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의 나오미 해리스
2006-07-21
글 : 박혜명
뭐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

어느 영국인이 비행기 안에서 미국 배우를 만났다. 꽤 잘 알려진 여배우였던 그에게 영국인은 인사를 건네고 이렇게 물었다. “요즘 일은 할 만하세요?” 미국인 할리우드 여배우는 웃으며 답했다. “네, 할 만해요. 영국 배우들이 우리 밥그릇만 뺏어가지 않는다면요.” 영국 배우 나오미 해리스는 자기 친구의 에피소드를 기자에게 들려주며 통쾌하게 웃었다. 나오미 해리스는 대니 보일의 저예산 디지털영화 <28일후…>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해서 단숨에 인지도를 높였다. 영화가 영국 내에서뿐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해외에서까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은 까닭이다. 해리스는 올 여름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과 마이클 만의 신작 <마이애미 바이스> 두편에 동시에 출연했다. 그는 요즘 홍보와 인터뷰 스케줄로 매우 바쁘다.

<28일후…>를 본 관객이라 해도 사실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에서 나오미 해리스의 얼굴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맡은 ‘티아 달마’라는 주술사는 영화 전체의 프로덕션디자인 컨셉에 따라 아주 기괴한 외모를 하고 있다. 지저분하고 덥수룩한 머리, 이빨에 낀 때들, 얼굴 위에 그려진 검은 무늬들 그리고 자메이카 악센트가 강하게 섞인 영어까지, 아시아 관객에겐 더욱 익숙하지 않은 여배우의 본래 모습을 돋보이게 해주는 분장이 전혀 아니다. 양식적이고 과장된 연기를 뛰어나다고 평할 것도 아니다. 바하마 근처에 은신해 사는 요상스러운 주술사 ‘티아 달마’는 자메이카 출신의 엄마를 둔 나오미 해리스가 할리우드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삼은 발판 중 하나다.

나오미 해리스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인물은 <28일후…>의 지적이고 강한 여성 셀레나다. 분노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비현실적인 종말을 맞이한 런던에서 셀레나는 짐(킬리언 머피)과 함께 최후 희망을 거머쥐는 생존자다. 나오미 해리스는 트리니다드 출신이라는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7살 때까지 본 적이 없다. 그의 엄마는 다섯살 때 영국으로 건너와 열여덟살에 딸 해리스를 임신했고 핀스베리 공원에서 구걸하며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착했다. 엄마는 두살 때부터 거울을 보며 우는 연기와 노래, 춤을 일삼던 딸을 일곱살 때 연기학교에 보냈다. 3년 뒤엔 <BBC>에서 아역배우 데뷔를 했다. 학교 친구들은 나오미 해리스를 질투심에 괴롭히기 시작했고 해리스는 단 한명의 친구도 만들지 못했다. “괜찮아. 마이클 잭슨이 학교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잡고 함께 네버랜드로 떠나줄 거야.” 허약한 공상으로 마음을 달래는 딸을 다잡아 세운 것도 엄마였다. “애들한테 왕따당해서 너한테 남는 게 결국 그런 거구나. 네 정신이 다 망가지는 거 말이다.” 해리스의 엄마는 고작 그림책이나 볼 줄 아는 다섯살 된 딸을 런던대 사회학과 강의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진취적이고 목적의식 강한 여자였다. 엄마는 딸에게 말하곤 했다. “무조건 덤벼. 경험해. 넌 어려. 네가 해야 할 건 해야지.”

나오미 해리스는 우등생 교육기관인 식스폼칼리지를 거치기도 했다. 케임브리지대학 사회학과를 목표로 두고 있던 때였는데, 엄마는 케임브리지대 진학을 극구 반대했다. “엄마 말이 맞더라. 사람들은 이튼스쿨이나 스키 따위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핀스베리 파크 출신의 흑인인 나하고는 안 맞는 세계였다.” 브리스톨 올드빅 연기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일에만 파고드는 “사회부적응자들”(misfits)과 어울리고 나서부터야 해리스는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됐다. 그리고 제 길에 들어섰다.

해리스는 <화이트 티스>라는 TV영화에서 이상주의를 가진 이민자 여성을 연기하면서부터 영국 내에서 배우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그해에 대니 보일과 만났고 2년 뒤 할리우드영화 <애프터 선셋>에 출연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제리 브룩하이머와 마이클 만의 영화를 동시에 낚아챈 것이다. “미국에서 최우선 가치는 언제나 비즈니스다. 나는 상품이다. 근데 나는 그들의 ‘뭐든 할 수 있다’라는 마인드를 좋아한다. 그들은 성공을 즐기고, 모든 기회가 열려 있다고 말한다. 아닌 것 같지만 정말 성공한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피부색도 출신도 따져묻지 않는다.” 그런 경지를 향해 나오미 해리스는 바하마의 주술사 자리를 꿰찼다. 지적인 여형사로 등장하는 <마이애미 바이스>에서는 “누드를 위한 누드신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므로” 대역을 요구하는 권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 에피소드를 ‘피로스의 승리’에 비유하며 어느 정도 뿌듯해한 나오미 해리스에게 기자들마다 공통적으로 물은 것이 있다. “이제 당신은 전성기 아니냐?” 그러자 나오미 해리스가 답했다. “차차 올라가는 중이다. 옳은 방향과 적절한 속도로. 지금처럼 가다보면 어느 순간 생각할 때가 오겠지. 아. 이제 더 올라가고 싶진 않군.”

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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