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의 맛>과 <란포지옥>의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 상영을 맞아 두 영화의 주연배우 아사노 다다노부가 7월6일 내한했다. 1990년 영화 <물장구치는 금붕어>로 데뷔해 2006년 현재까지 총 44편의 장편영화에 출연한 그는 <환상의 빛>과 <디스턴스> 등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피크닉>의 이와이 순지, <헬프리스>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등의 아오야마 신지, <꿈의 미로>와 <고조> 등의 이시이 소고, <쌍생아>와 <바이탈>의 쓰카모토 신야, <고하토>의 오시마 나기사, <바람꽃>의 소마이 신지, <밝은 미래>의 구로사와 기요시, <이치 더 킬러>의 미이케 다카시, <자토이치>와 <다케시들>의 기타노 다케시 등 거의 모든 일본의 유명 감독들과 작품을 함께한 배우다. 2003년엔 대만의 거장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카페 뤼미에르>와 타이의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의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에 출연했으며, 2005년엔 강혜정과 함께 <보이지 않는 물결>로 펜엑 감독과 재회했다. 일본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아사노 다다노부. 1999년에 6편, 2003년부터 2005년까진 매해 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번 영화제 상영작 중 유독 그의 출연작만이 2편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방한 일정 2틀째인 7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빡빡한 일정 탓인지 다소 피곤해 보였다. 인터뷰 도중 양말을 벗는다든지, 실내를 맨발로 돌아다니는 모습은 ‘아사노다운 인상’이었지만, 갑자기 코피가 났음에도 인터뷰를 계속한 것은 다소 새로운 모습이었다. 50분이라는 인터뷰 시간이 ‘아사노 다다노부’라는 두터운 텍스트를 담아내기엔 역부족이었지만, 그의 답변은 항상 말보다 여백이 중요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영화 속 그의 모습처럼, 서두를 ‘글쎄요…’로 시작했던 아사노 다다노부. 하지만 그도 영화 <피크닉>의 인연으로 배우자의 연을 맺게 된 차라에 대한 질문에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이 인터뷰는 6일의 기자회견과 7일의 인터뷰 내용으로 구성됐다.
-<녹차의 맛>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를 함께했던 이시이 가쓰히토 감독의 작품이라 결정했다. 이시이 감독을 무척 좋아한다. 여러 가지로 재밌고, 이상한 감독이랄까. (웃음) 각본을 읽어보니 역시나 이상하고 재미있더라.
-<녹차의 맛>에는 엉뚱하고 특이한 가족이 등장한다.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이시이 감독의 작품치고는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의 전작들을 보라. 특별히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단지 이 사람이 이번엔 또 이렇게 엉뚱하고 재미난 걸 생각해냈구나 하는 정도?
-그래도 당신의 캐릭터나 가족들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고 시작했을 것 같다.
=가족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간단히 이야기할 순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사람의 가족간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일상이고, 누구나 아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녹차의 맛>에선 이런 일상이 좀더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평범한 일들이지만 영화로 만들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녹차의 맛>은 이시이 가쓰히토 감독과 함께한 세 번째 영화다. 이시이 감독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나.
=이시이 감독은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친구나 가족과 함께 지낸 시간을 소중히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현장은 항상 즐겁다.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시이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애정은 없나.
=이시이 감독의 작업 스타일은 틀에 박힌 것과는 거리가 멀다. 대사나 상황들이 대본대로 진행된다기보다는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편안하고, 여유있게 하는 스타일이라 나와 맞는 것 같다. 또, 결과적으로 함께했던 작품들이 대중적이고 재밌어서 계속 하게 된다.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 때는 그림을 그려주거나 설정을 주고, 마음껏 하라고 했다고 들었다. <녹차의 맛> 때도 그랬나.
=글쎄, <녹차의 맛>이 어땠었지? (웃음)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 때랑 똑같이 했던 것 같다. 감독은 콘티를 보고 촬영을 했지만, 나는 안 보고 했다. 콘티는 있었던 것 같다.
-이번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에선 <란포지옥>도 상영된다. 이 영화는 <녹차의 맛>과는 매우 다른 느낌인데.
=<란포지옥>은 프로듀서가 <이치 더 킬러>와 같은 사람이다.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람이라 제의를 받았을 때 하고 싶었다.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인 에도가와 란포의 삶을 네명의 감독이 연출한다고 하더라. 이전까진 없었던 컨셉 같아서 매우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안 해봤던 역이고, 관심이 갔다.
-<녹차의 맛>은 <란포지옥>과 매우 다른 느낌의 영화이고, 이시이 감독의 전작인 <파티7>과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와도 다르다. 영화를 몇 가지 부류로 나누는 게 좀 어리석은 생각 같지만, 당신의 필모그래피는 센 영화와 비교적 조용하고 담담한 영화로 나뉜다는 느낌이다.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웃음)
-<녹차의 맛>을 연기하는 당신과 <란포지옥>을 연기하는 당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 일단 역할이 다르고 상황들이 다르니까, 차이점은 있다. (웃음) 그런 역할들이 나에게 다양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연기에서는 별다른 점은 없는 것 같다. 어떤 역을 하고, 어떤 느낌의 영화를 하느냐는 연기에 차이가 없다.
-시대극인 <자토이치>나 <고하토>는 또 다른 경우이다. 좀더 장르적이고, 전형적인 캐릭터다. 사무라이영화를 무척 좋아한다고도 했는데, 이런 작품들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무라이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다. 글쎄, 특별한 이유랄까. 일단 일본인이니까, 사무라이영화가 제작된다면 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일본인이라는 점 외에 사무라이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없나.
=글쎄…. 일단 이야기가 알기 쉬우니까. (웃음) 그게 제일 좋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무라이영화도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이야기가 알기 쉬운 것들이다. 곤란한 상황에 빠진 사람이 있고, 누군가가 도와주는 뻔한 이야기와 해피엔딩. (웃음) 이런 걸 좋아한다.
-외할아버지가 미국인이라고 알고 있다. 이런 점이 당신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이 있나.
=물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아, 내가 이런 점을 닮았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외할아버지가 어릴 때 미국에 가버렸다.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가끔씩 나도 모르는 모습을 발견할 때, ‘이런 점은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항상 ‘아메리카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그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데뷔 시절의 인터뷰를 보면 “연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코멘트가 자주 눈에 띈다.
=(웃음) 지금은 별로 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기가 싫어지지 않게 된 계기가 있을까.
=그게 뭘까. 역시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일종의 성장이랄까.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느낀 적은 없나.
=재능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연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다른 방식이라면.
=별로 배우를 하고 싶다는 기분이 없다는 것. (웃음) 열정적으로, 배우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좀더 넓은 시각으로 다양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배우라는 직업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물론 ‘배우가 너무 하고 싶어서 배우를 하는’ 태도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건 정말 훌륭한 거라고 생각한다. (웃음) 아마 아버지랑 함께 일을 해서 이런 태도를 갖게 된 건 아닐까. 하지만 배우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한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연예계쪽에 종사하시나.
=매니지먼트쪽 일을 하신다.
-‘배우가 너무 하고 싶어서 배우를 하는 건 아닌’(웃음) 당신의 태도가 연기와도 연관이 있을까.
=물론 있지 않을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들, 연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어떤 건지 말해줄 수 있나.
=데뷔하기 전에 오디션에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우가 되고 싶다, 프로덕션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나도 17살 무렵에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오디션을 봤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싫었다. 그런 사람들은 매우 재미없게 일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냥 평상시처럼 하면 안 되나? 왜 꼭 그런 열망을 가지고 무언가를 시작하면 안 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어디서에서 온지도 모르는 열망을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데, 그건 나에게 재미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오디션 때 그냥 일상처럼, 항상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 같다. 감독님들이 이런 점을 재밌어하시더라. 물론 나에게도 재미있는 부분과 재미없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들을 스스로 판단한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무엇이 재미없는지. 이런 식의 판단이 있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데뷔 이후 다른 아이돌 스타와는 달리 TV는 거의 하지 않고 영화, 특히 인디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연기가 하기 싫다고 느꼈던 건 20살까지다. 그 이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한 적이 있다. 물론 버라이어티 쇼는 하지 않았다. 처음엔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랬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연예인처럼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에게 상담을 하면서, ‘영화라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말이 나왔다. 더이상 텔레비전은 하지 않고, 영화를 하게 된 건 그 이후다. 연기가 싫지 않다고 느낀 것도 그 즈음이고.
-20살 이전과 지금, 무엇이 가장 많이 달라진 것 같나.
=일단 20살 전에는 연기가 싫다고 느꼈다는 점.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계속 하고 싶고, 재밌다고 느낀다. 여러 가지 경험도 할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의 역할들이 전반적으로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인 것 같다. 특별히 그런 캐릭터에 끌리나.
=그런 영화밖에 안 온다. (웃음)
-왜 그런 역만 오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그런 이야기밖에 안 하고 있으니까. (웃음) 그런 영화를 보고, ‘이 사람에게는 이런 걸 맡기면 잘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웃음)
-최근 개봉한 <보이지 않는 물결>의 경우 말과 동작이 아닌 분위기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본인의 연기 스타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
=연기 스타일이라…. 뭐랄까, 일단 과장된 건 좋아하지 않는다. 과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그냥 과장만 하는 것은 어떻게 표현할지를 모르겠다. 종종 듣는 말이 ‘카메라 앞에 서 있기만 해도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게 나의 캐릭터일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하지 않는 건 맞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캐릭터가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직접 말하진 않지 않나. 그런 면에서 보면 캐릭터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연기에서 배운 게 있다고 생각하나.
=무척 많다. 말타는 법이나…. (웃음) 이건 아닌가? 연기에서 특별히 무언가를 배웠다기보다는 태도의 문제인 것 같다. 나는 다른 배우들과 연기를 시작하는 입구가 달랐다고 생각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배우가 되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다. 배우로서 연기 이외의 것들도 바라보며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가 가능했다.
-영화 출연을 결정할 때 가장 고려하는 점은 뭔가.
=각본이 재미있나 혹은 누가 감독하나.
-당신에게 재미란 어떤 건가.
=그건 말로 할 수 없는 거다. 느끼는 거라고 생각한다. 굳이 얘기를 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출연했던 영화들에 담긴 재미가 아닐까. 나는 항상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만 하니까. (웃음)
-영화는 많이 보는 편인가.
=거의 보지 않는다. 극장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 영향을 받은 배우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리버 피닉스는 좋아한다. 또 누구더라? 잭 니콜슨도 좋아한다.
-종종 조니 뎁과 비교가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조니 뎁이라…. (웃음) 굉장한 사람이다. 물론 기쁘다. 하지만 비교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웃음)
-음악 활동도 열심히 하는 걸로 알고 있다. ‘피스 필’, ‘사파리’, ‘Mach 1.67’ 등 당신이 참여하는 밴드가 여럿인데.
=지금 ‘Mach 1.67’은 안 하고 있다. 그건 이시이 소고 감독과 <일렉트릭 드래곤 80000V> 때 잠시 했던 거다. 나머지 두개는 아직도 하고 있다.
-음악 활동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별로 의미는 없다. (웃음) 그냥 좋으니까 하는 거다. 영화와 다르지 않다. 그림이나, 디자인, 촬영, 영화 모두 내가 좋아서 하는 것들이다. 음악은 그중 하나다. 음악은 단지 라이브로 하지 않나. 공연을 하는 걸 좋아하는데, 영화와 달리 라이브의 느낌이 좋다.
-현재 다국적 프로젝트 영화 <칭기즈칸>에 출연하고 있다고 들었다.
=러시아의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다. 칭기즈칸을 연기한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말도 타고, 여러 가지를 배웠다. 물론 언어 때문에 힘들었지만. 수염도 못 깎고 있다.
-<카페 뤼미에르>의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나 <보이지 않는 물결>의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처럼 아시아의 다른 나라 감독들이 당신을 선호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이 자식 써먹기 좋겠구나’ 하며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자유분방한 모습에서 예측하지 못한 연기가 나온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칭기즈칸> 이후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나.
=아오야마 신지 감독과 새 영화를 들어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