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청춘에 대한 질문을 찾아가는 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
2006-07-26
글 : 유운성 (영화평론가)
홍상수 이후 한국영화로서 <내 청춘에게 고함>의 힘

“T0에 머물기 위해서는 나는 T0에 대한 객관적 형상을 만들기 위해 T1으로 옮겨가야만 한다… 시간에 정지해 있기 위해 나는 시간과 함께 움직여야 하며, 객관적이 되기 위해 나는 주관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탈로 칼비노가 단편소설 <티 제로>에서 제시한 실존적 시간의 해석기하학. 그의 문장을 잠시 임의로 바꿔 말하자면, 청춘으로 남기 위해서는 청춘에 대한 객관적 형상을 만들기 위해 청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원리가 성립한다. 열정 혹은 도전과 패기, 우울과 아련함 등의 청춘의 상투구- 청춘을 한번쯤은 경험해봄직한 천국 같은 지옥으로 간주하는 주제넘은 어른들의 환상- 를 벗어던진 <내 청춘에게 고함>을 다시 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칼비노식의 시간의 해석기하학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형상의 동시적 재현에 관한 윤리학이다.

“조금 기다려주면 안 되냐? 그래, 나 간다! 여기서 멈출 순 없으니까! 여긴 죽었으니까.” 김영남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내 청춘에게 고함>의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대학생 정희(김혜나)는 허공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멈추지 말 것, 이것이야말로 <내 청춘에게 고함>이 제시하는 청춘의 유일무이한 지상명령이다. 그런데 이 지상명령은 오해되기 쉽다. 혹은 무언가가 종종 거기 멋대로 덧붙여진다. (음료수나 맥주 광고 카피마냥) 멈추지 말고 질주하라, 는 식으로 말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자 ‘시간 늦추기’라는 수상쩍은 소모임의 회원이기도 한 근우(이상우)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퀵! 퀵!’이라고 강변한다. 한편 감독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청춘이란 “불확실성 속에서도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 혹은 근우 직장 선배가 말하듯이 ‘돌아보지 마라’(Don’t Look Back). 대신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라.

뒤바뀐 문답의 형태를 띤 영화 구조

청춘의 지상명령을 의문부호에 붙이는 건 당연히 청춘의 끝자락에 선 세 번째 에피소드의 인물들의 몫이다. 이때 지상명령은 돌연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화한다. 인호(김태우)와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는 그에게 묻는다. “그냥 여기서 이렇게 멈출래요?” 이와 같이 질문과 답변이 역순으로 배치된 것처럼 보이게 된 건 그냥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청춘에게 고함> 전체가 이처럼 순서가 뒤바뀐 문답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번째 에피소드에 비해 다른 두 에피소드가 다소 약하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도 바로 순서가 뒤바뀐 문답의 형태를 띤 영화적 구조 때문이다. 이는 <내 청춘에게 고함>을 반드시 거듭 보아야만 하는 영화로 만든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상응하는 답변을 찾아가는 영화가 아니라 (미처 답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답변을 먼저 제기하고 그것을 답변으로 만드는 질문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에게 부과된 윤리는 ‘돌아보지 마라’이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더불어 “왜 매일 기차는 저렇게 서 있냐?”는 불만(에피소드2)과 “기차는 그냥 멈추지 않고 계속 지나가야 기차지”라고 무덤덤하게 말하는 타성(에피소드3)의 차이를 깨닫는 것 또한 그러한 돌아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실상 서로 무관하다고도 볼 수 있는 세개의 에피소드를 연결짓는 가느다란 고리들을 나열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들을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책갈피 사이에서 발견한 돈(에피소드1, 3), 혼자서 추는 춤(에피소드1, 3), 편지함에서 안 보는 게 차라리 나았을 편지를 발견하는 것(에피소드1, 3), 정읍 내장산에 대한 언급(에피소드1, 3), 김보연의 노래 <생각>(에피소드2, 3), 노래방에서의 구타사건(에피소드2, 3), 기차 혹은 기찻길(에피소드1, 2, 3), 그리고 통화 도중 전화가 끊기는 것(에피소드1, 2, 3) 등등. 이상 나열한 사례들로부터 우리는 첫 번째, 두 번째 에피소드가 세 번째 에피소드를 기준으로 삼아 엮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위의 모든 사례들이 모두 등장하는 것은 세 번째 에피소드뿐이다. 즉 <내 청춘에게 고함>은 우리로 하여금 30대 초반의 나이에 접어든 인물인 인호를 기준 삼아 한 세대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게끔 유도하는 영화인 셈이다. 인호의 에피소드가 다른 두 에피소드의 상영시간을 합한 정도의 ‘비정상적인’ 길이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독이 인호의 시점에서 영화를 끌고 나간다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돌아보는 것은 우리이지 등장인물이 아니다.

플래시백은 영화 속의 청춘들에게나 그들과 같은 세대인 감독에게나 아직 타당한 윤리가 될 수 없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감독은 인호라는 인물의 현재- 혹은 과거?- 에 대해 ‘가족 유사성’의 관계에 놓인 병행적 에피소드들을 배치한다. 물론 이 관계는 사후적으로만 ‘비로소’ 드러난다. 기차 혹은 철로가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지만, 여기서 기차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계’(예컨대 <박하사탕>)의 은유 같은 게 아니다. 비록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에서만큼의 강력한 인상을 남기진 못할지라도, <내 청춘에게 고함>이 스쳐지나가고 평행선을 그리는 삶의 시간들의 궤도를 정직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세 에피소드의 인물들 각각이 그려내는 삶의 궤도들이 서로 긴밀하게 교차되지 않기 때문에 세 에피소드가 하나의 완결된 영화적 구조 안으로 통합되지 못한다는 지적은 반만 옳다(이 영화는 틈틈이 만들어둔 단편영화들을 모은 옴니버스가 아니다). 만일 <내 청춘에게 고함>에 하나의 야심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가족 유사성’을 지닌 각각의 에피소드가 상호 번역은 가능하지만 원칙상 독립적이고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도 않고 무언가 상위의 주제를 향해 수렴되지도 않는 구조의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는 점일 것이다. 각 에피소드의 인물들은 어떤 ‘집’- 남자친구의 옥탑방과 새로 얻은 전셋방(에피소드1), 은밀히 연모하는 여인의 집(에피소드2), 자신의 집(에피소드3) - 주위에서 맴돌다 결별하고, 내쫓기고, 불청객이 된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가족의 불화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거나 아예 가족과 연락을 취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문제는 이처럼 상호 번역 가능한 요소들, 그리고 앞에서 나열했던 다수의 가느다란 고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매끈한 트립틱(triptych)이 되지는 못했다는 점에 있다. 이때 김태우의 노련한 연기에 비해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상대적으로 서툴게 여겨진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상우의 경우, 그의 미숙한 연기가 “무모하지만 용기는 있”는, 그런데 표현엔 서툰 근우라는 인물과 제법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감독은 근우의 무모한 모험- 전화수리공으로서의 직업을 이용해 연인들의 전화 통화를 몰래 엿듣다 그만 한 여자에게 빠져버리는 것- 에서 영화 속 청춘의 두 상이한 시기를 연결짓는 단서를 발견한다. 무미건조하고 습관적인 연애(정희)와 불륜(인호와 그의 아내 지은)의 사이에 근우의 성적 모험이 위치한다. 특히 근우가 연인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의 숏은 매우 흥미롭게 연출되어 있다. 시각적으로만 보자면 이 숏은 집 안의 여자와 집 밖의 근우 사이의 전화 통화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후 맥락상, 그리고 사뭇 (1970년대 한국영화풍의) ‘고색창연’한 연인들의 대화내용 덕에 그런 오해는 불가능하게 된다. 사실 근우의 자리는 스크린에 펼쳐진 연애 판타지를 엿보는 관객의 그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의 그는 르네 지라르의 간접화된 욕망, 혹은 ‘욕망의 삼각형’ 속에 완전히 빠져든 인물이다. 즉 그의 사랑은 사실 그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매개자들(직장 선배와 여자의 연인)에 의해 중개된 욕망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중개자가 되기를… 자기 자신인 채로 타인이 되기를”(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간절히 원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종종 사용된 김보연의 노래(<생각>)가 카를로스 사우라의 <까마귀 기르기>(1976)에 삽입되어 널리 알려진 지네트의 <왜 떠나시나요>(Por que te vas)의 번안곡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 노래는 (감독이 의도한 것이건 아니건 간에) 인물이 놓인 모방의 구조에 대한 멋진 청각적 대응물이 되기 때문이다.

홍상수식의 미래에 대한 저항을 탐색하는 청춘들

근우가 엿본 불륜의 판타지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 가서 인물들 전체가 빠져드는 현실이 된다. 한편으로 세 번째 에피소드는 중개자의 존재를 애써 부인하는 속물들의 향연이기도 하다. 인호는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의 위선과 속물 근성에 분개하지만 사실 그 분개는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향해야 마땅한 것이다. 다시 한번 지라르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속물들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분개심의 정도는 언제나 그 자신이 지닌 속물 근성의 척도가 된다. <내 청춘에게 고함>의 김영남이 그의 스승 홍상수와 만나는 지점은 정확히 여기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홍상수 냄새가 난다거나 작가영화의 익숙한 흔적들이 발견된다고만 말하는 건 비평적 태만의 고백에 불과할 뿐이다. 오히려 김영남은 자신의 청춘들이 왜 홍상수의 어른들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물어보면서- 이 점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출연한 바 있는 김태우의 캐스팅은 감독과 배우 사이의 친분관계 이상의 의미를 띤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환멸 이외의 저항이 가능한가를 탐색하는 중이다. 각각의 에피소드의 마지막에서 휴대폰을 강에 던지고,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채 철로를 따라 걸어가고, 구두를 가볍게 걷어차는 인물들의 미약한 몸짓들은 이 신예감독의 비전이 홍상수의 그것과는 서서히 다른 궤도를 향할 것임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아직 홍상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때 나는 <내 청춘에게 고함>이 최선의 의미에서 ‘홍상수 이후’의 한국영화이며 자신만의 미래를 만들어낼 잠재력을 간직한 감독의 영화라고 답할 것이다. 어른들의, 멈추어 선 자들의 물음에 대해 답하는 것이야말로 청춘의 몫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결국 자문자답임을 깨닫게 된다. <내 청춘에게 고함>은 바로 그 자문자답이 존재하는 한 청춘은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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