 밤>(1955)은 유명 배우 출신의 찰스 로튼이 55살에 만든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영화이며, 당대의 철저한 실패 끝에 신화로서 남게 된 불우의 고전이다. 돈을 차지하기 위해 어린 남매를 쫓아다니는 로버트 미첨의 악인 연기가 일품이다. 동화 같은 이야기와 정교한 미장센이 어우러져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로버트 미첨의 연기와 그의 양 손가락에 새겨진 사랑(LOVE)과 증오(HATE)라는 글자는 후대 감독들의 영화에도 종종 영감을 미쳤다. 한편, <네이키드 키스>는 젊은 시절 타블로이드 신문의 저널리스트에서 출발해 영화의 원시주의자로 나아간 새뮤얼 풀러의 폭력과 도덕의 이중주를 대표하는 영화다. 매춘부 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시골마을로 흘러들어온 여인이 점잖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폭력으로 아이들을 다루는 남자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다룬다. “그의 영화에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마틴 스코시즈의 말처럼 개인의 분열이 법의 영역으로 유입되어 가십을 사회적 공포로 바꿔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새뮤얼 풀러의 전작 <충격의 복도>와 뒤집힌 합을 이루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 브라이언 드 팔마, 피터 위어로 이어지는 심리적 공포영화의 궤적을 따라가도 좋다. 로만 폴란스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영화 <악마의 씨>에서는 뉴욕의 한복판에 거주하는 광신도 집단과 그들이 숭배하는 악마가 주인공 로즈마리에게 악의 자식을 잉태시킨다. 피의 효과가 아닌 소름 돋는 분위기로 악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럼으로써 브라이언 드 팔마는 자신의 초기작 <시스터즈>를 만들면서 두편의 영화에 부분적으로 빚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한편은 히치콕의 <싸이코>이고, 또 한편이 바로 이 영화 <악마의 씨>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러시아의 샴쌍둥이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나서 영감을 얻어 만든 <시스터즈>는 이후 그의 영화 속에서 이어질 살인과 도착에 대한 드 팔마식 영화의 정전으로 손꼽힌다. 마찬가지로 피터 위어가 초기 호주 시절에 만든 몽환적이면서도 순결한 공포영화 <행잉록에서의 소풍> 역시 위어의 상상력에 대한 근원을 파악해볼 수 있는 걸작이다. 1900년 멜버른의 상류층 여학생 몇몇이 행잉록이라는 바위산으로 소풍을 가지만, 그중 세명이 실종되는 일이 일어난 뒤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서 마을은 공포감이 감돈다. 미스터리한 이야기 구조와 몽환적인 스타일이 겹쳐 더없이 두터운 정신분석학적 교재로 선호되기도 한다.

일본의 스타일리스트 이치가와 곤의 <열쇠>와 데시가하라 히로시의 <모래의 여자>를 따라가는 관람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열쇠>는 어느 의사가 한 가족과 맺게 되는 복잡한 성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소설의 관능적인 묘사력을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로 옮겨오는 데 주력하고 있다. 데시가하라 히로시의 <모래의 여자>에서는 한 곤충채집자가 우연히 모래로 덮인 사막의 집에 감금되어 살게 되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는 내용이다. 당대의 뉴웨이브 그룹과 동세대였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세계를 추구한 데시가하라 히로시는 아베 고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 속에서 실존적 문제, 정체성 문제 등을 “상징의 판타지”로 옮겨낸다. 자신이 흡혈귀임을 밝히는 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되는 김지운의 디지털 단편영화 <커밍아웃>은 바로 이런 영화들과 영감을 공유하고 있는 후대의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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