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서크 회고전이 7월8일(토)부터 17일(월)까지 10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미국의 영화사가 토머스 샤츠는 멜로드라마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영화 자체의 독특한 기능에 대해 어떤 감독보다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던 감독으로 더글러스 서크를 꼽는다. 실제로 서크는 사회를 해석하는 데 멜로드라마가 가장 적절한 토양이라는 것을 꿰뚫어본 감독이었다. 일반적인 할리우드영화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미국적 이데올로기의 가치와 모순을 재조정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할 때, 서크는 멜로드라마의 매혹적 환상으로 인해 망각하기 쉬운 실제적 조건, 즉 우리의 선택과 역할은 일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결정되며 결코 그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점을 자신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서크가 독일에서 건너온 다른 감독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작의 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1950년부터 1959년까지 유니버설 소속으로 연출한 작품만 21편이었다)만으로도 그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그의 멜로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남성 캐릭터, 즉 ‘동상처럼 변화하지 않는 고정성’을 지닌 남성 주인공의 대표적 배우인 ‘록 허드슨’과의 첫 만남이었던 <마음의 등불>(Magnificent Obsession, 1954)의 성공은 서크가 테크니컬러로 ‘여성 최루성 영화’의 연출에 주력할 수 있게 한 중요한 계기였다. 그리고 이후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All That Heaven Allows, 1955), <바람에 사라지다>(Written On The Wind, 1956) 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멜로드라마 감독으로 안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 성공은 앤드루 새리스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서크와 그의 영화들을 망각의 우물에서 건져내기 전까지는 비평적 관심에서 사라지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서크는 표면적으로는 영화의 스토리를 무척 세련되고 간결하게 처리하여 여성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과 조우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영화적 형식과 스타일은 오히려 그 스토리를 배신하도록, 달리 말해 영화의 형식과 스타일이 스토리의 허구성을 들춰냄으로써 표면과 이면이 서로 충돌하는 효과를 창출하곤 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슬픔은 그대 가슴에>(Imitation Of Life, 1959)의 한 장면을 보자. 연극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한없이 질주했던 여주인공 로라(라나 터너)가 사는 저택의 화려한 거실에는 큰 유리창 너머로 넓은 정원이 보인다. 그런데 서크는 그 정원이 영화 촬영을 위해 인위적으로 구성된 세트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는 로라의 모습 뒤편에 펼쳐진 정원의 반환영적 세트는 ‘이것은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로라의 성공이 영화의 허구적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이는 <바람에 사라지다>의 인공 호수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의 창밖 풍경 등 그의 여러 영화에서 반복되는 반환영적 기법이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영화다”라고 말하며 브레히트의 가르침을 계승하고자 했던 서크는 멜로드라마를 ‘기능’하게 하는 것은 스토리가 아닌 영화의 형식과 스타일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으며, 그 확고함이 ‘서크 영화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비평가로서의 서크’를 가능하도록 했다.
서크는 이러한 영화적 형식과 스타일을 바탕으로 내러티브 전개 과정에서 사회적 조건의 모순과 제약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도록 했다. 그의 작품이 멜로드라마에 편중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러브스토리 자체에 대한 매혹이 아닌 그것을 구조화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서크 스스로가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는 사회의 구조는 사랑 그 자체만큼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는 이를 위해 영화의 엔딩을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기를 즐겼다. 무엇보다 <바람에 사라지다>나 <몰락한 천사들>(The Tarnished Angels, 1958) 등에서 적절히 드러나는 것처럼, 서크는 갈등이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완전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이는 연인들의 결합을 방해했던 갈등의 원인이 영화의 허구적 세계에서 구축된 것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도출된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규정짓는 사회적 조건을 돌출시키는 것이야말로 서크가 말하는 멜로드라마의 기능이었던 셈이다. 사회의 근본적인 갈등과 적대를 영화의 자기 반영성(진실)을 통해 환기시킴으로써 할리우드 멜로드라마가 약속하는 낭만적 가치를 어지럽히는 얼룩을 짙게 남겨두는 것, 그것이 바로 서크의 작품 속에 내재된 ‘낭만적 거짓과 영화적 진실’이었다.
주요 상영작 소개
<마음의 등불> Magnificent Obsession 1954년
서크가 자신의 소속사였던 유니버설과 함께 지속적으로 멜로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자, 그저 잘생긴 삼류 배우에 불과하던 록 허드슨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이자 방탕한 사생활을 일삼던 남자주인공 밥이 모터보트를 고속으로 몰다 사고가 난다. 밥을 살리기 위해 지역에서 가장 명망있는 필립이 사용하는 인공호흡기를 빌려온 사이에, 발작을 일으킨 필립이 그만 목숨을 잃는다. 밥은 필립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씻기 위해 그의 부인인 헬렌을 찾아가지만, 그로 인해 헬렌마저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된다. <거대한 강박관념>에는 이후 서크가 보여준 낭만적 사랑의 표면을 어지럽히는 사회적 조건은 그다지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지닌 실존적인 한계와 그것의 극복을 위한 숭고한 행위로서의 희생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바람에 사라지다> Written on the Wind 1956년
서크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서크의 멜로드라마가 지닌 여러 특징들, 즉 미장센과 카메라 스타일을 통한 소격 효과, 행복하지 않은 해피엔딩, 동상처럼 정적인 남성 캐릭터로서의 록 허드슨, 낭만적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의 근본적인 분열과 갈등 등이 적절하게 조화된 작품이다. 서크는 이 작품에서 남자주인공인 카일의 죽음이라는 영화의 후반부를 먼저 보여준 뒤, 비극적 사건에 이르는 과정을 플래시백으로 전개시킴으로써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희망은 어떻게 사라지는가’라는 주제에 관객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바람에 사라지다>는 한 가족이 비극적 결말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미국사회의 계급적 단절과 점차 빛이 바래지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서크의 냉정한 현실 인식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홀로 남겨진 메릴리가 흐느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과 함께 서크 영화의 엔딩 중에서도 가장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 1958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서크가 나치의 등장과 함께 떠나야 했던 독일에 대한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멜로드라마와 전쟁영화를 결합해놓음으로써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 속에서 전쟁이라는 보편적 비극뿐만 아니라 나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도 강하게 드러난다. 사랑을 막 느끼기 시작한 주인공 남녀는 폭격에 의해 불에 타버린 집 옆에 서 있는 나무에서 한겨울에도 꽃이 피어 있음을 발견한다. 집이 타면서 발생한 열기로 인해 나무에서 꽃이 핀 것이다.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버린 비극적 상황이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어 피어난 아름다운 꽃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제를 적절하게 암시하고 있다. 서크는 이 영화에서 반환영적 장치의 사용을 자제하면서도, 어떻게 멜로드라마의 서사가 사회적 비판 의식과 결합할 수 있는지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itation of Life 1959년
서크가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만든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멜로드라마 세계를 완결짓고 있다. 존 M. 스탈에 의해 1934년 연출된 동명의 원작과 비교해보면, 서크의 멜로드라마가 갖는 독자적 특징을 더욱 효과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서크는 이 작품에서 원작이 은폐했던 여성들의 욕망을 더욱 강조한다. 특히 연극배우를 꿈꾸는 로라는 원작의 주인공과 달리 성공에 대한 욕망이 훨씬 강렬하게 변형되었고(원작에서는 그녀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흑인이지만 백인의 피부색을 지니고 있는 사라의 정체성의 혼란은 더 극심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에는 멜로드라마의 허구적 세계관으로부터 관객의 거리를 확보하려는 여러 장치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긴 시간의 경과를 무시하듯 사소하게 처리하는 방식이다. 10년을 하루처럼. ‘희망없는 미국’에 대한 서크의 비판 의식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