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아가 약속 장소인 카페로 들어왔다. 한눈에 명랑한 20대 아가씨라는 느낌이었지만 의외였다. 조잘조잘 풀어놓는 얘기에 귀기울이고 있자니 달콤한 백일몽보다 야무진 현실주의자의 태도가 읽혔다. “나는 남들보다 키가 크거나 늘씬하지 않다. 얼굴이 유난히 작거나 예쁜 것도 아니다. 다른 매력이 없으니 연기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대구 출신으로 한양대 무용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연예프로그램 <강호동의 천생연분>으로 처음 TV에 얼굴을 내비쳤다. 시작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운동을 하느라고 헬스장에 다녔는데 어느 날 그 앞에서 고향 친구를 만났다. 마침 친구와 함께 있던 사람이 연예업계에 종사하고 있었고, 그의 소개로 TV에 출연했다.” 이후 공부는 뒷전이고 딴짓만 한다며 분노한 아버지가 대구로 불러들였지만, 그녀는 “친구들에게 뭔가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지닌 채 서울로, 브라운관으로 되돌아왔다. 중학 시절 30kg 이상 체중을 감량한 계기가 짝사랑하던 남자아이를 사로잡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드라마 출연에 애착이 보태지면서 그녀는 ‘드라마’틱하게 변해왔다.
출연 분량이 늘어가는 즐거움을 누렸던 미용실 종업원 미향(<사랑한다 웬수야>)을 거쳐 1회당 50여신이나 나오는 경숙(<황금사과>)이 됐을 때, 이영아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딱 보고 이거다 싶으면 그것만 생각한다. 당시 4회까지 나와 있는 대본을 읽었는데 경숙이라는 배역이 너무 끌리더라. 내가 가진 것을 다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조건 잘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시나리오에 사로잡힌 이영아는 첫 오디션에 낙방했지만, 누군가가 그 역할에 낙점될 때까지 계속 오디션에 참가할 것을 단언했다. 다른 배우와 연기 대결까지 펼친 끝에 마침내 ‘황금사과’를 거머쥔 그녀는 자신을 과수원을 내달리는 시골 소녀 경숙으로 착각했을 만큼 그 속에 녹아들었다. “그때 쟤는 신인이니 저 정도면 연기 잘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다. 나는 신인치고 잘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잘하고 싶었다.” 그런 경숙을 지워버리기도 전에 일일드라마 <사랑은 아무도 못말려>에 덤벼들었으니 8개월 동안의 촬영이 버거웠을 법도 했다. 법학도에게 빠져드는 여고생으로 등장한 <사랑은…>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연기한 까닭에 시작은 재미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지난하고 힘겨웠다. “일일드라마를 끌고나갈 실력이나 내공이 없었다. 순간순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거나 이 정도면 오케이해줬으면 하고 바랐던 내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그늘이 스쳤다고 생각한 찰나 곧 햇빛이 비친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지 못할 만큼 솔직하기도 하지만, 긍정적 사고방식을 지닌 쾌활한 사람이기도 하다. “살면서 언제 제일 힘들었냐고 물어보면 답할 말이 없다. 딱히 그랬던 적이 없으니까. 지칠 땐 거울을 본다. 그러면 팔다리가 멀쩡히 달려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웃음)”
인터뷰를 마친 이영아가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자 아물어가는 무릎의 상처가 눈에 띄었다. “3월 즈음 <사랑은…> 촬영 중에 넘어져서 다쳤다.” 아직까지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면 지독하게 다치긴 다쳤나보다. “감독님이 괜찮냐고 물었을 때 얼굴은 멀쩡하니 계속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웃음)” 강단있는 그녀는 7월 말 촬영을 시작하는 호러물 <귀신이야기>로 영화에 첫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랑은…> 때 상대역이었던 홍경민이 “여자로 봐주지 않아 서운했다”면서도 멜로가 아닌 호러를 선택한 것은, 읽으며 몇번이나 울었을 정도로 슬픈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임진평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귀신이야기>에서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어두운 기억을 간직한 설아 역을 맡았다. “제의가 들어오는 영화들이 대부분 예쁘고 귀여운 모습을 요구했지만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임진평 감독님은 지금까지의 내 이미지와 다른 모습에 초점을 맞출 거라며, 마음껏 내 자신을 드러내라고 하셨다.” <귀신이야기>는 김시후, 김태연, 이은우 등 또래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라 기대가 크다. “사진 동아리 학생들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갖가지 귀신을 만난다는 내용이다. 진짜 여행을 떠나는 느낌일 것 같다.” 목적지가 어딜진 모르겠지만 이영아는 분명 멀리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