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어공주>에서 <카>까지, 할리우드산 수다쟁이 캐릭터 변천사
2006-07-19
글 : 김나형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 분식집이라면 수다는 다시다다. “이번 애니메이션에는 수다쟁이 캐릭터가 안 나옵니다”라는 멘트는 “우리집 음식엔 조미료 하나도 안 써요”라는 말과 같은 반응을 끌어낸다. “거짓말!” 언제부턴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에서 수다쟁이는 없어서는 안 될 캐릭터가 되었다. 떠들고 불평하면서도 주인공을 보좌하는 감초 캐릭터는 기본. 악당에게도 수다는 필수다. 과묵하고 안 웃기고 진지한 악당이 나온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상영관을 잘못 찾아들어온 것이 아닌지 확인하는 게 좋다. 수다 바이러스는 주인공도 감염시켰다. 주인공이 푼수를 떨며 왕자병 멘트를 날리는가 싶더니, 요즘은 아예 주·조연 할 것 없이 단체로 수다 떤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조미료에서 주재료로 등극한 수다쟁이들. 이들이 어떤 변천사를 거쳐왔는지 슬쩍 짚어본다.

원류-‘주접스런 조력자’와 ‘장광설을 늘어놓는 악당’

<인어공주>

태초에 가재와 문어가 계셨다. 디즈니의 <인어공주>가 배출한 이 두 원로는 각각 ‘주접스런 조력자’와 ‘장광설을 늘어놓는 악당’의 시조 자리에 올랐다. 이들 두 원로의 유전정보는 DNA의 강을 면면히 흐르며 많은 후손들의 구강 및 안면 근육 조직 발달에 기여했다.

온건보수주의자 세바스찬은 궁중작곡가 겸 지휘자라는 우아한 직업에 종사했다. 하나 어째서인지 지위에 어울리는 위엄 대신 가벼운 입을 타고났다. 싸게싸게 뱉은 말이 화근이 되어 방방 뛰는 어린 공주의 보호감찰인 노릇을 맡게 되었으니 수염 끝 희어오는 중년에게 육체적·정신적으로 그보다 더한 스트레스가 없었다. 젊은 것들 하는 짓에 잔소리가 앞서는 분이었으나 보수꼴통은 못 되었던지라, 가출녀 머리 깎아 귀가시키기는 리얼액션은 보이지 못하셨다. 외려 현란한 말솜씨로 공주의 연애전선에 도움을 주시기에 이르렀으니 그분의 천성이 그러하셨더라. 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남기셨으니 “말은 없는 듯해도 참한 아가씨”라며 “일단 해보면 안다”고 노래로 키스를 종용하던 솜씨(<Kiss the Girl>)는 설득의 바이블로서 오랫동안 칭송받고 있다.

한편 다혈질에 야심까지 큰 바다마녀 우르술라는 타고난 안티정신으로 용왕 트라이튼 정부에 맞서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사촌이 소개팅 성공하는 꼴을 못 보며 나보다 예쁜 것은 밟아주어야 한다는 화끈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세바스찬의 언변이 백마술이라면 우르술라는 조삼모사·감언이설·동상이몽 등 온갖 기법을 이용, 검은 꾐의 진수를 보여준다. 해조류가 덕지덕지 낀 동굴에서 체제 전복을 꿈꾸는 이 여장부는 평소 누구더러 들으라는 것인지 끝없는 불평을 늘어놓는데, 그러한 일상적 단련이 설득 기술의 토양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수하를 다그치는 솜씨도 가히 신공의 경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시고, 갈굼에서 구하옵소서. 아멘.

적자들-‘말하기 위해 말하는’ 순도 100%의 수다쟁이

<뮬란>의 빨간 용 무슈는 세바스찬의 직계 후손이다. 빨간 몸에 수염도 달린지라 엎드리면 곧 가재로 화할 듯 조상을 닮았다. 그가 갑옷 뒤에 숨어 군인 행세하는 장면을 볼라치면, 속는 이는 그의 능청스런 말솜씨에 그가 말 대신 팬더를 탔음을 깨닫지도 못한다. 점잖던 할아버지에 비해 큐트 지수가 올랐으나 거짓말을 하거나 경망한 어조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뮬란2>는 제목만 <뮬란>이지 알고 보면 무슈가 실세였다는 말이 떠돌기도 한다. 그러나 세바스찬 계보상 최고의 발달 단계를 보여준 것은 <슈렉>의 동키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순도 100% 수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말하기 위해 말하는’ 극진한 경지를 체험하게 한다. 거기에 사람(만) 좋아 보이는 얼굴, 눈치 제로의 생활 태도, 노골적인 모멸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낙천성이 더해져 그를 무적으로 만든다. 입 냄새로 사람 기절시키는 초록 괴물 슈렉도 그의 배알없는 붙임성에는 속수무책.

<인크레더블>

우르술라의 근성은 <인크레더블>의 악당 신드롬이 이어받았다. 후천적 노력가인 그는 혈통주의를 내세운 타고난 슈퍼 히어로, 즉 ‘있는 것들’을 공격한다. 자존심이 다치는 것을 참지 못하며 한번 화나면 시퍼렇게 칼을 간다. 시종일관 자신의 속사정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와중에 발작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이 감상의 포인트. 신드롬이 우르술라의 겁나 먼 손자뻘이라면 우르술라의 사촌뻘 되는 인물도 있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부기우기와 <로봇>의 마담 가스캣. 다혈질이라기 보다 사이코에 가까운 이들은 속사포처럼 언어유희를 펼치는 타입은 아니다. 대신 자신들의 엽기적인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발랄+능청 입담을 구사한다. 이들이 말할 때면 어딘가에서 ‘랄랄라~’ 하는 환청이 들리는 듯. 바퀴벌레 같은 얼굴을 하고 ‘냐하하하~!’ 떠들어대다니 귀엽지 아니할 수가!

변종-슈퍼초울트라캡숑짱 빠르게 말하거나 폭력적인 돌연변이들

<니모를 찾아서>

수다쟁이들도 돌연변이 혹은 개체변이를 일으킨다. 이를 테면 <니모를 찾아서>의 도리는 동키의 고종사촌뻘은 될 듯한 아주 가까운 사이다. 눈치없고 낙천적이기로 대책이 없는 그녀는 상대의 심리상태를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아줌마 수다를 쏟아놓는다. 여기까지는 동키와 아주 흡사하나 한 가지 병리적 증상이 그녀에게 차별성을 부여한다. Amnesia, 즉 건망증에 시달리는 그녀는 불과 몇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그녀는 방금 자기가 했던 말도 까먹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_-!!). 일각에서는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다만 IQ가 지독하게 낮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빨간 모자의 진실>과 <헷지>에서는 동일한 돌연변이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마리 다람쥐는 일반인(?)의 두세 배가 넘는 속도로 말하고 움직인다. 평상시가 그럴진대 카페인을 섭취했을 경우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초인적 스피드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이기 때문. 수다쟁이계의 슈퍼히어로들이다.

악당 수다쟁이의 변태는 좀더 온화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이들의 변이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났다. 이를 테면 우르술라한테서 화술을 전수받은 개체들이 조직폭력단체라는 주변 환경과 접하면서 더욱 터프하고 강압적인 화술을 체화하게 된 것. <벅스 라이프>의 메뚜기 하퍼나 <샤크>의 돈 리노가 그 사례다. 환경 때문에 일어난 변이이므로 각 사례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사막을 날아다니는 하퍼는 고함으로 일관하는 거칠고 단조로운 화술을, 바다를 나와바리로 삼는 돈 리노는 으름장과 협박을 교차하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언변을 선보인다.

신분 상승+세(勢) 확장 - 수다쟁이의 씨가 따로 있나

<마다가스카>

<하늘이시여>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애초에 내 피와 네 피는 다른 법이다. 애니메이션계에도 처음엔 혈통주의가 팽배했다. 주인공의 피를 타고난 자는 수다를 떨 수 없다. 그런 거시기한 역할은 ‘아랫것들’이나 ‘나쁜 것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정면으로 받아버린 집단이 있으니, 눈부신 얼굴에 삿갓을 쓰고 외다리로 뛰어다닌다는 족속, 픽사였다. 이들이 만든 <토이 스토리> <벅스 라이프> 등의 애니메이션은 주인공과 조연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듯한 인상을 주었다. <벅스 라이프>의 개미 플릭은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떠들기만 하는 한심한 인물로 그려졌고, 공동 주연을 맡은 서커스 팀과 공주 개미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매번 얼뜨기 같은 행동으로 웃음을 사는 동시에 수다를 일상으로 승화했다. 픽사의 이러한 파격으로 과거였다면 조연이었을 캐릭터들이 차차 주인공이 되기에 이르렀다. <샤크>의 오스카는 고래 세척 외길로 평생을 마친 소시민의 아들. 말끝마다 ‘컴~머으언~’(Come on), ‘와쩝? 매으~엔? 허?’(What’s up? man? Huh?)를 달고 사는 힙합 청년이다. <카>의 주인공 라이트닝 매퀸은 떠버리+실실이+왕자 스타일. 이 둘의 원조는 <토이 스토리>의 버즈다. 자신이 외계에서 불시착한 우주전사라고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로서, 보톡스를 맞은 듯한 미소가 유명했다. 그러나 최근 가장 유행하는 경향은 주인공이 이럭저럭 10명쯤 등장해 너나 할 것 없이 수다를 떠는 것이다. <인크레더블>이 엄마 수다, 아빠 수다, 누나 수다, 동생 수다의 모듬 안주였음을 상기한다면 어찌 신드롬만을 수다쟁이라 부를 수 있으랴. 지금도 마다가스카 섬에서는 벤 스틸러 목소리의 사자와 크리스 록을 닮은 얼룩말, 쿨한 하마와 신경쇠약 직전의 기린, 수백 마리의 원숭이떼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것이다. 엽기펭귄들이 던져주는 초밥을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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