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녀가 꽃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을까. 열여섯에 데뷔한 화제의 하이틴 스타로, 불굴의 여성 기업인에서 신경증에 사로잡힌 미녀까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든 히로인으로, 2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김혜수는 한번도 스타덤 밖으로 밀려난 적 없는 희귀하고도 화려한 꽃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엔 꽃을 든 남자들을 만났다. ‘대한민국 미남미녀’가 아닌 돈과 욕망의 꽃, 화투를 든 남자들이다. 꽃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타짜>의 세상에 ‘도박판의 꽃’ 정 마담 김혜수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욕망에 철저히 충실한 여자죠.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여자가 바로 정 마담이에요.” 타짜들을 불러모아 판을 운영하고 수익을 챙기는 도박 세계의 여왕벌 정 마담은 놀랍게도 김혜수의 스크린 연기 역사상 최초의 악역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정말 하고는 싶은데, 저랑 너무 닮은 면이 없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어요. 결정하기 전까지 한달을 고민했어요.”
정 마담이라는 역할이 전문적인 기술을 구사하는 타짜는 아니지만, 판을 조작하고 지배하는 인물인 만큼 화투에 능란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은 필수. 고스톱이나 섰다는커녕 화투짝을 잡는 것조차 서툰 생초보 김혜수는 주인공 고니 역을 맡은 조승우와 함께 전문 도박사로부터 특별 강습을 받았다. 돈에 집착하는 정 마담의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불붙은 돈을 황급히 거둬들이다가 말 그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타짜>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정 마담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에피소드마다 감정의 수위를 조절하고 리듬을 맞추는 일은 더욱 쉽지 않았다. 촬영은 현재 70& 정도 진행된 상태. “완성된 영화를 보기 전까진 제가 정 마담을 정확히 표현해냈는지 확신을 할 순 없겠죠. 하지만 이번 역할이 제게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다주었다는 건 분명해요.”
올해로 연기 경력 만 20년을 채운 김혜수는 열여섯의 나이로 연예계에 첫발을 내딛던 때의 흥분과 설렘을 아직 기억한다. 당시 국내시장에 막 진입하던 네슬레사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운동을 자사 제품 ‘마일로’의 광고 컨셉으로 잡았고, 태권도 시범단으로 활동했던 김혜수는 이른바 ‘태권 소녀’로 전격 발탁됐다. 긴 머리를 묶어 올린 채 옆차기를 날렸던 소녀는 장안의 화제가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영화 <깜보>로 스크린 데뷔를 했다. “그냥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고, 어른들의 특수한 세계에 들어왔다는 게 마냥 좋았어요. 연기에 대해서는 전혀 개념도 없었고, 준비도 안 돼 있었죠.”
그가 “배우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20대 중반에 이르고 나서였다. 과연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일일까.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 다른 꿈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수없는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 다음에 넘어서야 할 것은 김혜수 자신을 향한 고정관념이었다. 건강미인이거나 섹시미인이거나. “2000년에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저에게 시나리오가 들어오는 건 두 가지였어요. 밝고 경쾌한 로맨틱코미디가 70%, 그리고 나머지는 영화라고 할 수도 없는 에로물. 정말 극단적인 거죠. 딱 그거였어요.”
전환점은 찾아왔다. <쓰리> <얼굴없는 미녀> 그리고 <분홍신>. 그는 김혜수라는 배우가 밝고 화려하고 섹시한 모습뿐 아니라 어둡고 고독하고 혼란스러운 얼굴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하지만 언론이 김혜수를 조명하는 방식은 늘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했다. 화려함을 한껏 부각해 호들갑을 떨다가 정반대로 그것을 비난하는 기묘한 소비 방식. “한번은 무슨 옴부즈맨 프로그램 PD가 와서 그랬어요. 시상식 때 제가 입었던 드레스에 항의가 빗발쳤다면서 그런 야한 옷을 입은 의도를 알고 싶다는 거예요. 시청자에게 해명할 기회를 준다 이거죠. 어이가 없었죠. 그래서 PD한테 그랬어요. 그럼 아저씨는 일할 때 그 옷을 입는 이유가 있어요?” 종종 김혜수는 연기가 아닌 옷과 몸매로 부각된 적이 많았고, 그 방식에 대해 불쾌함을 느낀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의 잣대에 맞춰 자신을 바꿀 수 없고, 또 그들이 변하도록 만들 수 없다면, 불필요한 감정은 지나치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좋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건강미인, 건강미인 하는데, 사실 제가 건강하긴 해요. 정신도 건강하고 몸도 건강하고. 검사해보면 의사들이 놀라요. 이렇게 수치가 딱딱 떨어지는 사람이 없다고. (웃음)”
아역으로 출발해 대표적인 스타 여배우로, 야심차게 성공의 계단을 밟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김혜수에게 배우로서 어떤 ‘경지’에 오르겠다는 욕심은 뚜렷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배우 김혜수가 아닌 인간 김혜수다. “이런 연기를 꼭 해봐야지. 그런 식의 욕심은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게 연기라는 건 인생과 분리되어서 존재하지 않아요. 연기가 인생의 전부라는 뜻이 아니에요. 저에게 연기란 특별한 욕심을 앞세우는 게 아니라 인생과 같이 가는 거, 인간 김혜수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것, 그거예요.”
방에 컴퓨터 세대를 나란히 놓고, 음악, 미술, 사진 등 자신이 ‘꽂힌’ 작품들에 대한 자료를 밤새 수집한다는 김혜수는 분명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다. “언제까지 배우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배역에 몰입하고 있는 순간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그는 어쩌면 평생 연기를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을 지닌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철이 들기 전에 연기를 시작했고, 연기를 하면서 철이 들었으며, 아직도 철이 들고 있는 중”인 김혜수는 연기와 함께, 자신의 삶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것. 누구의 찬사와도 질타와도 상관없이 자신만의 빛깔과 향기로, 만개할 그때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