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의 양극화가 눈에 띄게 심화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개봉되는 CGI(Computer Generated Image), 즉 3D디지털애니메이션마다 모두 흥행에 성공하고, 늘 새로운 수익모델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픽사가 월트 디즈니에 매각되었다고 하지만, 실은 전통적인 2D애니메이션의 제왕이 3D애니메이션의 혁명군에 점령당한 모양이 되어버렸다. 드림웍스도 PDI와 합쳐지면서 파라마운트에 영입되는, 실로 디지털애니메이션의 첨병들이 할리우드 전쟁터의 가장 선두에 배치되는 전성기가 본격화되고 있다. <아이스 에이지>로 세상을 놀라게 한 블루스카이는 제작 메커니즘의 새로운 시도와 차별적인 스토리라인으로 틈새시장을 계속 확대하고 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까지 <폴라 익스프레스>를 통해 제기한 차세대 영화제작 시스템을 <몬스터 하우스>로 확정지으려는 고집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화려하게 시장을 휘젓고 있는 3D애니메이션을 앞세우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수호신처럼 시장의 전열을 다시 재정비하고 있는 기존의 영웅들, <슈퍼맨>과 <엑스맨>은 모양만 실사영화지 대부분이 CGI애니메이션인 변장한 영화의 형식을 강화해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형식들이 영화시장의 대안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영상산업의 혁신과 진화모형을 선도하고 있을 때, 국내 애니메이션계는 계속 정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탐험가처럼 여러 가지 시도는 하지만, 똑 부러진 성공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얼어붙은 투자시장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제작과 투자의 양극화 시기에 <아치와 씨팍>은 마치 ‘그럼 어쩌란 말이냐’는 식으로 세상에 자신의 호기를 들이댄다. 삼순이가 다이어트를 잠시 포기하고, 가족들이 모두 잠이 든 한밤중에 양푼에 하나 가득 고추장비빔밥을 비벼먹으며 소주 한잔을 걸치고 툭 던지는 말처럼 “세상 사는 게 뭐 별거냐”라는 식의 솔직한 몸부림을 <아치와 씨팍>은 우리 앞에 벌여놓고 있다. 그래서 반갑고 고맙다. 항상 한국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고 나오면 꼭 열심히 하고 마지막 골 결정력 부족으로 아깝게 지고 마는, 열심히 패기있게 한 것은 인정하는데, 가슴 한켠이 답답해오는 한국 축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마리이야기>도 그랬고, <오세암>도 그랬다. <원더풀 데이즈>는 더 그랬다. <신암행어사>와 <왕후심청>에 이르면 이제 그래도 고생하고 잘했다고 격려하는 것조차 지쳐버리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아치와 씨팍>은 솔직히 그렇게 녹록지 않다. 관객을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기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지치게 만들기는 한다. 그러나, <공포의 외인구단>의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선수들이 세상을 뒤집어버리듯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디즘을 통해 보여준다. 욕설과 속어가 난무하고 초당 1명 이상씩 새빨간 피를 토해내며 죽어나가는 애니메이션, 더럽고 추잡하고 유치한 담론들이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까지 이야기를 내동댕이치는 애니메이션, 그러나, 그러한 모습들의 뒤편에는 숨겨진 스텍터클과 현란한 액션이 세계 영화사의 각 부분을 담당한 중요한 장면들로 패러디되고 오마주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어이없을 정도다.
애니메이션으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핵심
‘몸통만 있고 머리가 없다’, ‘계획만 난무하지 기획과 시나리오가 없다’, ‘영화적 마케팅과 배급이 문제다’, ‘영상미가 부족하고 음악도 없다’, ‘할리우드식 구출과 탈출의 플롯이 미흡하고, 반전의 충격이 살아나지 않는다’, ‘전체적인 긴장감이 없고, 매번 비슷한 공식이 관객을 힘들게 한다’ 등 한국 애니메이션을 두고 항상 등장하는 한탄과 자책들의 한숨 소리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꼭 애니메이션으로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만 설명되고 관객에게 차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 애니메이션으로만 보아야 해소될 수 있는 문제들, 그런 이야기의 형식이 새로운 애니메이션 지형에 필요한 대안이다.
<아치와 씨팍>은 그런 대안의 전형이다. <아치와 씨팍>에 등장하는 대사와 사건들을 실사영화로 CGI를 입혀 특수효과로 덧칠을 하고 만들어냈다고 생각해보자. 진짜 난센스가 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동안 실제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영화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굳이 어렵게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주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에 동승해온 서포터스는 아니었는지 고민하게 된다. 애니메이션이 영화시장에 등장한 1908년부터 애니메이션이라는 제작방식과 차별화된 장르가 100년이 넘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실사영화와 다른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끝없이 저항하고, 끝없이 지적하고, 끊임없이 들이대는 그것도 원초적인 제작방식의 노가다식 패기로 애니메이션은 생존해온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존재근거는 문제제기에 있다. 실사영화가 보여주지 못하는 1초의 공간에, 24프레임이라는 볼 수 없는 시간의 공간을 극대화해 미세한 담론들을 하나씩 하나씩 현실화하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캐릭터의 상대적 박탈감이 내 이야기로 묻어나야 하고, 내뱉는 대사와 차별화된 움직임이 내가 해낼 수 없는 한계의 마지막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솔직한 애니메이션의 모습들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에는 동물들이 사람보다 더 솔직한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자신감의 신화가 일본식 판타지로 존재한다. 그런 패기를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어떤 보이지 않는 막으로 가려진 그런 답답함이 솔직히 있었다.
<아치와 씨팍>은 솔직하게 한국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전제하고, 그런 한계를 딛고 주장할 수 있는 장치들을 개발한 프로젝트여서 반갑다. 극장용 장편을 플래시로 만들어보겠다는 패기가 결국 2D와 3D를 적절하게 배합하면서도 잘 섞여진 고민의 흔적들로 새롭게 보여지고, 그러한 시도는 다음 작품의 기대를 극대화시키는 부메랑 효과로 나타난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발전 가능성을 엿보다
캐릭터를 디자인할 때는 최대한 단순하게 하라고 한다. 단순한 캐릭터일수록 사람들은 자신과 닮지 않은 부분이 가장 적다고 인식한단다. 솔직한 이야기가 관객을 움직일 수 있고, 애니메이션이라는 차별적 형식의 대안을 인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90년대에 다시 등장한 옐로 저널리즘의 저항이라는 <심슨>은 망해가는 이십세기 폭스TV를 기사회생 시켰다. 끊임없이 패러디하고, 시퀀스마다 당시 인기있는 TV프로그램과 영화 등을 조롱하는 <심슨>의 여유로움은 30분이라는 TV시리즈의 한계를 풍성하게 느끼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의식과 화려한 은유는 미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유머와 자신감을 대변해준다. 그래서 솔직히 더 짜증나는 부분도 있다. 어떻게 저런 시의성있는 비판과 패러디를 매주 TV시리즈 형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제작 메커니즘의 순발력과 역동성을 갖고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 조소로 변해가는 것이다. <비비스 앤 버트헤드>를 보면 베이비붐 세대 이후 맞벌이 부부가 TV를 통해 아이들을 양육해온 유리젖꼭지 세대의 문제를 신랄하게 자학하는 이야기가 화면 가득히 엽기와 사디즘으로 채워진다. <사우스파크>에는 초등학교 저학년들의 반복되는 욕설과 속어들이 형식화되고 권력화되어가는 미국의 학부모단체와 심의제도를 스스로 현란하게 비꼬는 형국을 보여준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숨겨진 힘은 스스로 공격받을 부분을 먼저 치고 나오는 혁신에 근거한다. 미국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식과 해결되지 못하는 선민사상을 스스로 문제시하고 자학함으로써 비판받아야 하는 지대까지 소유하려는 욕심을 보여준다. 그러한 기능을 저항적 내러티브의 애니메이션이 실사영화보다 더 강력하게 담론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치와 씨팍>은 우리에게도 그런 여유와 자신감이 있다는 출발을 보여준다. 그래서 반갑고 뿌듯하다. 그러나,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너무 참아온 8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한꺼번에 풀어헤치며 관객을 힘들게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많은 부분을 편집하고 잘라내서 안타깝다는 감독의 한탄처럼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참 쉽지만 정말 어려운 진리를 <아치와 씨팍>은 아직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한계, 즉, 애니메이션을 보러 극장에 갔다가 다른 실사영화의 현란한 마케팅에 어른들이 무슨 애니메이션이냐는 자조와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도록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픽사와 드림웍스PDI가 보여주는 형식들, 실사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그리고 실사영화가 보여주지 못하는 패기있는 형식미를 애니메이션은 끊임없이 개발하고 현실화해야 한다. 그 시작과 모험의 한 단면을 <아치와 씨팍>은 우리의 힘으로 보여준 프로젝트다. 모두 처음 해보는 제작진들의 모험, 그런데도 충분히 평가받을 수 있는 완성도의 실험,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가 갖는 다양한 의미와 복합적인 해석의 광폭처럼 <아치와 씨팍>은 많은 부분을 볼썽사나운 장면과 욕설 뒤로 숨기고 있다. 그런 숨겨진 의미를 이제 관객이 벗겨내야 한다. 한국의 관객도 한국 애니메이션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현실화하고 있다. 16강 탈락의 성적이지만, 공항에서 환영받는 한국 축구처럼 조범진 감독을 포함한 젊은 제작진의 산뜻한 혁신을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으로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