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과 조재현, 전작 <실미도>로 1천만 관객을 불러모았던 감독과 아직까지 ‘김기덕의 페르소나’ 이미지가 남아 있는 배우의 만남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블록버스터와 저예산영화의 만남? 양지와 음지의 조화? 직설화법과 간접화법의 절충? 영화 <한반도>의 조합은 이렇게 낯설었다. 특히 한강 다리 밑에서 시작된 조재현의 발자취가 미군 기지촌과 사창가를 거쳐 한반도로 이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에 강우석 감독이 출연 제의를 해왔을 땐 나도 의아했다. 강 감독과 나는 잘 맞지 않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한반도 역사를 다룬 영화라고? 나는 보통 국민보다도 국가관이 철저하지 못한 사람이다.” 조재현은 강우석 감독의 신작 <한반도>에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사학자 최민재를 연기했다. “애국심? 김기덕 영화에 출연했던 내가 무슨 애국심이 있었겠나? 그냥 그건 내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애국심 만들기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해군, 공군 기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국가 기밀이라 말할 순 없지만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그쪽에 계신 분들은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매우 답답해하더라. 특히 국민들의 무지에 대해. 그분들의 심정이 민재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2001년 조인성과 출연한 드라마 <피아노>는 배우 조재현을 인기 스타로 만들어놓았다. ‘사랑한데이, 알러뷰~’로 대표되는 부성(父性) 연기와 한억관이란 맹부 이미지, 이는 조재현을 설명하는 새로운 수식어가 되었다.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등에서 보여줬던 야생의 연기는 어느새 아버지란 마스크 아래서 동면을 취하고 있었다. 이후 조재현은 코미디영화 <목포는 항구다>와 <맹부삼천지교>에 출연했다. “일부 내 마니아들은 내가 작품 선택을 잘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둘째아들도 했던 사람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나라는 사람의 한 부분일 뿐이다.” 조재현은 자신을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코미디 두편을 한 것도, 멜로영화 <로망스>에 출연한 것도 모두 그 당시 코미디와 멜로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저예산영화를 계속하리라는 다짐도 변함없다. “조금씩 지연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저예산영화, 의미있는 작품에 대한 열정이 있다. 그래서 <천년학>에도 출연한 거다. 임권택 감독님과 정일성 감독님은 모두 칠순이 넘으신 분들이다. 하지만 그 열정은 대단하시다. 그분들과의 작업이라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을 촬영을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는 <천년학>의 한 장면을 살짝 일러주기도 했다. “오정해씨가 칠십 노인의 소실로 들어간다. 그러다 노인은 죽고, 오정해씨가 중모리 장단에 맞춰 창을 한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이것도 꿈이고, 저것도 꿈이다.’ 정일성 감독님이 이 장면을 보시면서 ‘저렇게 죽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이것도 꿈이고, 저것도 꿈이요. 그때 이런 정서를 갖고 계신 분과 영화를 찍는다면 굉장히 설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로 42살인 그는 마흔 이후 더 젊어진 것 같다고 했다. “어렸을 땐 꿈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 길이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계속 무언가 색다른 걸 찾게 된다.” 그는 최근 10년 만에 다시 붓을 잡았다. 휴대폰 속에는 그가 그린 그림의 사진도 저장돼 있다. 인체의 육감이 그대로 드러난 크로키, 고개를 숙인 여자의 나체. 에곤 실레가 떠오른다. 나쁜 남자의 귀환? “자신에게 아예 없는 것을 연기하는 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에게 있는 부분을 좀더 크게 표현하는 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주제는 허무다. 나에겐 항상 허무가 있는 것 같다. 그 허무감을 채워나가기 위해 새로운 걸 찾는 거다.” 그는 ‘맹자님 책상다리 같은 얘기 같지만’이란 말로 대화를 이어갔다. “배우의 길은 5만7800가지(웃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를 내가 택한 거지. 내가 택한 배우란 채워지지 않는 존재다. 끊임없이 결핍되고, 끊임없이 채우는 과정. 이것이 연기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꽉 차 있다고 느낀다면, 연기를 그만둘 거다.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는 느낌, 앞으로 좀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감, 이것이 내가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