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우리에겐 축적된 공포문화가 없다, <아파트> 안병기 감독
2006-07-11
글 : 김도훈
사진 : 이혜정

지난 5월 촬영 종료를 며칠 앞둔 부산의 현장에서 만난 안병기 감독은 조금 지쳐 보였다. 도저히 피로를 느낄 것 같지 않은 기골장대한 감독은 네 번째 공포영화에 대한 중압감으로 인해 눈 밑 다크서클이 완연했다. 시나리오가 7고까지 나왔던 지난해 여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때 안병기 감독은 “여태껏 만들어온 영화를 정리하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는데 시나리오만 7고째 쓰다가 지쳐서 쉬고 있다”는 고충을 막막하게 털어놓았다. 게다가 개봉을 눈앞에 둔 지난 6월22일에는 <아파트>의 배경이 된 아파트 입주민들이 영화에 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안병기 감독은 개봉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오랜 시간 부담감을 안고 만들어온 작품이라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게 다 공포영화만 고집해온 덕이고 탓이려니. 그동안 공포영화는 그만 만들겠다고 종종 말해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감독은 로버트 저메키스의 <왓 라이즈 비니스>를 봤을 때를 회상했다. “공포영화는 만드는 사람에게도 중독이다. 저메키스의 <왓 라이즈 비니스>를 봤을 때가 기억난다. 첫 장면에서 미셸 파이퍼가 부두로 내려가 물속을 들여다보면 해초와 함께 사람 머리가 보이는 장면이 있다. 미치겠더라. 전율이 생기더라. 나도 그런 걸 해보고 싶더라. 공포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누구도 해보지 못한 색다른 장면을 연출하는 순간이다. 자기 만족에 안하무인인 말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정말 감독 혼자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네편의 공포영화를 지치지 않고 만들어온 이유일 것이다. <아파트>의 개봉을 기다리는 안병기 감독의 근심과 걱정과 조바심, 그리고 변화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파트>에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코미디 전문 감독이었다면 차라리 편했을 거다. 코미디는 다양한 장르니까 액션코미디도 가능하고 로맨틱코미디도 가능하고. 하지만 공포영화는 매우 전형화된 장르라 네 번째 작품인데도 새롭지 않은 것 같다는 걱정이 든다. 관객에게 자꾸 새로운 걸 보여줘야 공포영화 시장이 유지되는데 말이다. <아파트>는 원작과 90% 다른 내용이지만 원작에서 도입한 10%는 건너편 아파트의 죽음을 목격한다는 설정과 원귀 이야기다. 그래서 결국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원귀가 나오는 공포영화를 한다는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안병기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고 있는 장르팬들은 여전하지 않나.
=가장 큰 부담이 그거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건데 해외에서는 공포영화 관객층이 비교적 두터운 편이라 정공법적이지 않은 공포영화도 작가적 색깔만 확실하다면 환영받는다. 한국에서는 감독의 색깔이 지나치게 특이하면 관객이 외면할 소지가 크다. 게다가 투자자들은 분명한 수익을 내기 위해 공포영화에 투자한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이 감독으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도전하길 두려워하게 만든다.

-시나리오를 쓰는 데 고충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최종적으로 13고까지 나왔다는데.
=시나리오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 채로 촬영에 들어갔다. 원작을 영화적으로 변환하는 게 너무 힘들었고, 탈고 당시에도 개운하지 않은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프리 프로덕션이 상당 부분 진척된 상태라 영화의 엔딩도 완벽하게 설정해놓지 않은 채 촬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많은 공포영화들이 보여준 설정들을 또 반복해야 하나 싶어서 촬영장에서 잠도 못잔 채 고민하는 일이 많았다. 여태껏 공포영화를 만들어오면서 많은 벽에 부딪혔으나 이번만큼 힘든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영화를 만드는 중에 <샤이닝> 메이킹 필름을 봤다. 스탠리 큐브릭이 바로 나더라. 둘 다 갇힌 공간에서 영화를 찍는데 머리는 안 돌아가니 미쳐가는 거다. 내 방에 조그마한 쪽창이 있는데 해뜰 때까지 강화도 펄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갑이나 펴댔다. (웃음)

-완성된 영화는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추리극의 요소와 전형적인 안병기식 공포영화 사이의 절충이라는 느낌이다.
=그렇다. 이야기 자체에 담겨 있는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를 복잡하게 엮다 보니까, 쇼크 효과 외에 공포를 느낄 만한 부분들이 좀 약화되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고어장면이나 갑작스러운 쇼크 효과가 예전 작품들보다 훨씬 절제되어 있는 건 예상 밖이었다.
=이제는 아시아 공포영화의 영향으로 할리우드 공포영화에까지 원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슷하게 해봤던 장면들을 굳이 또 해야 하나 싶었다. 사실 콘티대로 만들지 않은 부분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조연들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도 사실은 지금보다 훨씬 강하게 설정했다. 그런데 현장에 가서는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촬영을 끝내버렸다. 스탭들이 ‘감독님 왜 이러세요?’라고 걱정하고. (웃음) 전에 다 해본 장면들인데 똑같이 반복할 수는 없다고 스탭들에게 설명했다. 그랬더니 ‘이젠 다른 거 하셔야죠’ 하더라. (웃음)

-그런데도 의외로 18세 관람가가 나왔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폰> 같은 경우는 아직도 방송판권을 팔지 못했다. 원조교제가 나온다는 이유다. 주인공 소녀가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건 명백한 사랑 아닌가. 심의위원들은 그걸 굳이 원조교제로 보더라. <아파트>는 장애우가 학대당하는 부분 때문에 18세를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아파트>가 원작이랑 다른 부분은 현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삽입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홈리스가 동반자살하고, 장애우들이 학대당하고, 영화 속에 나오는 이런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항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런 것들을 넣음으로써 리얼리티를 살리고 싶었는데 심의위원들은 동의할 수 없었나보다.

-촬영 장소로 쓸 아파트를 구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겨우 구해서 찍은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상영금지가처분 소송을 당했는데.
=전국을 다 돌아다니며 물색했지만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지은 아파트를 구해서 합의를 보고 계약을 해서 촬영을 진행한 거다. 그런데 주민들 항의가 들어왔고, 카메라를 아파트 밖으로 내보내서 찍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합의를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더이상 찍지 않겠다고 말하고 제 발로 걸어나온 거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구해지는 장소에 따라 시나리오를 고치고, 세트 먼저 들어가서 찍다가 장소가 섭외되면 다시 나가서 찍고. 그렇게 여러 군데서 찍어서 조명톤만 같게 해서 연결시키고. (웃음) <아파트>는 여태껏 내가 만든 영화들 중 가장 프리 프로덕션이 힘든 작품이었다.

-한 아파트 공간에서 느긋하게 촬영을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스태디캠으로 진득하게 흘러가는 장면 같은 것이 없어서 아쉽지 않은가.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좀더 복합적이고 직접적으로 아파트라는 공간이 와닿았을 거다. 어떤 부분은 서울에서 찍고, 아파트 뒤편은 부산, 옥상은 또 다른 곳, 이렇게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찍었으니. (웃음)

-즉흥적인 연출이 많은 편이지만 이번에는 특히 즉흥적인 연출이 많을 수밖에 없었겠다.
=장소 대여가 되지 않으니까. 심지어 엘리베이터 공간도 안 빌려주더라. 이제 공포영화 찍으려면 숲이나 굴로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웃음) <폰> 때는 사람들에게 피해주기 싫어서 영화 속 휴대폰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내 번호를 썼었는데, 나중에는 뒷번호만 같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다며 모여서 소송을 건다더라. 어쩔 도리가 있나. 그냥 잘못했습니다 해야지. 이번 가처분신청소송도 그거랑 아주 비슷한 사건인 것 같다.

-결과는 언제 나오나. 개봉에는 차질이 없는 것인가.
=6월30일에 공판이 열릴 예정이고, 오늘 법원에 자료를 제출했다. 개봉에는 문제없을 것이다.

-공포영화에서 감독의 페르소나로서 배우는 중요하지 않나. <아파트>에서 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고소영에게 고마워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 스타가 필요했는데 몇년을 쉬던 중에 우리 영화를 선택해줬다는 고마움이다. 사실 어떤 연기자든 이런 헐거운 프로덕션 과정을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촬영장도 바뀌지, 시나리오도 바뀌지, 열악한 조건에서 큰 말 없이 따라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있다. 사실 내 영화에 출연한 모든 연기자들에게 가장 미안한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한국에는 배우가 캐릭터에 동화할 수 있을 만한 공포영화 시나리오가 거의 없다. <샤이닝>의 잭 니콜슨이 나올 수가 없는 거다. 한국 공포영화 시나리오에서 연기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놀라고 겁에 질리는 것밖에 없다. 이건 스스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데, 시나리오가 그런 걸 못해주니 스타들이 공포영화 한번 하면 다시는 안 한다고 하지 않나.

-창조적인 공포영화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기 때문 아닐까. 여름용 기획영화로 만드는 영화들의 시나리오는 공포영화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 쓰는 경우가 많으니까.
=<가위> 때부터 종종 이야기하는 건데, 일본이나 미국은 공포소설을 쓰는 작가도 많고 만화부터 시작해서 축적된 공포 문화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게 아예 없다.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제대로 쓰는 작가도 없다. 그러다보니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직접 쓰게 된다. 하지만 나는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면서 느꼈던 두려움과 들어온 괴담들을 영상화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이야기로 완벽하게 풀지 못한다는 거다. 이게 바로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으로서의 한계다. 한국 공포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딱 하나다. 시나리오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가위>와 <폰>에는 장르적으로 달려가는 거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원작을 각색한 <분신사바>와 <아파트>의 경우 그런 거친 힘이 중화되었다는 느낌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쓸 때가 원작을 각색할 때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쓰면서도 스스로 신이 난다.

-다음에 들어갈 작품들은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바탕인 것으로 알고 있다.
=<분신사바> 이후에 생각해두었던 세 가지 프로젝트 <행운의 편지> <도어> <포룸> 중에서 하나를 가려고 한다. 현재로서 제일 끌리는 것은 문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내용의 <도어>고, 슬슬 재밌어 보이는 건 한층에 4개의 방이 있는 원룸 이야기인 <포룸>이다. <도어>는 스케일이 크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하고 싶다.

-<폰>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는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나.
=매버릭 영화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구체적으로는 말하기 힘들지만 올해 안에 확실한 움직임이 있을 거다.

-이제는 공포영화 전문감독이라는 이름을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 여름 공포영화 시장이 열린 것도 <폰>의 성공부터가 아닌가.
=지금 나는 한국에서 유일할 ‘뿐’인 공포영화 감독이다. 유일한 공포영화 감독과 유일할 ‘뿐’인 공포영화 감독은 뉘앙스가 다른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항상 양질의 공포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아파트>까지는 한국영화의 산업구조 속에서 투자와 배급을 따져가며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인 꿈이라면 내가 감독한 공포영화 10편을 모아서 DVD 팩을 만들어 선물하는 것이다. (웃음)

-그같은 감독으로서의 비전은 공포영화 제작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토일렛픽쳐스에 대한 비전과도 함께 가는 것 아닌가.
=요즘은 기성 감독들이 공포영화를 한번 해보고 싶다며 토일렛픽쳐스에 시나리오를 갖고 오기도 한다. 거기서 조금만 더 발전하면 된다. 그때는 영화사의 특성을 제대로 살려가며 회사를 키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포영화에 대한 투자 환경은 어떤가. 저예산으로 만들어 단기간에 많이 벌고 빠지는 여름용 기획영화라는 게 투자하는 쪽에서 바라보는 공포영화 아닌가.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기획영화로 무조건 투자하는 데서 발전해 투자자들도 캐스팅과 감독을 유심히 챙긴다. 나의 경우 지금까지 어느 정도 수익도 냈고, 해외 투자도 계속 들어오는 편이어서 자본에 대한 걱정 크게 없이 작품을 하는 것 같다. 여건과 환경은 나쁘지 않으니까 이제 제대로 된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전엔 투자와 제작을 자체적으로 다 소화했기 때문에 돈도 무지 아꼈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돈 들여서 관객을 더 들게 하는 게 맞는 거다. 적게 들여서 수익 많이 남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번에는 돈 쓸 데도 없었다. 찍다가 쫓겨나길 반복해서. (웃음)

-이제 개봉이 일주일 남았다. 부담감이 가장 컸던 작품이라 걱정도 그만큼 클 듯하다.
=<아파트>가 네 번째 공포영화 아닌가. 공포영화 수준들이 다 그 모양이던 지지난해, 그래도 공포영화 전문감독이라는 내 작품 <분신사바>만큼은 좀 달랐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이제 스크린쿼터도 74일로 확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영화 한해 제작편수가 40여편에 그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 그중에 공포영화가 설 자리가 있을까. 물론 영화야 흥행이 잘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건 어느 감독이나 겪는 고민이다. 하지만 <아파트>가 잘되지 않으면 한국에서 공포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들어질 수도 있을까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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