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AAA형 남자의 홀로서기, <다세포소녀>의 유건
2006-07-26
글 : 최하나
사진 : 오계옥

참 맑다. 유건은 금세 눈물이라도 쏟아낼 듯 크고 깊은 눈을 가졌다. “꽃들도 친절하고, 빵들도 친절하고, 구두도 친절합니다.” 낯간지러운 이 대사가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처럼 한없이 선한 눈매 때문이 아니었을까. KBS 드라마 <안녕하세요 하느님>의 하루는 단순히 지능이 모자라서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싶어하는, 백지상태의 순수함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모든 사람의 꿈과도 같았다. 그런데 유건이 이번엔 우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았다. 테리우스를 반 토막낸 작명법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그 내용물은 한층 더 가관이다. <다세포소녀>의 꽃미남 클럽 A3의 멤버로 ‘미스터리 연구’에 앞장서는 우스의 연구 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여자들은 왜 화장실에 혼자 가지 않는 걸까 혹은 여자들은 왜 흰 팬티를 입을까.

“처음 만화를 봤을 때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죠. 이걸 대체 영화로 어떻게 만들까 궁금했어요.” <정사>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재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다세포소녀>는 동명의 인터넷 만화가 원작이다. 전교생이 성적(性的) 향상을 추구하는 쾌락의 명문 무쓸모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원조교제, 성병 등 기존 학원물에서 금기시되었던 것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이 특징. “통념에서 자유로운 시선이 좋았어요. 이걸 어떻게 연기하지? 하는 걱정보다 오히려 재밌겠다, 이거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더 강했죠.” 적극적으로 덤벼드는 타입이구나 싶었는데 유건은 되레 자신의 성격이 ‘AAA형’이라고 말한다. A형도 아니고 AAA형이라니. “원래 전 처음 보는 사람이랑은 거의 말을 못했어요. 낯가림이 정말 심했죠. 제가 뭘 잘못하면 상대방한테 ‘죄송합니다’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그 사람을 피하는, 그런 성격의 아이였어요.”

성격이 바뀔 수 있었던, 아니 적어도 AAA형이 A형이 될 수 있었던 계기는 독립과 함께 찾아왔다. 17살의 나이에 “제가 원하는 대로 알아서 잘 살겠습니다”는 말과 함께 홀로서기를 선언한 유건은 하숙집에서 오디션 정보를 뒤지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낯가림은 더이상 통하지 않았다. 당장 집세를 치를 돈이 없으면 하숙집 주인아주머니를 설득해야 했고, 오디션을 보러가기 위해선 일을 하루 빼달라고 사장님에게 넉살을 부려야 했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익혔다. “각종 식당부터 시작해서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어요. 성격상 처음엔 정말 힘들었는데, 차츰차츰 좋아지더라고요. 사람을 대하는 수단도 생기고. (웃음)”

서울예대에 들어갔고, “한번 연기에 빠져서 살아보겠다”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1년, 2년, 기회는 찾아왔다.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다세포소녀>에 캐스팅된 유건은 마침내 배우로서 카메라 앞에 섰다. 긴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렇게 뛰어와서 여기서 멈춰서 뒤를 보고 대사를 해야지.’ 매뉴얼을 외우듯 계속 암시를 걸었고, 더도 덜도 없이 딱 그렇게 첫신 촬영을 마쳤다. 겉으로는 “야 잘했어, 최고였어” 자화자찬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뒤돌아선 자리에선 ‘거기서 이렇게 해볼걸’ 하는 아쉬움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묘하게도 카메라 앞이 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 앞에서 뭔가를 하는 것보다 카메라 앞에서 하는 게 더 편하더라고요. 사람은 내가 뭘 하면 인상을 쓴다거나 한숨을 쉰다거나 안 좋은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카메라는 그냥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앞에서 노는 게 너무 재밌어요.”

영화 촬영이 마무리돼갈 즈음 유건은 <안녕하세요 하느님>의 하루가 됐다. 정신지체 3급의 장애아. 배우 유건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첫걸음은 평범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다. “도박 같았어요. 사람들이 안 좋은 시선으로 보면 쟤 뭐야? 정말 바보 아냐? 이렇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승률은 50 대 50이라 생각했어요.” 하루 24시간 중 21시간을 하루로 살았다는 유건은 드라마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점점 더 ‘하루화’되어갔다. 하루가 아프고 힘들면 자신도 아프고 힘들었다. 연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캐릭터에 몰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이 아닌 몸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다세포소녀>에 이어 <무림 여대생>에도 캐스팅되면서 유건은 데뷔 1년 만에 급부상한 루키로 부각됐다. 하지만 홀로서기했던 시간이 남겨놓은 자취일까. 그에게선 초조함이나 들뜸보다는 여유가 배어난다. “천천히 기다려서 가끔씩은 손해도 보는 배우, 내 연기에만 욕심내고 튀려고 하지 않고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 연륜이 생겼을 즈음엔 “인생의 때가 묻어나는 역할을 꼭 해보고 싶다”며 “그때까진 더 많이 굴러야 한다”고 말하는 유건의 눈은 여전히 맑다. 하지만 그것은 백지상태에 머무르지 않는 맑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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